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전설의 ‘신의손’, “제 2의 신의손 키울터”

한국은 제2의 고향, 한국팬들이 선물한 이름에 맞는 지도자 될 것

편승민 기자입력 : 2016.06.08 10:27
편집자주더리더는 5월부터 한국에 정착, 혹은 귀화한 외국인들 중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고자 한다. 한국의 세계화 안에서 그들의 역할을 조명하고, 인종을 떠나 하나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들어보고자 한다.

▲신의손 이천대교 여자축구단 골키퍼 코치
더리더가 만난 두 번째 글로벌 리더는 한국 축구팬들 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있는 골키퍼 계의 신의 손, 現 이천대교 여자축구팀의 ‘신의손’ 코치다. 2000년, 외국인 축구선수로는 최초로 한국에 귀화한 신의손 선수는 1992년 일화 천마(現 성남FC)에서 용병으로 스카우트했던 구소련의 스타 골키퍼였다. 그가 온 이후 일화 천마는 1993년, 1994년, 1995년 K리그 3연패라는 진기록을 세웠고, 그의 뛰어난 활약은 ‘외국인 골키퍼 제한 제도’가 생기는 시초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92년부터 은퇴 전인 2004년까지 K리그 통산(1999년 시즌 미출장) 320경기 출전과, 357실점, 114경기 클린시트(무실점)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한국 팬들이 선물한 별명인 ‘신의손’을 그대로 자신의 한국이름으로 정한 신의손 선수는 이제 제 2, 제 3의 신의손을 탄생시키기 위해 다시 그라운드를 뛰고 있다. 외국인이라면 편견도 많고 색안경을 꼈던 그 시절, 대한민국에 다가와 축구에 대한 열정과 골키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K리그 전설의 골키퍼, 신의손 코치를 만나보았다.


먼저 한국에 오기 전, 타지키스탄에서 축구선수로서의 삶이 궁금하다
“1960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의 두샨베(현 타지키스탄의 수도)에서 태어났다. 10살이었던 1970년부터 축구를 시작했다. 당시 소련은 축구시스템이 발달해서 축구인재들을 양성하는 축구학교가 굉장히 많았다. 그렇게 축
구를 시작하여 학교를 마치고 대학교에 갔다. 6개월 대학생활을 하고 18살에 바로 프로축구단에 들어갔다. 소련 리그 중에서 프리미어 리그 바로 아래인 1부리그(First Division)의 SKA-파미르 두샨베에서 3년 반 동안 선수 생활을 했
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는 바로 군대에 갔는데, 당시 소련에서는 대학을 마치면 1년간 군복무를 하면 되었다. 군대에 가서는 상무팀인 PFC CSKA 모스크바에서 뛰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난 후인 1981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로 가서 다음해부터 프로팀인 FC 토르페도 모스크바의 선수로 활동했다. 모스크바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팀은 총 5개 팀이 있는데 그 중 한 팀이었다. 모스크바에서는 1991년까지 총 10년간 축구선수 생활을 했다. 간략히 말하자면, 1980년에 첫 프로팀으로 출발하여 1981년에는 상무팀 소속이었고, 제대 후 1982년부터 1991년 까지는 프리미어리거로 뛰었다.”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 되었나?
“10년 동안 프리미어리그에 있었고, 많은 게임을 소화했다(통산 161게임 출전). 1991년에는 소련리그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한국의 한 사업가가 프로 골키퍼를 스카우트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소련과 한국은 굉장히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였는데 한국의 삼성, 쌍용, LG 등 전자기기, 자동차 산업들이 소련에 많이 들어왔었다. 그 때 한 사업가가 소련에 오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당시 일화 천마(현 성남FC)의 박종환 감독과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그에게 박종환 감독이 “소련에 가면 괜찮은 골키퍼가 있는지 한 번 알아봐 달라.”고 해서 축구계 쪽에 수소문을 했었다고 한다. 그때 제가 MVP에 선정되었을 때였고, 또 마침 계약이 만료 되었을 때라 시기가 잘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1991년 10월에 한국에 와서 입단테스트를 받았고 이듬해인 1992년부터 일화 천마의 선수로 뛰게 된 것이다.”


타지키스탄과 비교했을 때 한국은 어땠나? 적응하기 힘들지 않았는지?
“타지키스탄이나 한국 모두 아시아 특유의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소 비슷한 점들도 많게 느껴졌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럽이나 미국처럼 다른 대륙에서 온 선수들은 문화나 국가적인 시스템, 나라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저는 아시아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익숙한 상황도 있어 많이 어렵지 않았다. 또 한가지, 적응이 많이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가족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제 딸은 8살이었고, 아들은 6살이었는데 딸 아이는 한국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다녔다.


