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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경(단아):한국여성의전화 |
가정의 달 5월.
자녀나 부모님과 정을 나누며 뜻 깊은 시간을 가지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부부의 날(5월 21일)’을 기념하면서 그 의미처럼 둘(2)이 하나(1)가 되자고 다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으로 얼룩진 ‘가정’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에게 매년 찾아오는 5월은 자신의 불행을 더 깊이 확인하는 잔인한 달일 수도 있다.
‘가정’에서 벗어나 “나는 살고 싶다”고 외쳤던 그녀
2013년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5월 4일 새벽,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 이혼소송 중이던 김영희(가명·36)씨가 남편(61)에게 목 졸려 살해당했다. 이 사건은 가해남편의 진술 그대로 “부부싸움 중에 홧김에 저지른 살인”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숨진 김영희씨의 유가족과 그녀가 9개월간 피신해있던 쉼터 상담원의 요청에 의해 한국여성의전화가 사건지원을 시작하면서 가정폭력이 부른 참극임이 세상에 알려졌다.
김영희씨는 결혼생활 14년 동안 “줄곧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오면서도, 혼자 경제를 책임지고 남편의 전처 자식 셋과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쌍둥이 딸 둘을 키워왔다. 그녀는 셀 수 없이 목이 졸렸고 밧줄에 묶여 몸에 검붉은 피멍이 들었으며, 쌍둥이를 임신했을 때 길거리에서 구타당하기도 했다. “가정의 달인 5월 내내 남편이 정해놓은 규칙대로 일주일에 2차례씩 8번 폭행을 당하고 그 외에도 남편에게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수시로 맞아야” 했던 그녀에게 남편은 ‘지배자’였고, 가정은 ‘지옥’이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쉼터로 도망 나와 이혼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법원은 재판을 멈춘 채 10회기의 부부상담 명령을 내렸다. “쌍둥이가 보는 앞에서 죽여버리겠다.”며 부엌칼을 가슴에 들이댔던 남편과 함께 상담을 받으라는 것이다. 판사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그녀는 절망했다. 하루빨리 소송을 끝내고 싶었던 그녀는 “어린이날 하루만 애들과 함께 집에 돌아와 지내면 이혼해주겠다”는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혼재판 진술서에서 “저는 사랑스런 쌍둥이 딸을 위해... 무엇보다도 살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했던 김영희씨는 결국 죽음으로, 가정폭력은 살인을 부르는 무서운 범죄임을 증명한 것이다.
폭력을 피해 도망 나온 그녀에게 ‘가해자를 만나라!’ 명령하는 법정
이 사건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부부상담 명령을 제한’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별범죄’의 심각성이 연일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에 정부는 「가사소송규칙(제12조의2)」, 「가사재판, 가사조정 및 협의이혼 절차의 상담에 관한 예규(제6조, 제7조)」에 근거하여 ‘가정폭력 피해자는 법원의 부부상담 권고 및 가해자에 대한 자녀면접교섭권을 거부할 수 있다’며 대응하였다. 이는 “피해자들이 잘 몰라서 권리를 찾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꼴이어서 현장에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재판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판사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며, 설령 판사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고 탄원서를 보내도 법원 내규로 정해져 있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의 대응은 이같은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비록 직접적인 폭력을 당하지 않더라도, 부부상담 명령이나 가해자인 친권자에게 사전면접교섭권을 부여하여 사적인 자리에서 가해자를 만나게 하는 것은, 이미 오랜 기간 폭력을 당해 온 피해여성과 자녀들에게 법의 이름으로 가하는 2차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가정폭력은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극단적인 표현이며, 여성의 생명권과 생존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인권침해인 동시에 사회적 범죄행위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신변보호와 지원은 국가의 책무이며, 그녀들은 범죄 피해자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여전히 가정폭력범죄를 ‘부부싸움’이나 ‘가정불화’로 축소하고, ‘술김에’나 ‘홧김에’ 등 가해자 입장만 드러내며 개인적 문제로 취급해버리곤 한다. 김영희씨 사건이 일어난 후 세 번째 ‘가정’의 달을 맞고 있지만, 여전히 신문에는 ‘가정’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다 살해된 아내들의 기사가 올라온다.
“이혼 요구하는 한국인 아내 살해 후 시신 용광로에 유기” | 매일경제 2016.04. 22.
“이혼·재산분할 다투다 아내 살해한 50대 징역 10년” | 연합뉴스 2016.03.30.
