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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2008년 1인당 GDP가 3000 달러를 돌파했다. 5년 후 7000 달러, 다시 2년 후 8000 달러를 넘어섰다. ‘함정’의 한가운데 지점이다. 이 시점에서 성장률이 떨어지고 불균형은 깊어만 간다. 자원과 환경 문제까지 겹쳐 성장통(growing pain)을 단단히 앓고 있다. 이렇게 되자 중진국 함정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해외에선 물론이고 중국에서도 논란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진국 함정의 단골 사례는 중남미 국가들이다. 중국은 국가 경제규모가 이들을 넘어선지 오래다. 일본까지 추월했다.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까? 중남미와 일본 사례를 함께 참고해봄직하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에 거품이 터졌다.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자산 가격 폭락과 인구 고령화다. 발단은 1985년 플라자 합의다. 엔화 가치가 대폭 평가 절상됐다. 수출이 직격탄을 맞고 경제성장이 내려앉았다. 중앙은행의 처방은 통화 방출이었다. 고삐 풀린 돈은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갔다. 1980년대 후반 거품의 배경이다. 결과는 가계와 기업, 금융기관의 자산 폭락이었다.
거품 파열 후 일본은 또 ‘돈’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경쟁력 없는 기업과 은행을 파산시키지 않았다. 재정을 동원해 연명시켰다. 취업과 사회 안정 유지를 발등에 불로 여겼던 것이다. 그 결과는 정부 부채 급증과 장기 소비 침체로 나타났다.
2012년 말 출범한 아베 정부의 경제정책을 두고 말들이 많다. 비판적 목소리는 아베노믹스의 본질을 따진다. 구조조정보다는 여전히 돈 풀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아베노믹스의 ‘세 개의 화살’을 보자. 금융 완화, 재정 동원, 규제 완화는 모두가 돈 문제다. 규모가 커졌고 여러 정책을 동시에 쓴다는 점에서 달라지긴 했지만 결국은 또 돈이다.
보다 치명적인 문제는 고령화다. 나이가 들면 소득이 줄고 저축률이 낮아진다. 국가적으로는 투자가 부진해진다. 사회 혁신과 활력이 저하되면서 총요소 생산성(TFP)에 타격을 준다. 일본이 걸어온 길은 거품붕괴에 이은 고령화 충격이다. 20년 이상의 고통은 이 때문이다.
중남미 몰락의 원인은 사회계층간 유동성 저하와 포퓰리즘 만연에 있다. 열심히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돼야 사회가 발전한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이 나와야 한다. 중남미는 다른 길을 걸었다. 기득권층이 정부와 결탁했다. 청년층이 아무리 노력해도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상태로 고착화됐다. 중남미 국가 상당수는 다당제 민주국가들이다. 이들은 선거에 이기려고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다. 이를 지키려다 공공부문에 빚이 늘어났다. 부채위기와 악성 인플레이션이 번갈아 나타났다. 중진국 함정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지금 중국을 보면 일본식 현상도 있고 중남미식 현상도 있다. 대도시 부동산 가격은 이미 천정부지다.
월급으로 집을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중소도시는 정반대 상황이다. 마구 지은 탓에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유령집’들이 즐비하다. 인구고령화 추세도 심각하다.
이대로 간다면 일본의 기록을 깨지 않을까 싶다. 일본은 부유해지고 나서 늙었다(先富後老). 중국은 부유해지기도 전에 늙어가는 경우다(未富先老). 1가구 2자녀 허용 등 인구를 늘리려는 대책을 내놓고 있다. 고령화 진입 속도를 늦출 수는 있을지언정 다시 젊은 국가로 되돌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부분 인구통계학자들의 견해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선 개천에서 용이 나오곤 했다. 안 먹고 안자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계층 사다리를 올라갔다. 유동성이 활발한 사회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그랬다. 신분 상승의 전형은 농촌 출신자들이다. 역경을 극복하고 대학에 진학한 후 대도시에서 안정된 직업을 가졌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이름을 떨치는 이들도 많았다. 2000년대 초중반 나는 상하이에서 중국기업 CEO들을 매달 한 명씩 인터뷰해서 글을 썼다. 그들 중 상당수는 ‘개천에서 용 난’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지금은 점점 옛날 이야기가 되고 있다. 농촌 출신자의 도시 대학진학 비율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명문대학이 아니면서도 학비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 신분 상승보다 빚을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도 들린다. 창업 열풍이 개천의 용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이런 문제들은 단순히 한두 가지 정책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제도개혁과 구조조정이 따라야 한다. 중국도 이를 잘 알고 있다. 몰라서 일을 그르치는 게 아니라 알아도 실행이 어렵다는 게 문제다. 시진핑(習近平)-리커창(李克强) 체제 등장 이후의 정책 기조는 강력한 구조조정이었다. 먼저 뺄셈(구조조정)을 하고 나중에 덧셈(경기진작)을 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경제성장률 급락과 국제환경 장기 악화에서 비롯됐다.
어느 샌가 뺄셈은 보이지 않고 덧셈이 커졌다. 대출을 늘리면서 좀비기업이 연명하고 공급과잉이 심화됐다. 성장을 지탱하려다보니 당장 재정투자를 확대하게 됐다. 소비 중심으로의 성장전략 전환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듯도 보인다. 이런 상황은 단기간에 개선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의 ‘신창타이’(新常態)엔 어쩌면 답답한 속내가 담긴지도 모른다.
국제사회의 관심은 중국이 중진국 함정에 빠질지 혹은 극복할 수 있을지에 쏠리고 있다.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의 관찰이 필요하다. 만약 중국이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설 때까지 큰 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봐야할까? 중진국 함정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5000 달러나 1만 달러는 단지 하나의 대략적인 수치에 불과하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다.
구조조정은 제대로 추진해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중진국 함정 극복 여부도 1인당 소득 금액을 가지고 따질 게 아니다. 구조조정의 성과를 척도로 삼아야 한다. 중진국 함정은 비록 오래 쌓인 결과라도 대개는 급성질환처럼 나타난다. 중국에서는 만성질환이 되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물론 개혁과 구조조정에 성공하면 ‘함정’을 뛰어넘을 것이다. 그래서 성급하게 판단할 사안이 아니다.
한국은 어떨까? 중진국 함정은 이미 벗어났다. 국제적으로 모범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선진국 문턱 함정’ 탈출이 과제다.
■박한진 코트라 타이베이무역관장
한국외대 중국정치경제학 석사를 거쳐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기업관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외대 중국외교통상학부 겸임교수,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방문학자, 일본 아시아경제연구소 객원연구원, KOTRA 중국사업단장을 지냈다. KOTRA 홍콩·상하이·베이징 무역관 근무에 이어 현재 타이베이무역관장으로 있으며 중화권 ‘양안삼지(兩岸三地, 중국·대만·홍콩)’ 모두에 정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