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書境)은 시경(詩境)과 같은 것

언제부턴가 노래하는 가수를 선발하는 방송이 여기저기서 자주 보인다. 어린 나이에도 어쩌면 저렇게 노랠 잘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음악 실력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 무대에서 떨지 않고 청중들을 감동 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심사하는 분들이다. 노래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꼭 집어내는 일이 아주 귀신같다.

가수가 노래하면서 이 부분에서는 어떻게 부르고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지 등등 이런 저런 생각이 많으면 듣는 사람은 어쩐지 답답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생각은 줄이고 자신의 노래에 흥을 느끼면서 부르면 듣는 청중들은 역시 흥겨워 한다는 것이다.

세필쓰기 모임을 처음 시작할 당시가 생각난다. ‘쓰기’에는 가능하면 제한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붓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동작 한 두 가지, 그리고 문자와 뜻풀이 정도에 그쳤다. 나머지는 자유롭게 쓰도록 하며 매회 반복적으로 진행하였다. 처음 참석하는 회원도 첫날부터 바로 글씨를 쓰게 했다. 회원들은 이를 일명 ‘다짜고짜 쓰기’라고 부른다. 몇 회를 거듭하자 자신의 느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심하게 쓰는 분도 있고 예쁘게 쓰는 분도 있고 단아한 모습, 과감한 모습들, 참으로 다양하게 자신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었다.

글씨를 쓰고 있을 때 쓰는 이의 생각에 따라 글씨의 느낌이 달라진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서 쓰면 로맨틱하게 보이고, 잘 써 보이고 싶은 욕심이 있다면 그 마음도 드러난다. 조금 안다 싶으면 금세 자만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아무 생각이 없으면 습관적으로 쓰고 있음이 드러난다.

글씨를 쓸 때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맑은 마음이 우선이다. 그 다음은 상황에 적절히 젖어들어 흥을 타는 것이다. 글씨도 짧은 순간에 몸의 동작을 통하여 드러내는 작업이라서 그 부분에서는 노래하는 상태와 흡사하다. 어느 정도 경력이 있다하더라도 보통의 경우는 붓을 움직이는 동작에 마음을 뺏기게 되고 그렇게 쓴 글씨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보기에도 편안하지 못하다.

반면에 ‘다짜고짜 쓰기’는 구속받기 쉬운 초심자의 마음을 오히려 풀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모임의 시간을 즐기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면모가 언뜻 언뜻 드러나고 있다. 그분들의 작품(매달모임에 한 장 씩 제출)을 감상하는 일 또한 매우 즐겁다.

외형적 형상과 내면적 意의 표현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는 것, 서법(書法)의 진정한 모습은 이런 점에 있다. 문자와 문장으로 어떤 글귀를 쓰는 것은 서법의 1차적 표현이다. 중요한 것은 2차적 표현에 있다. 그것은 바로 글귀를 쓰고 있는 동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면의 의도(혹은 무의식의 발현을 포함)이다. 이는 예술이라고 이름붙인 모든 양식에 존재한다. 시에서도 사진에서도 작가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면의 의도가 따로 있다. 서예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추사는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고 있는가?

2차적 표현을 읽어내지 못하고 추사작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추사작품의 이해가 어려운 것은 작품 해설이 1차적 표현의 풀이에 그치고 있을 뿐, 내면적 표현의 해설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점을 명쾌하게 풀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2차적 표현의 방식과 구조를 통해서 내면을 더듬어볼 수는 있다.

문자와 문장을 쓰는 것은 1차적 표현이다. 2차적 표현인 내면적 의도를 서법에서는 ‘意(의)’라 불러왔다. 작품으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논의가 시작되는 점이 바로 이 ‘意’로부터이다. 오래된 가르침에 意在筆先(의재필선)이란 말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意가 붓으로 쓰기 이전에 먼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意가 밖으로 드러난 것을 意境(의경)이라 할 수 있다. 화면에 구현된 것이다. 감상자는 드러난 意境을 통하여 비로소 내재된 작가의 意를 읽어보려 한다. 시(詩)에서는 意가 드러난 것을 시경(詩境)이라 하는데, 시경의 종류를 24가지로 나누고 있다. 사공도(司空圖, 837~908)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 유명한 ‘시품(詩品) 24’가 그것이다. 이는 예컨대 시가 풍기는 분위기가 웅혼(雄渾)한가, 청기(淸奇)한가, 또는 기려(綺麗) , 위곡(委曲), 전아(典雅), 평담(평담)한가? 등이다.

서법에서도 추사는 서경(書境)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서법에서 意가 표현된 것이란 뜻이다. 『완당전집 권 8(잡지)』에 그 내용을 이렇게 남기고 있다.

