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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택수 이사장 |
소국(小國)이 비록 자신의 정치체제나 독립성은 유지하더라도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대국(大國)의 영향력에 압도되어 자신의 독자적 입장을 관철할 수 없는 현실적 사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세계2차대전 전에 스위스와 덴마크는 군사강국인 독일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였다.미소간 냉전이 한창이던 1948년 핀란드는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소련과 상호협력 지원협정을 체결,미소간 고래 싸움에 끼어 언제나 새우가 되는 운명에서 벗어난다.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인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도 가입하지 않고, 소련 주도의 군사동맹인 WARSAW(바르샤바협력기구)에도 가입하지 않으면서 외형상으로는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하게 된다.
하지만 핀란드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처지에 놓였다.결과적으로 미국의 유럽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 의 혜택도 받지 못했다.소련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군사적 공격행위에 대해 공동으로 방위해야 하며,필요한 경우 소련의 군사적 협력을 받도록 의무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핀란드는 여야(與野)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1948년부터 소련이 해체된 1991년까지 자신의 민주주의 정치시스템과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는 대신 소련의 외교와 안보에 관하여는 일체 도전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 왔다.
대국 간 틈바구니에 끼어 새우신세가 된 소국들의 생존 모델 중에서 핀란드와 같은 선택을 흔히들 ‘핀란드화(Finlandization)’라고 부른다.‘핀란드화’라는 개념은 미소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한동안 지구상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단어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현실적 국제정치 질서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으로 새롭게 재등장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1300km가 넘는 국경을 서로 마주하고 있다.인구는 5백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다.우크라이나는 현재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국가 틈새에서 독립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데, 서방세계의 유명한 전문가들은 핀란드식 모델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브레진스키(Z. Brzezinski)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 등 서방세계가 러시아를 자극할 우려가 있는 군사적인 행동을 자제하고, 우크라이나를 NATO에 가입시키는 것과 같은 어떠한 군사동맹에 대해서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키신저(H.Kissinger) 전 미 국무장관도 러시아와의 적대적 긴장관계를 조성하지 않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스스로 핀란드식 생존모델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러시아와는 다른 민주주의 정치체제 및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원하고 있다.러시아와 거리를 두고 서방세계에 편입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외교안보계의 큰 별(巨星)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두 현인은 서방세계가 우크라이나를 사실상 포기하고 러시아에 넘기라고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만일 우크라이나에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개입할 경우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켜주기 위하여 참전을 할까?
이미 국내 정치 및 경제여건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군사전략을 바꾸어 가고 있는 미군은 전쟁비용을 혼자서 부담할 능력도 없다. 게다가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국가들도 전쟁 비용을 분담할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브레진스키와 키신저는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 를 지지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
‘대만의 핀란드화’ 논쟁
미국의 국제 정치학자 가운데 일부는 ‘대만의 핀란드화’가 오히려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사실상 ‘대만 포기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중국의 영토요구가 한정적이며 중국의 패권주의적 행동도 과거의 소련과는 달리 제한적이므로 쓸데없이 ‘중국위협론’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대만의 핀란드화 또는 대만문제에서 미국이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이 오히려 긴장관계를 완화하고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킬 수 있어서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다. 대만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한 핀란드화가 아니고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차원에서 거론되는 셈이다. 대만에 대한 군사적 보호막을 철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대만의 핀란드화 주장은 안보를 절대적으로 미국의 보호막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중국대륙의 굴기(崛起)로 대만의 핀란드화가 실제로 진행된다면 중국대륙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핀란드화라는 문제를 쉽게 피해가기 어려운 환경변화이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우물 안 개구리적 생각에 사로잡힌 조선의 대부분 지도계층들이 눈치도 못 챈 상황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세력 불균형이 조선의 생존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였는지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세력 균형은 이미 깨어지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때까지는 불안정과 주변의 흔들기가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마치 큰 지진 이후에 수백차례나 계속 되는 여진(餘震)처럼 큰 폭의 변동과 불안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잠깐 역사를 되돌려 보자. 1950년1월5일 미국정부는 대만 불개입(不介入)을 선언하였다. 이어서 동년 1월12일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미국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활(死活)적 군사방위 영역을 규정한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공개한다.미국의 ‘불후퇴방위선’에 한반도와 대만을 동시에 제외하고 미국 알래스카의 알류산 열도에서 일본의 본토와 오키나와,필리핀과 호주를 연결하는 선만 포함한다는 것이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군사적 지원이 없을 것을 확인한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1950년에 약 6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만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김일성이 1950년에 6.25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중국은 1950년이나 1951년에는 대만을 무력으로 공격하였을 것이다. 중국 대륙이나 대만에서 터질 전쟁이 김일성의 오판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 먼저 터진 셈이다.