“이혼소송 냈다고 부인 살해한 50대, 징역 20년” | 세계일보 2016.03.24.
“재산분할문제로 다투다 아내 살해 후 자살” | 영남일보 2016.03.16.
김영희씨 뿐 아니라 쉼터에서 만나온 무수한 가정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통해 남편들의 살해위협과 살해행동은 가정폭력의 일반적인 패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아내의 이별요구에 대한 남편들의 보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끈질기고 집요하다. 가해남편의 이러한 속성을 잘 아는 피해자들은 남편과 대면해야하는 재판이나 조정기일이 잡히면 불면과 악몽, 온몸에 발진과 통증 등의 신체화증상이 나타나 고통을 호소한다. 그래서 짧은 기사 몇 줄에서도 그녀들이 견뎌오다 죽음으로 끝난 가정폭력의 암담한 현실이 그려져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민경(가명, 42세)씨는 남편과의 이혼소송을 시작하면서 남편을 피해 자녀들과 함께 쉼터에 입소하였다. 지난 2월 법원은 이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남편에게 자녀들의 면접교섭권을 부여하였다. 가정폭력 상황을 목격해온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만나길 원치 않았으나, 법원의 명령이기에 이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에게 가야했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오면 매번 복통이나 두통과 같은 신체화 증상으로 괴로움을 호소했다. 더구나 면접교섭 과정에서 아이들이 비밀전학한 학교를 끝까지 숨길 수 있을지 의문인데다 가해자의 미행 등으로 쉼터의 위치가 노출 될 수 있는 상황이어서 쉼터 실무자들과 다른 입소자들 모두가 심한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가정폭력 범죄 피해의 특수성이 반영된 법개정 필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가정법원의 ‘부부상담 명령’이나 가해자에 대한 ‘자녀면접교섭’ 사전처분은 보복이 두려운 아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쉼터에 피신해있는 여성과 자녀들이 별다른 보호책 없이 가해자를 만나게 되면서 비밀전학한 학교와 보육시설, 비공개시설인 쉼터까지 노출되어 폭력피해의 위험에 놓이게 될까봐 쉼터는 늘 불안하다. 또한 평균 1년 정도 걸리는 재판이혼 기간이 부부상담으로 인해 2~3달 연장되면서 하루빨리 피신생활을 끝내고 사회에 복귀하길 원하는 피해자들의 자립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제4조 ‘국가 등의 책무’에는 ‘피해자 신변노출 방지 및 보호·지원체계 구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나가 가해자를 대면해야할 때 민간인인 가정폭력 상담소 및 보호시설 상담원들이 동행하도록 규정하고 ‘긴급히 구조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만 경찰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국가는 이혼 과정 중 가해자와 대면하거나 정보가 노출될 수 있는 상황을 최소화하여 피해자와 동반자녀의 신변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경찰이 수사기관이나 법정 동행의 업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가정폭력 피해자의 신변을 보다 확실하게 보호해야 한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더 이상 김영희씨와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이혼과정 중 피해자 신변보호’ 조항을 신설 또는 개정하는 관련법 개정안을 마련하였다. 가정폭력 피해자의 이혼과정 중 부부상담을 제한하고 미성년 자녀에 대한 가해자(친권자)의 면접교섭권을 배제하는 대신, 피해자가 직접 부부상담 등을 법원에 신청하는 경우에만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는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정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가정폭력은 인간의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범죄행위이며, 따라서 가정폭력 관련 사건처리에서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피해자와 자녀의 안전이다. 20대 국회에서는 ‘이혼 중인 피해자 보호’를 법률로 명시하고, 불가피하게 피해자가 법원 등에 출석해야 할 경우 훈련된 가정폭력전담경찰이 동행하도록 법제화되길 바란다.
◆주요 개정 제안 내용
▲ 가정폭력을 이유로 이혼을 신청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이혼 과정 중 부부상담을 제한, 단 피해자가 직접 신청한 경우는 제외
▲ 피해자가 양육 중인 미성년 자녀에 대한 가해자(친권자)의 면접교섭권 배제, 단 피해자가 직접 신청한 경우는 제외
▲ 가정폭력을 이유로 이혼 및 친권, 양육권 등 가사소송사건의 소를 제기한 경우 이를 신속히 진행하도록 하는 규정 마련
프로필
현 전국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협의회 상임대표
현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쉼터 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