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노엘 신부]장애인의 아버지, 한국인 되다

한국 속 글로벌리더를 만나다 - 지적 장애인 인권 향상에 평생 바친 ‘그룹 홈’ 창시자

편승민 기자입력 : 2016.09.06 15:37
편집자주더리더는 5월부터 한국에 정착, 혹은 귀화한 외국인들 중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취재하고자 한다. 한국의 세계화 안에서 그들의 역할을 조명하고, 인종을 떠나 하나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들어보고자 한다.

다섯 번째 글로벌 리더를 만나기 위해 전라도 광주의 엠마우스 복지관을 찾았다. 엠마우스 복지관은 지적 장애인이 지역사회 안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사회재활시설이다. 이 곳에서 장애인들의 아버지인 천노엘(본명 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의 폐허가 채 가시기도 전인 1957년, 봉사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면서 그와 한국의 인연은 시작됐다. 24년간 사목활동을 했던 천 신부는 봉사활동을 하던 중, 광주의 한 장애인 소녀의 죽음을 접하면서 지적 장애인을 위한 삶을 택하게 됐다.


천노엘 신부는 한국에 처음으로 ‘그룹 홈’ 제도를 도입한 창시자기도 하다. 그룹 홈은 사회적 약자의 자립과 재활을 도우면서 공동으로 생활하는 가정을 말한다. 그룹 홈은 공동으로 거주하면서 이들의 보호와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제도다. 그는 장애인도 우리 지역사회 내에서 함께 사는 ‘사람’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로 한국에 온지 59년이 된 천노엘 신부는 한국에 대한 특별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국적 취득에 관해 묻자 그는 기쁘다고 하면서도 “오로지 장애인들을 위한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한국 국적을 갖게 되면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기에 앞으로 지적 장애인을 위한 정책, 인권 향상을 위해 힘쓰는 정치인을 직접 뽑겠다는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봉사의 삶을 살겠다는 그의 말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온 지 59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면
▶나는 영국 옆 작은 섬인 아일랜드 사람이다. 아일랜드는 한국처럼 큰 나라가 아니다. 인구가 400만 정도밖에 안 된다. 내가 4~5살 무렵 엄마가 교회 회관에 데려갔는데, 그날 저녁 아프리카 나병 환자촌에서 선교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 동영상을 하나 보여줬다. 그때 내 나이 몇 살 안됐지만 지금 생각해도 큰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남을 위해서, 특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면서 삶을 봉사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늘 봉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우리 집은 천주교 가정이어서 집안에도 성직자들이 많이 있었고, 선교와 봉사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외방선교회에 입회를 했다. 외방선교회가 무엇인가 하면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외국에 사람을 파견하는 가톨릭선교회다. 당시 1957년의 한국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로 어렵고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1956년에 신품성사(로마 가톨릭의 일곱 성사 중 하나로 주교가 부제에게 사제로서의 신권(神權)을 주고 사목을 맡기는 의식)를 받고 1957년 한국으로 파견됐다. 그렇게 한국에 왔고 광주에서 그 후로 24년 간 사목활동을 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어땠나
▶정확히 1957년 12월 10일, 한국 인천항구에 상륙했다. 인천에 도착하기 전날 배의 선원이 한국은 지금 굉장히 추우니 옷을 많이 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인천 부두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까 짐 관리를 잘하라는 얘기를 했다. 같이 갔던 다른 신부님들과 그분 말만 듣고 옷을 엄청 껴 입고 갔는데 막상 도착하니 굉장히 따뜻한 봄 날씨 정도여서 땀을 많이 흘렸다. 그리고 부두에는 많은 한국인 노동자가 있었는데 한국말로 이야기를 해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한테 막걸리를 줘서 함께 마셨다. 날씨가 춥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고, 소매치기도 많다고 했는데 와보니 오히려 대접을 받았다. 단순한 경험담이지만 편견에 대해 일깨워 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목활동을 하다 장애인을 위한 특수사목의 길을 택했다. 장애인을 위한 삶을 선택한 계기가 있었나