딱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언어적으로 내가 한국어나 영어를 하지 못했던 것이 약간의 어려운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는 한국과 잘 맞는 것 같다.”


▲신의손 이천대교 여자축구단 골키퍼 코치
과거 K리그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활약하면서, 급기야 외국인 골키퍼 용병제도가 금지 되기도 했는데?
“1992년, 한국에 와서 선수생활을 하기 시작 했다. 1992년부터 1998년 까지 일화에서 뛰었다. 제가 처음에 왔을 때만해도 일화 천마는 매우 약한 팀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총 6개의 프로축구팀이 있었는데 일화는 거기서도 5~6등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가 온 해에 정규리그 준우승을 했고, 아디다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다음해인 1993년에는 우승을 차지했고, 1994년과 1995년에도 우승해서 K리그 3연패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1996년에는 아시안슈퍼컵, 컨티넨탈컵에서까지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일화가 외국인 골키퍼 한 명을 영입했을 뿐인데 모든 경기에서 우승을 하자 이제 다른 모든 팀들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점점 한국인 골키퍼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었고, 한국축구연맹으로선 골치가 아파진 것이다. 한국인 골키퍼들의 입지가 줄어드는데 누가 하겠는가? 그래서 그때 ‘외국인 골키퍼 제한제도’가 생겼다. 제도가 생기고 나서 1996년에는 이전 게임 출전의 70%, 1997년에는 50% 밖에 못 하였고, 1998년에는 10게임 밖에 못 뛰었다. 그리고 난 후, 1998년에 일화와의 계약이 끝나서 LG로 옮기게 되었다. 지금 FC서울의 전신 팀이다. 당시 LG 감독이었던 조광래 감독이 절 불러서 골키퍼 코치를 제안하였다. 그렇게 1999년부터는 LG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에 이런 조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했나?
“‘그냥 골키퍼일 뿐인데…다른 포지션들도 많은데 왜 하필 골키퍼에만 그런 제도가 생길까?’ 하는 생각이었다. 만약에 이런 제도가 유럽에서 생겼다면 그건 굉장히 큰 이슈가 되고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속이 좀 많이 상했다. 나이는 들었지만 충분히 아직은 선수로서 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상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이해하기로 하고 ‘그래, 그렇다면 내가 나의 새로운 인생을 살겠다.’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코치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고, 그 다음해에는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다시 선수로서의 삶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계속 시도하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느낀다. 인생은 계속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시도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Life is a test for everyone.(인생은 누구에게나 시험인 것이다.)”


LG로 이적한 다음해인 2000년에 귀화를 결정했다. 귀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다음 해에 조광래 감독이 코치가 아닌 선수로 뛸 것을 제안해왔다. 제가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조광래 감독이 귀화 시험을 보고 한국인으로서 선수생활을 하는 것은 어떻겠냐고 하며 LG가 저를 서포트 하겠다고 했다. 그 다음주에 조감독이 다시 한 번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봤고,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 문화 등을 공부했고, 시험을 봐서 통과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인이 되었고 다시 축구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다. 기쁘게도 선수생활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LG가 그 해에 우승을 하였다.”


귀화를 하면서 한국이름을 그 동안 불렸던 별명인 ‘신의손’으로 하였는데, 사연이 있나?
“1992년 한국에서 어느 날 저녁에 스포츠뉴스를 보고 있었다. 저는 한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냥 화면만 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한국 축구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서 아나운서의 등 뒤로 제 사진이 나온 것을 보았다. 제 사진 밑에는 제 이름인 사리체프가 써 있었고 그 옆에 ‘신의손’ 이라는 말이 같이 써있었다. 그땐 ‘저게 무슨 말이지?’하고 말았는데 다음날 갔더니 팀 동료들이 저를 “신의손!”이라고 불렀고 신의손이 어떤 뜻인지를 그때 비로소 알았다. 사람들이 Hands of God이라고 알려줬다. 그런 큰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이 당시에 굉장히 놀라웠다. 그렇게 신의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몇 개월, 몇 년이 지나게 되었고, 제가 한국으로 귀화하던 날 그 이름은 제 진짜 한국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제가 귀화할 당시 조광래 감독이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귀화를 하게 되면 한국이름을 하나 지어야 하는데 어떤 이름을 하겠나?” 라고 물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중 조광래 감독이 “LG 홈그라운드가 구리고 사람들이 당신을 신의손 이라고 부르니, 구리 신씨로 하여 신의손을 이름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였다. 저도 그 생각이 좋은 것 같아 바로 OK를 했다.(웃음) 한국 축구팬들이 저에게 이름을 선물해 준 것이다.”


