茗禪, 차(茶)와 선(禪)과 서(書)의 경계
박덕준 입력 : 2016.04.05 09:48
한양에 다니러 온 황상(黃裳 1788 ~ 1870, 당시 62세)은 때마침 제주 유배에서 해배(解配)되어 온 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를 처음으로 만난다. 어린 시절 강진에서 다산(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에게 글을 배운 황상은 이제 시문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학연 형제뿐만 아니라 추사의 형제들과도 두터운 교분이 있었지만 유배 중에 있던 추사를 만날 수는 없었다. 이번에도 그 형제들을 만나러 온 길이었는데 뜻밖에 말로만 듣던 추사를 만난 것이다.
일을 마치고 한양에서 내려가자 곧장 대둔사(大芚寺) 일지암(一枝庵)으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를 만나러 갔다. 일지암에 도착한 황상은 초의를 만나 추사가 손수 쓴 글씨를 직접 보고 한 편의 글을 남긴다. 그 중에서도 竹爐之室(죽로지실)과 茗禪(명선)을 본 소감을 언급했다. 이후 또 한편의 글에 ‘명선’은 추사가 초의에게 준 호(號)( 추사가 명선이란 호를 주셨다, 秋史贈 茗禪之號)라고 기록하였다(초의행병서(草衣行幷序)>및 <걸명시>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329면 , 2011, 정민 , 김영사).
<추사의 작품 茗禪>
<茗禪(명선)> 작품은 추사(秋史)가 초의(草衣)에게 차를 받고 고마움의 답례로 써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가로 57.8cm, 세로 115.2cm’의 종이에 두 글자를 배치하여 글자 하나만 해도 50cm나 되는 아주 큰 대작이다 .
초의가 자신이 만든 차를 부쳐 왔는데 <몽정>차나 <노아>차에 못지않았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한다(草衣寄來自制茗 不減蒙頂露芽 書此爲報).
우측 방서에 작은 글씨로 작가는 그 뜻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황상의 윗글을 통하여 우리는 茗禪이란 두 글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확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명선(茗禪)’은 초의(草衣)의 호(號)가 되면서 우리에게 차(茶)와 초의선사 선(禪)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명선은 추사의 주변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두 글자이며 추사가 아니면 이 문장을 지을 수도, 지을 이유도 없는 글이다.
<글씨에서 의경(意境)은 서경(書境)이라 한다>
이제 이 작품을 <필묵법>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필묵법이란 화면에 표현된 작품 그 자체를 말한다. 우선 작가의 의도를 탐색하는 일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추사의 의도는 늘 의경(意境)에 있다. 글씨에서 의경을 서경(書境)이라 했다. <세한도>를 예로 들면 ‘소나무와 집’을 그렸다고 보는 것은 물경이고, ‘덧없는 인생의 쓸쓸함과 황량함’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 바로 그런 의경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 <명선>에서 추사가 의도한 의경은 무엇일까? 좌측의 방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用白石神君碑意 病居士隸( ‘백석신군비’의 意를 사용하였다, 병거사의 예서)
‘백석신군비의 意’를 사용하였다는 말은 이 비석의 글씨가 내포한 意(筆意 또는 意境)을 작가가 해석하여 이 작품의 컨셉으로 사용하였다는 뜻이다.
어떤 이는 이 비석에서 “茗禪”두 글자를 채집(없는 글자를 편방을 모아)하여 그 획 하나하나를 이 작품<명선>의 필획과 비교하며 서로 같은가 아닌가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글씨의 크기도 서로 비교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문의 글씨와 ‘같은가 아닌가’하는 등은 서예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에 부합될 수 없는 시각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추사가 추구한 글씨는 근본을 익혀 자신의 意를 가미할 것을 주장한다. ‘왕희지 글씨를 얼마나 똑같이 쓰는가’하는 당시 서단의 시각과 매우 다르다. 그러니까 <명선>에서 ‘<백석신군비>의 意를 사용했다’는 말은 그 비석의 글씨와 똑같이 썼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추사는 이 비문 글씨의 意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옹방강의 평가에 주목한다. 그는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에서 “이 비석의 서법은 오로지 방정(方整)함을 위주로 하여, 한나라 예서 가운데 가장 맑고 정제된 것(潔齊)이다. 그러나 (맑으면서도) 풍골의 굳셈(遵勁)이 흡사 <교관비>에서와 같이 우수하니 예법의 최고수준이다”(『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446면, 2011, 정민 , 김영사)의 참고자료에서 원문은 인용하였으나 해석문은 내용의 정확한 전달을 위하여 필자가 해석한 내용임을 밝힘. 翁方綱 ‘兩漢金石記’: 是碑書法專主方整, 在漢隸中最爲潔齊者, 然風骨遵勁 似優在’校官碑’ 隸法之上)고 평가하였다. 옹방강의 요지는 백석신군비의 글씨가 매우 방정하여 맑음이 특장인데 더불어 굳세기도 좋으니 예서법의 최고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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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의 意를 사용한 필자의 작품. 不二禪 (25×49, 2012, 전통한지) 意를 사용한다는 말은 똑같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추사는 과연 백석신군비의 意를 “방정(方整) 결제(潔齊) 그리고 풍골준경(風骨遵勁)”인 점을 수용하였고 이 <명선> 작품에 아낌없이 구현하였다. 방정(方整)이란 필획과 결구에 모가 나고 정돈된 것을 말한다. 실제로 백석신군비의 탁본은 여실히 이렇게 보인다. 그 결과 느낌은 맑고(潔齊) 굳세다(遵勁).