▶광주시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1969년에 ‘무등갱생원’이란 곳을 갔다.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도 사회적 약자들을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고 격리해서 한꺼번에 모아놓은 시설이 많은데, 갱생원이 그런 곳이다. 600명 정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결핵환자, 알코올중독 환자들, 독거노인들, 고아들, 장애인들이 한 울타리 내에 수용됐다. 수돗물도 없어서 마당에 지하수 펌프를 놓고 마시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알고 나서 봉사단체를 조직해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그런데 그 수용자들 가운데서도 특히 지적장애인들은 다른 사회적 약자에 비해 자기 권익을 주장할 힘이 없는 사람들이란 것을 알았다. 노인분들은 “신부님! 다음에 소주 한 병 가지고 오세요. 담배 주세요” 이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적장애인들은 만나면 늘 “아이고 신부님,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이러면서 미소를 짓고 해서 정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사자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다. 19살의 지적장애인인 ‘여아’라는 아이가 갑자기 급성폐렴으로 입원을 했다는 것이다. 내가 도착해서 보니 여아는 임종 직전 상태였다. 그래서 그 손을 잡고 미사를 했는데, 여아는 그저 “감사합니다” 하면서 운명했다. 그런데 병원 측에서 자기들이 연고가 없는 여아의 장례비용 등의 책임을 맡을 테니 시신을 병원 연구실에 해부용으로 기증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거절했다. 여아가 우리 사회 안에서 19년을 살면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에서라도 인간다운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묘지에 여아를 묻어주고 장례식을 거행하고 무덤 비석에 이렇게 썼다. “사회를 용서해주시렵니까.”
그날 이후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이면 갱생원에 있던 지적장애인 친구들과 함께 같이 성묘를 가서 과일과 꽃도 놓고 직접 벌초도 했다. 그들을 보면서 꼭 특수사목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그룹 홈을 시작한 건가
▶그렇게 특수사목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이 1981년이었다. UN총회에서 장애인의 해로 선포했던 해다. 당시 특수사목을 하겠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였다. 그런데 마침 그 해가 나의 안식년이어서 다른 나라 사례들을 보기 위해 호주, 미국, 프랑스, 뉴질랜드, 독일, 영국, 캐나다 등 많은 나라를 방문했다. 그리고 장애인의 해이다 보니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도 많이 개최돼 다양하게 참석했다. 여러 나라를 다녀보면서 그들이 가진 공통점을 발견했다.
먼저 죄책감, 즉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인간다운 대우를 해주지 않고 있다’고 어느 나라든 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는 장애인들이 그들이 사는 지역사회 중심으로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대의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영국 경제학자인 슈마허가 말한 “Small is beautiful” 에서 착안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것은 큰 기업보다 작은 기업들을, 거시경제보다는 미시경제부터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복지도 작은 것부터 해야 한다.
한국에 들어와 광주 시내에 2층 집을 얻어 장애인 한 분과, 봉사자 한 분, 그리고 내가 함께 입주했다. 한국에서 나갈 땐 복지에 대해 17세기형 모델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들어올 땐 21세기 모델인 소그룹으로 들어온 것이다. 당시의 첫 번째 그룹 홈을 보면 장애인들이 지자체 내에서는 안 보였다. 왜 그랬냐 하면 그땐 지금처럼 사회복지사나 사회복지학과가 흔치 않았다. 이화대와 대구대에만 있었다. 그룹 홈을 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나한테 미쳤다고 했다. 이런 분들은 한국문화나 지역사회 안에 사는 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식이었지만 나는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런 그룹 홈 시설이 생겼다는 것이 소문이 나자 밤에 한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찾아와 “우리 집에 그런 아이가 있는데 현재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학교를 안 다녔는데 이제 다닐 수 있나?” 하고 물어왔다. 어떤 병원장이 와서 똑같이 물어보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조금씩 조금씩 사람이 늘어갔다. 이 곳에 입주할 때 꿈이 있었다. 지적 장애인들에게 교육과 훈련의 기회를 주면 그분들도 지역사회 안에서 우리처럼 인간답게 삶을 살게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부나 사회, 가정이 갖는 장애인에 대한 시각과 사고방식을 바꾸고 싶었다.