어쨌든 축구를 위해 귀화를 하였는데, 한국인으로서의 삶은 어떤가?
“저에게 있어 스포츠란 이런 것 같다. 제가 한국사람으로서 한국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새로 받게 되자, 제 머릿속은 ‘이제 다시 축구선수 생활을 할 수 있어!’라는 생각뿐이었다. 다른 부분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 살기 위해서는 한국을 좋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스타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힘들다. 한국을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귀화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Korea is my second home.(한국은 제게 제 2의 고향이다.)


제가 머무르는 동안 느낀 것이지만 한국은 굉장히 빠르고 급격하게 성장을 했다. 경제,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단 한가지, 한국이 가진 문제라고 한다면 북한 문제만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은 북한일 뿐이다. 제가 태어난 소련도 같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는 시간을 가지고 더 지켜봐야 할 부분이다. 다른 부분에서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제가 느끼는 한국 문화나 사람들 모두 너무 좋다. 저는 한국스타일을 좋아하고 이건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제는 플레이어가 아닌 코치로서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떠한가?
“제가 벌써 코치로서 생활을 한지도 10년이 넘었다. 굉장히 많은 경험을 쌓아왔다고 할 수 있다. 여러 프로팀 선수들과, 여자 프로축구팀 선수들을 가르쳤다. 또한, 홍명보 감독과 함께 U-20 국가대표 축구팀과 올림픽 대표팀 코치도 맡았다. 일을 할 때 있어서 저는 모든 사람들과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고 있다. 그 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제가 오랫동안 선수로서 가졌던 노하우 등을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모두 쏟아 부어 주려고 하고 있다. 저는 이제 더 이상 선수가 아닌 ‘선생님’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최대한 모두 가르쳐줘야 하는 게 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과 이야기할 때는 전부 다 한국말로 대화를 한다. 저는 통역사를 따로 두고 일하거나 하지도 않는다.(인터뷰는 영어로 진행했지만, 그는 필드에서 만큼은 100% 한국어로 모든 소통을 한다고 말했다.) 축구 언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모두 이해를 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신의손 이천대교 여자축구단 골키퍼 코치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귀화했을 당시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한국 축구가 많은 발전을 했는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한국축구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막상 선수로 시작하자 그렇게 약하지 만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국축구는 마치 한국 경제가 성장하듯이 멈추지 않고 엄청나게 큰 발전을 했다. 세계 다른 어느 국가를 보아도 한국만큼 모든 면에서 이렇게 빠른 성장을 하는 국가는 없었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보면서 한국축구는 성장이 아니라 엄청난 도약을 했다고 느꼈다(It was not growing up. It was jump!). 이건 세계 어디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한국이 이뤘다고 본다. 월드컵 전에는 다른 나라 축구선수들이나 프리미어 리그 선수들도 한국이라고 하면 잘 모르고 약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월드컵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영국,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 많은 선수들이 뛰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한국에는 앞으로도 기대할만한 선수가 많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축구계의 새로운 문을 열었던 리더로서, 앞으로의 꿈은?
“아까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인생은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른다. 하지만 우선 저는 지금 코치로 일하고 있고, 이 곳 이천대교 여자축구팀에서 좋은 골키퍼를 양성하고 싶다. 그 다음으로는 국가대표팀 골키퍼를 양성시키고 싶다. 그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의손’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제게 굉장히 큰 이름이다. 저는 이 이름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저를 인정해주고 지어준 이름이기에 굉장히 만족하고 좋다. 마지막으로 축구팬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신의손 코치
(본명 : 발레리 콘스탄치노비치 사리체프)
–– 1960년 1월 12일, 타지키스탄 두샨베 출생
––두샨베 SKA-파미르 두샨베
––모스크바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소련리그 올해의 골키퍼 선정(1991)
––일화 천마(1992-1995)
––천안 일화 천마(1996-1998)
––안양 LG 치타스 플레잉 코치
–– FC서울/FC서울 코치
––경남FC 골키퍼 코치
––대교 캥거루스 골키퍼 코치, 수석코치
–– U-20 청소년 국개대표팀 골키퍼 코치
––부산 아이파크 골키퍼 코치
––現 이천대교 여자축구단 골키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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