미국은 한반도나 대만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관심은 오로지 유럽지역이었다.미국은 1947년부터 4년 간에 걸쳐서 유럽의 부흥을 위하여 총 130억 달러 규모(현재가치로는 약 1,300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하지만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한국과 대만에 대한 경제원조 계획은 모두 합쳐도 1억 달러를 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H.S.Truman;재임기간 1945~1953년)은 소련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해 4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의회에 요청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한국정부의 군사지원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심지어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에서도 외교나 안보상으로는 다소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엉뚱한(?) 주장을 펴기도 했다.
요즈음 미국대통령 후보로 등장한 트럼트의 엉뚱한 주장과 오십 보 백 보다. 필자의 눈으로 볼 때, 트루먼 대통령은 ‘한반도의 핀란드화’를 사실상 공개적으로 지지한 첫 미국 대통령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한국과 대만을 경시하던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10월 예정된 미국의 의회선거를 앞두고 중국대륙을 상실하였다는 국내의 정치적 비판에 시달렸다. 이 와중에서 예상치 못하게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칫하면 아시아 전역을 공산주의세력에게 상실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한반도 참전을 결정한다.
실제로 6.25전쟁에 놀란 미국정부는 유럽중시정책을 보완하여 황급하게 아시아 방위전략을 재검토했다. 그 결과 1951년에는 서둘러 일본과, 1953년에는 한국과, 1954년에는 대만과 각각 상호군사방위조약을 체결했다.유럽국가들과의 집단적 군사동맹인 NATO(1949년)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개별국가를 상대로 한 일방적이고 종속적 군사동맹이었다.
‘한반도 핀란드화’의 외부요인;중국의 굴기(崛起)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지정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와 대만은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가장 중요한 첫째 이유는 중국의 대륙의 굴기(崛起)이다.이미 중국은 경제대국을 넘어서 아시아 지역 내에서 군사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실력을 확충해 가고 있다. 2026년까지는 중국이 생각하고 있는 군사적 방어선인 제1,2도련(島璉)내에 미국 군사력의 진입을 억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해군력을 갖추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중국이 역내에서 역외세력인 미국의 군사력 개입을 억제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게 된다면, 미국도 중국을 함부로 대하기는 매우 어려워 질 것이다. 중국은 이미 유엔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임이사국(permanent member)이어서,국제정치상으로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정치적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등소평이 결정해 놓은 대외외교의 기본방침인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다.시진핑 주석의 등장 이후에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외교를 적극적인 수단으로 활용하기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동안 자신의 경제발전을 위하여 국제사회에서 미국등과의 충돌을 적극적으로 피해 왔던 도광양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대국인 중국은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한반도를 자신의 앞마당(家門口)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또 대만을 실제적인 통합의 필요성이나 이익보다는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습성 상 자신의 앞마당인 한반도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중국이나, 스스로 통일도 못하는 중국의 입장을 그들 스스로 언제까지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핀란드화”의 외부변수;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
민주주의와 인권존중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미국 정부가 대외 외교정책의 핵심적 구성요소인 것처럼 공개적으로 주장해 왔다.미국정부의 이러한 주장은 물론,미국의 국익과 일치할 때에만 유효하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된다.
흔히 미국정부가 생각하는 미국의 국익(National Interests)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경제적 군사적으로 구체화 될 수 있는 실질적인 이해관계이다.따라서 미국의 국내외적 환경변화에 따라서 언제나 모습을 달리하는 변수라고 보아야 한다.
필자가 언제나 주장하는 바이지만,미국의 국익이 바뀌면 제일 먼저 변하는 것은 국익을 지키기 위한 넓은 의미에서의 ‘미국 군사전략(military doctrine 과 military strategy)’이다.
뿐만 아니라 국익의 구체적 내용이 바뀌지 않더라도 많은 경우에 국익을 지키기 위한 군사전략은 변화할 때가 많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미국의 군사전략을 면밀히 파악해야 할 근본적 이유이다.미국의 외교정책은 대부분 군사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수적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령 6.25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애치슨라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외교적 판단이 아니라 군사전략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른바 ‘soft power’로서 외교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한다.하지만 속을 알고 보면 이런 soft power도 미국 군사전략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광의의 군사전략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최근 들어 미국은 소위 ‘2+2 meeting’이라고 해서 상대국들과 국방장관 및 외무장관을 함께 참석시켜서 회의를 하는 빈도가 급속히 늘고 있는데 이는 미국 외교정책의 본질과 근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군사전략은 그동안 기조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장래에 ‘한반도의 핀란드화’를 초래할 지도 모르는 많은 위험성과 불확실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 중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경우를 불안하게 느끼고 있는 듯하다.그러나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추세로 인하여 한반도의 핀란드화 염려가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미국 군사전략의 변화는 우리에게 吉兆인가 凶兆인가?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