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필(細筆)로 쓴 작품 <두보 詩 入宅三首>,秋史에게서 배우다

▲(박덕준 작. 두보시 <입택삼수> 126 X 20 , 한지 세필)

붓으로 글씨를 쓴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화선지라는 종이에 큰 붓으로 쓰는 글씨를 연상한다. 그러나 추사(秋史)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작은 붓, 즉 세필로 옛날 책 크기의 한지(韓紙)에 글씨를 쓰던 시절이었다. 언제부턴가 이 세필은 사라지고 오직 큰 붓으로 화선지에 쓰는 큰 글씨만 남아있는 듯하다.

한지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그런 만큼 발묵(發墨)도 각각 다르다. 섬유질이 툭툭 불거진 두터운 종이는 가죽처럼 거칠고 투박하다. 반면 부드럽고 얇은 종이는 투명하기까지 하다. 필자는 이 한지 위에 맞닿는 붓의 느낌이 좋아 현재에도 한지에 글씨 쓰기를 시도하며 오랜 기간 공을 들여왔다.

화선지가 아닌 한지에 먹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화선지에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른 특별한 공력이 필요하다. 그 점을 익혀가는 과정에서 추사 선생의 필법을 발견했다. 또 그 필법이 한지에 글씨를 쓰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지에 세필 글씨도 추사 필법을 사용한다. 세필이라고 해서 가늘게만 쓰는 것이 아니라 확대해보면 큰 붓으로 쓴 것과 같은 필획의 맛이 있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붓을 운용하는 필법 때문이다. 이제 세필쓰기에서 추사선생의 필법과 필의(筆意)를 어떻게 배우고 그것을 작품에 어떻게 반영하는지 그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추사의 필의(筆意)를 찾는 과정
서예 작품을 할 때는 우선 쓰고자 하는 내용(文章)을 충분히 파악 하고, 이어서 쓰게 될 낱개의 문자(文字)를 검토한 후, 그 다음에 필묵(筆墨)을 사용하여 어떻게 쓸 것 인지를 숙고하는 세단계의 절차를 따르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 <입택삼수>는 내용파악과 문자검토의 과정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다만 구성과 필의에 있어서 이전과 다른 시도를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할 당시 필자는 추사의 세필작품 한 점에 깊이 몰두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작품에 있어서 구성과 필의에 관한 추사의 생각을 올곧게 따라가는 것이었다.

<學問之道>로 시작되는 추사의 이 작품은 평소 큰 붓으로도 써보기를 즐기는 필자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추사의 필획을 보면 자칫 뭉뚱그려지기 쉬운 행초서를 쓰면서도 해서처럼 또렷하고 강약이 분명하여 소밀(疎密)이 자연스럽다. 기세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가운데 울림은 느긋하면서도 편안하다. 서로 상반되는 느낌들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세필이면서도 맑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좌측은 추사의 작품이고 우측은 그 작품을 세필로 임서(臨書)한 필자의 작품이다. 이렇게 임서하여 얻은 필의를 필자가 실전에서 구현해보고자 한 첫 번째 작품이 두보의 시 <入宅三首>이다.

두보(杜甫)의 詩 <入宅三首>
작품을 쓰기 전, 내용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감정의 표현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이 시는 지난 봄 두보 시 강독시간에 만났다. 매주 토요일 있는 한문공부 모임은 이런 명시들을 꾸준히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의 배경은 두보의 말년이다. 두보는 청두(成都)의 초당(草堂) 시절 이후 또 한 번 마음 넉넉한 시절을 기주(夔州)에서 보내게 된다. 평생을 돌아볼 때 이만한 시절도 없었을 듯하다. <입택삼수>를 지을 당시인 767년(大曆二年) 봄은 아직 농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기주에서 삶이 막 시작되는 그런 시기이다.

두보는 765년 5월에 초당을 떠나 남하하여 6월에 투주(渝州)를 지나 충주(忠州) 용흥사(龍興寺)를 거쳐 9월에 운안(雲安)에 도착한다. 이듬해 766년 늦봄에 기주(夔州)로 옮기고 그곳에서 생활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산중의 객당에서 기거했는데 그해 가을에 의형제를 맺게 되는 백무림(柏茂琳)이 기주 도독으로 부임하여 두보는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다음해 767년 봄에 서각(西閣)에서 적갑(赤甲)으로 옮겼고 3월에 양서(瀼西) 초옥(草屋)으로 옮겼다. 그 후 장강 북쪽의 동둔(東屯)에서는 집이 있고 과수원이 40무(畝) 채소밭 몇 무, 또 약간의 논이 있었다.

말하자면 두보는 서각에서 적갑, 여기서 다시 양서, 동둔으로 한해에 4번이나 거주지를 옮기게 된다. 그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고 싶지 않았고, 여기에서 정착하고 싶었다. 이 집에 들어오면서 <入宅三首> 연작시 3수를 남긴다.