추사가 추구하는 예서는 방경고졸(方勁古拙)이라고 했다(<세한도의 문자 이야기> the Leader 2016년 3월호 참고). 즉 모나고 굳세며 옛스럽고 졸박함이다. 백석신군비는 ‘맑으면서도 굳세다’. 얼핏 보면 방경고졸과 크게 다를 것은 없지만 맑음과 굳셈을 더 부각시키면 어떤 화면이 만들어 질까?
작가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게 되자 종이 한 장에 두 글자를 가득 채울 것을 구상한다. 두 글자의 필획 사이 공간을 일정하게 하려면 당연히 필획은 굵고 강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가로쓰기보다는 세로쓰기가 적당하다. 왜냐하면 가로쓰기에는 상하 폭이 너무 넓어 폭을 잘라야 하는데 그러면 기존의 <죽로지실>과 같은 일상적인 구성이 되기 십상이다. 여기까지가 필자가 추측한 추사의 기본구상이다.
<추사의 화면 구성 원리-필획과 공간이다 > 이제 화면을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추사가 정리한 화면구성의 원리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는 완당전집 권8 <잡지>에 나와 있다. 필자 자신 또한 화면구성원리로 이 내용을 따른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필획>에 대한 측면이고 또 하나는 <공간>에 대한 내용이다. 우선 필획에 대한 내용인데 추사는 <내기>와 <외기>로 나눠 정리하고 있다.
한 글자에서는 8면 유통하니 이를 <내기>라 하고, 한 편의 글씨에서는 전체의 장법으로 조응하니 이를 <외기>라 한다. <내기>란 한 글자 내에서 획이 소와밀, 경과중, 비와수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평편하게 의미 없이 흩어져있기만 하다면 무슨 울림(기운)이 있겠는가? 『一字八面流通爲內氣。一篇章法照應爲外氣。內氣言筆畫疎密輕重肥瘦。若平板散渙。何氣之有』。
<외기>란 한편 전체에서 글자들이 허와실, 소와밀, 관과속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상하 글자 간에서 그런 관계가 있어야 하고, 또는 좌우간(映帶)에도 그런 관계로 서로 섞여(錯綜)야 한다. 第一字를 쓴 뒤 第二字는 (이런 관계를 생각해서 대응해야지) 똑같은 방식으로 쓰면 接上遞下에 의한 상하자간의 외기를 이루지 못하고, 第一行을 쓰고 난 뒤 第二行을 쓸 때는 역시 제1행과 똑같은 방식으로 쓰지 말아야 錯綜映帶에 의한 좌우행간의 외기를 이룰 수 있다.(완당집 권8) 『外氣言一篇有虛實疎密管束。接上遞下。錯綜映帶。第一字不可移至第二字。第二行不可移至第一行』 (이 부분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할 필요성이 있어 시중의 여타 해석과 달리 필자의 독자적인 해석임을 밝힌다). 글씨의 화면에서 하나의 획은 각각 에너지(기운)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획에서 나오는 기운은 옆에 있는 다른 획의 기운과 부딪쳐 그 공간에서 울림을 만들어 낸다. 글씨의 화면은 이런 기운들의 울림으로 구성된다. 그 기운의 울림이 한 글자 내에 있는 것을 <내기>라 하고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을 <외기>라 한다. 다음은 <공간>에 대한 내용이다.
포백(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획의 결정)에는 3가지가 있다. 한글자내에서 字中의 포백이 있고, 글자 상하간에 逐字의 포백이 있고, 行間의 포백이 있다. ) 『布白有三。字中之布白。逐字之布白。行間之布白』내기와 외기에서 기세가 울림을 발생하게 하는 데는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백)이란 기운이 흐르는 장(場)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공간은 글씨를 쓰다 보니 남게 되는 그런 ‘여백(餘白)’이 아니다. 글씨의 각 획에서 흐르는 기운의 흐름이 울림이 될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드는 적극적인 <쓰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화면구성 원리를 토대로 기운과 울림에 대한 추사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글씨에는 어떤 울림(기운,기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한 글자 내에서도 있고, 상하字間에서(
接上遞下) 좌우行間에서도(
錯綜映帶) 서려 있어야 한다. 이 울림은 기세로부터 발생하며 기세는 필획의 영역이지만 그 기세가 울림이 되는 곳은 그 필획의 사이인 공간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울림의 종류가 달라진다. 그 의도한 울림을 의경(意境)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한 글자 내에서도 공간개념(
字中之布白)이 있어야하고, 아래로 이어 쓰는 상하 글자 간에도 그 공간을 어떻게 할지(
逐字之布白) 생각해야하며, 우측 행을 쓰고 난 뒤 다음에 쓰는 좌측 행은 그 사이 공간을 어떻게 할 것 인지(
行間之布白)에 대하여 바라보아야 한다.
작품 <명선>은 <외기>보다는 <내기>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 자하 신위의 작품 <지영>은 외부 공간이 터무니없이 많다. 당시 조선의 작품들이 이와 유사한데 추사와 매우 대비되는 부분이다. <내기>에 집중한 작품으로 아래 <추사 대련 작품(부분)>이 하나의 예가 된다. 반면 <죽로지실>은 <외기>에 더 집중한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