시서화(詩書畵) 세 분야는 그 묘경이 같다고 한다. 예술이 되는 지점이 같다는 뜻이고 감상하는 포인트가 일치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서법은 시에서 말하는 <시품 24>와 같은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서경도 <시품 24>와 똑 같이 분류할 수 있고, 2차적 표현의 묘사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명하기도 난해한 서법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한 예를 보지 못했다. 서법의 창작물이란 결국 엄밀히 말하자면 붓글씨라는 외형적 산물이 아니라 그 외형을 넘어서 만날 수 있는 書境이라 할 수 있다.

아래는 ‘단연 죽로 시옥(端硏 竹爐 詩屋)’ 여섯 글자를 쓴 추사의 작품이다. 벼루 중 으뜸이라는 단계석(端溪石) 벼루, 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인 죽로(竹爐), 시를 지으며 살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집인 시옥(詩屋)이란 뜻이다. 문자를 쓰고 내용을 담는 것은 작가의 1차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 작품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추사의 2차적 표현은 무엇인지 이점을 염두에 두고서 논의를 이어 가 보려한다.

▲<김정희(金正喜) 紙本墨書 (81X180)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국립중앙박물관 발행 2006년 도록에서 발췌)

意의 표현 방식–존재론 / 관계론

이상 意와 意境과 書境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글씨를 쓰면서 어떻게 意를 표현하는가 하는, 표현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가장 생경한 부분이다. 서법에서 중의적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서법을 이해하는데 가장 난해한 부분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지만 정리를 해보도록 하자.

고금의 여러 작가들에게서 意라는 것이 표현되어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정리하면 크게 두 가지 입장에 따른 것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종이에 쓴 각각의 글자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입장이고, 또 하나는 글자들은 독립적이 아니라 이들 간의 관계를 본질로 보는 입장이다.

전자의 경우 서예로 글씨를 쓰는 것은 개체로 정해진 각각의 문자를 쓰는 것이며, 글자의 형태적 아름다움 즉 ‘조형미’를 잘 표현하는 것이다. 쓰여진 문자는 개별적이며 시각적 외형의 아름다움에 가치를 두고, 문자의 변용보다는 서체별로 정형화된 문자를 중시한다. 이런 관점으로는 ‘시서화(詩書畵) 동일 묘경’이란 정리가 성립되기 어렵다. 즉, 서법의 핵심적인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상이지만 많은 서예관련 종사자들이 이 현상에 묶여있다.

여기에 비해 후자는 문자의 개별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관점이다. 배타적 독립성이나 개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질로 규정한다. 전자가 서양의 근대사회 구성이론인 <존재론>적 관점이라면 후자는 철저히 동양의 <관계론>적 입장이다.

관계론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서법의 2차적 표현은 ‘필획(筆劃)’과 ‘공간(空間)’이라는 두 개의 요소가 주인공이 되고, 이들이 어떤 관계를 만들면서 비로소 다양한 표현이 가능해진다. 이런 관점에 있는 작가는 글씨를 쓰면서도 글자의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관계에 집중한다. 이는 추사의 서법에서 확연하게 볼 수 있는 2차 표현의 방식이다. 따라서 ‘조형성’이란 필획과 공간이 관계를 만든 결과 부차적으로 나타난 외형에 불과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추사의 서법에 ‘조형적’이다, ‘조형미가 있다’라는 찬사는 얼마나 왜소한 언급인가.

意의 표현 방식은 관계론적 입장에서 출발한다. 이제 意를 표현하는 몇 가지 ‘관계’의 구체적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필획과 공간은 화면에서 두 주인공이라고 했다. 필획에 대해서는 아직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공간에 대해서는 이 지면을 통해 이미 몇 번 언급했다. 공간을 제외하고는 意의 표현방식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필획과 공간이 흑(黑)과 백(白)의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앞에서 본 작품 <端硏 竹爐 詩屋>과 다음 작품<명선(茗禪)>은 흑 백 관계가 뚜렷이 대비된다. <端硏 竹爐 詩屋>은 백이 흑보다 많고 <茗禪>은 흑이 백보다 많다. 백이 흑보다 많으면 허성하기 쉽고, 흑이 백보다 많으면 답답하기 쉽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가득히 꽉 찬 느낌이고 후자는 어느 한곳 막힘이 없다.

▲< 김정희, 茗禪 (57.8 X 세로 115.2) >

이러한 黑白의 관계만으로도 서로 다른 의경을 연출한다. 공간은 이와 같이 白으로서 특별한 역할이 있다. 이것은 마치 노자에서 말하는 無와 흡사 하다. 無 有와 黑 白에 대하여 정리한 필자의 메모가 있어 대략 소개 한다.

無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것, 미처 인식하지 못한 것, 有가 아닌 것이다. 無와 有 둘을 합한 완전체를 玄이라 한다.. 즉 다 알 수 없는 현묘(玄)한 것이다.