첫째 시는 이곳 동둔으로 옮긴 곳의 풍광을 읊었다. 쇠잔한 나이가 되어서 마침내 좋은 경계가 눈에 들어오는가 보다. 이곳에서 소박하게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엿보인다. 둘째 시는 집을 옮기고서 고향을 생각하는 심정을 노래하였다. 셋째 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에서 떠도는 삶을 한탄한다. 구당협의 급한 물살은 귀주까지 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여기서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싶어 한다.

이제 그 과정을 거친 후 완성된 작품을 보면서 여기에 사용된 문자변용과 구성의 필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鹽(소금 염)자를 작품에서와 같이 쓴 자형(字形)은 청대(淸代) 이전에 쓰던 일반적인 형태인데, 隷書(예서)를 근거로 한 자형이다. 물론 “두시언해” 본에도 이 형태로 쓰여 있다. ‘鹽’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자전에 실린 형태인데 篆書(전서)를 근거로 한 자형이다. 두시언해 본에 쓰인 문자에는 이와 같이 자전에 없는 문자가 흔히 보인다. 媿(부끄러워 할 괴)는 두시상주(杜詩詳注)에 愧(부끄러워 할 괴)로 쓰여 있고, 卷(말 권)자 또한 두시상주에는 捲(말 권)으로 쓰고 있다. 두시언해 본에 쓰인 문자는 두시상주와 다른 자형들이 종종 있다. 세필서예 작품<入宅三首>는 두시언해 본의 문자를 저본으로 하였다.

腹(배 복)은 두시언해 본에 쓰인 문자인데 두시상주에는 復으로 쓰였다. 函(함 함)자는 역시 두시언해 본에 쓰인 자형을 따랐다. 定자를 작품에서와 같이 쓰는 것은 청대 이전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상에서 각 한 편의 시에서 쓰인 문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다음은 구성과 필의를 살펴볼 차례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가 적용한 사항은 개별 글자의 형태가 아니라 전체적인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치중하였다는 점이다. 서예에서 감정의 표현이란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그 생각하는 분위기의 상태에 젖어들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강약의 정도와 공간의 운용을 통해 서로 간에 만들어 가는 관계 속에 드러난다. <학문지도>의 임서작품에서 느꼈던 그 맑고 깨끗한 느낌이 좋았고 그 생각에 집중하였다.

이 밖에도 두보시 <南隣(남린)등 二首>, 학서자들이 추사의 세필을 좀 더 쉽게 배울 수 있도록 추사가 쓴 글씨를 필자가 다시 쓴 작품<書示虎峰(서시호봉)>은 역시 <入宅三首>와 같은 필의를 살려 쓴 작품이 있다. 이들은 차후에 소개하기로 한다.

작품의 마무리
마무리를 위하여 관지를 쓴다. 두보의 시 <入宅三首>임을 밝히고 좌측 끝 부분과 우측 시작부의 지문에는 각각 이렇게 썼다. 송옥의 집이 두 곳에 있는데 하나는 귀주이고 또 하나는 형주이다. 삼근재에서 쓴다. 때는 병신년(2016) 모춘(暮春, 늦봄)이다. 대력(大曆) 2년(767년) 봄, ‘서각’에서 ‘적갑’으로 거처를 옮기고 이제 ‘양서’에 있다 대략 봉절현 북쪽으로 30리쯤이다.

이제 작품의 마지막 단계인 표구, 여기까지가 작품이다. 특히 한지의 표구방법은 화선지와 또 다른 점이 있다. 이 작품에서 체크할 사항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지의 질감이 살아있도록 배접을 하는 것이 관건이다. 상당기간 시행착오를 거쳐 찾아낸 방법을 최근에야 사용하고 있다. 또 하나는 작품 밖에 붙이는 천인데 이번에는 모시를 사용하도록 주문했다.

▲(삼근재 서가에 걸려 있는 작품 모습)

비가 오는 지난 토요일(7월23일) 삼근재(三勤齋)의 한문 공부모임에 참가하는 오래된 동학들 몇몇이 모였다. 마침 그때 표구가 끝난 작품을 찾아와 서가에 걸고는 찻잔을 들고 빙 둘러앉아 자연스럽게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창밖에 비 소리는 더 요란하고 커피 향과 문자향은 한결 어울리는 한 때였다.

▲항백 박덕준

항백 박덕준

서법가로서 현재 거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추사 김정희의 필묵법을 복원하여 계승 발전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한자의 축소 생략원리와 초서의 기원을 탐구하여 초서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2008년부터 2년마다 개인전을 열어 2014년에 제 4회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전라북도 세계서예비엔날레 본전시 초청(2007), 국제서법가협회전(2013 광주), 강암연묵회(2015 전주) 등 단체전에 참가하고 있다. 저서에, 추사의 필묵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필묵법 지침서로 정리한 “필묵법산고”(筆墨法散稿 2012 삼근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