有(사물의 외형)만을 보고 그 대상의 전체를 다 알 수 없다. 그곳에는 보이지 않는 무엇(無)이 있고 미처 알지 못하는 무엇(無)이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無)이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점(玄妙)을 알 수 있다.

서법에서 黑白은 有無와 통한다. 바로 필획은 黑으로서 有에 해당하고 필획과 필획사이 공간은 白으로서 無에 해당한다. 서법에서 필획만을 보면 有로서 형태를 보는 것에 한정 되지만 공간을 포함하여 白을 같이 보면 형태를 넘어 아득한 묘경(玄妙)을 이룰 수 있다. 평소 흑백에 관한 내 생각이 노자의 無有를 만나 설명이 한층 수월해 졌다고 생각한다.

서법에서는 포백(布白: 의미 있는 白을 구사함)이라 하였듯이 白의 역할을 크게 보고 있다. 그렇게 볼 때 노자에서 말한 무위(無爲)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無가 爲하는’ (무엇을 하는) 깊은 의미의 풀이는 설득력이 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사람을 만나는 일이고,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현실이 곧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글씨를 써 내려 간다는 것은 필획이 필획을 만나는 일이다. 만남에 소박한 관계를 맺어가려는 생각이 순간순간 밖으로 드러나는 그런 것 들을 서경(書境)에서 소중한 가치로 여긴다.

필자의 경우 서예 작품을 써 내려 가는 과정은 타자와 내가 만나 관계를 맺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미 쓴 문자는 ‘타자’로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반면에 지금 쓰고 있는 이 문자는 ‘나’로서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박덕준 作, 적벽부 (부분), 70 X 140

관계에 가장 좋은 자세는 이미 쓰여진 타자를 돋보이게 하는 관계로 나를 쓰는 것이다. 예컨대 타자가 부족하면 타자의 분위기와 같은 관계(상생)로 보완해주고 타자가 지나치면 상반되는 관계(상극)로 억제하여 상대를 살려나간다. 아래 작품에서 그런 관계로 진행된 사례를 볼 수 있다. 그중 특히 여(如)자는 총 5자가 보이는데 외형이 각각 다르게 쓰여 졌다. 그 이유는 如 앞에 쓴 글자를 돋보이게 관계하려는 생각에서 나타난 필연적 현상이다.

서예 작품을 써 나가는 것은 주변과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그 관계를 위하여 필획을 배치하고 공간을 만드는 과정이다. 심지어 서체를 변형 혼합하고 문자마저 변용하는 것도 바로 이런 관계라는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추사의 서법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작업 개념이다. 관계의 최고 형태가 주역(周易)이라고 한다. 고 신영복(申榮福) 선생의 글에 주역의 괘(卦)와 효(爻)를 해설한 글이 있다.

“관계가 판단과 해석의 기초가 되고 있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는 오히려 부차적일 정도로 매우 왜소하다. 개별적 존재의 의미와 역할은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망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되고 사후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 작품<端硏 竹爐 詩屋> 으로 돌아가서 여기에 나타난 2차적 표현을 읽어보자.

첫째, 공간이 필획보다 상대적으로 크다. 즉, 흑백 관계에서 白이 黑보다 많다. 그 결과 공간은 소략(疎略)하고 필획은 굳세다고 선인들은 표현해 왔다. 둘째, 대부분 직선인 데에 약간의 곡선이 만든 관계가 있다. 전통적 방식의 이 관계는 단순 소탈한 분위기가 있다. 셋째, 획의 두께가 일정하여 이 획이 만든 공간의 모양 또한 직선적이다. 평담함은 여기서 나온다. 넷째, 공간의 간격이 일정하게 규칙적인 점은 적막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섯째 결국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서체의 혼용이다. 서체를 변화한 것 또한 관계를 담기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내부공간이 확대되어 드러난다. 즉, 화면이 클로즈업되어 큰 종이(81×180) 전체를 가장자리 없이 기하학적으로 분할하는 효과가 연출되었다.

추사는 문징명(文徵明, 1470년~1559년)의 글씨를 평가하여 “서한시대 동용(銅筩)의 글씨처럼 수경소직(瘦勁疎直)하다”고 했다. 필획이 살집이 없이 마르면서도(瘦) 굳세고(勁) 짜임새는 긴밀함이 없이 성글며(疎) 곡선이나 강약 변화가 없는 직선(直)위주의 필획으로 이루어진 글씨 - 완당은 수경소직을 서한시대 고예(古隷)의 특징으로 평가하고 있다. 작품<端硏 竹爐 詩屋>은 바로 선생이 염두에 둔 서한시대 古隷(고예)의 書境을 구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서툰 후학은 더듬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