지적장애인들이 지역사회 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복지관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여기는 복지관이지만 엠마우스 복지법인 산하에는 아홉 개의 시설이 있다. 여기에는 엠마우스 어린이집, 장애인 거주시설인 엠마우스집도 있으며 일반고용이 어려운 장애인들에게 직업재활을 훈련할 수 있는 엠마우스 보호작업장도 있다. 공단 안에 있는 공장에서 화장지와 양초, 타월, 도자기 등을 만들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 보장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다.
그 동안에 정책이나 복지 면에서는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까지도 장애인 인권 쪽으로는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아직 그들에 대한 정말 인간다운 대우, 법적인 장치에 대해 정치인들은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른 나라 시내에 가보면 보통 변호사들이 자기 휠체어 타고 가방 들고 다니기도 하고 시내의 레스토랑이나 맥도날드 같은 곳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들이 일하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아직 부족하다. 한가지 예로 그룹 홈 친구들 중에 운동 잘하는 두 분이 있다. 그 분들이 배드민턴을 진짜 잘 쳐서 비장애인들과 함께 동아리도 하고 있다.
그런데 가까운 데에 배드민턴회가 있어 회원모집에 지원하기 위해 그룹 홈 담당 선생님이 전화했더니 장애인이라고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두 친구들이 거기 다니는 사람보다 더 잘 할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부터가 편견이다. 사람들이 남의 말 잘 안 듣고, 또 직접 체험을 안 하니까 가지는 생각들이다.
다행인건 최근 많은 학교들이 장애인 체험 교육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엠마우스 복지관에도 작업장에 일반학생들이 와서 장애인 휠체어 타보기나 시각장애인 체험도 하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체험부터가 시작이라고 본다.

올해 2월 대한민국 특별 공로를 인정받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는데 기분이 어땠나
▶그때 설 명절을 바로 앞두고 있었는데 너무 기뻤고 큰 선물이었다. 본국인 아일랜드에서는 24년밖에 안 살았고 한국에 훨씬 오래 살아서 그 동안 본국에 갈 때마다 조카들이나 친척들이 국적을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이제는 기쁘게도 양국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 동안 귀화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일랜드 국적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사랑하는데 어떻게 한 사람과 이별을 할 수가 있겠나(웃음).


김현웅 법무부 장관이 2월 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특별공로자 국적증서 수여식에서 신혜경 수녀(왼쪽), 아일랜드 국적의 오네일 패트릭 노엘 신부(한국명 천노엘)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법무부 제공)


지난 4월 국회의원 총선에서 59년 만에 첫 투표도 했다. 내년에는 두 번째 투표인 대통령 선거가 있다. 어떤 리더십을 가진 대통령이 한국을 이끌어 나가야 할까
▶먼저 정직해야 한다. 참된 리더라면 자기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으면서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돼야 한다. 즉, 대화하는 사람이다. 왜냐면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람으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통일 문제도 결국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다.

1957년에 한국땅을 밟고 그 동안 한국이 발전해 온 세월을 함께 보내며 지켜봤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는가
▶처음에 한국에 도착해서 광주에 내려올 때 트럭을 타고 왔다. 개발이 전혀 안 돼 있어서 비포장 도로를 타고 광주까지 13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에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 젊은이들이 그저 교회에 와서 바닥을 닦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엄청난 발전을 했다.
이런 눈부신 발전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현실이 있다. 요즘 ‘헬조선’ 이란 말이 있지 않나. 지금의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이 없고 살맛이 안 난다는 것이다. 지금은 명문대를 졸업해도 직장에 쉽게 못 들어간다. 한국 자살률도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다. 왜 그런가. 경쟁사회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넘버원, 금메달만 요구하는 문화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금메달을 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엄마들은 아이들 모두가 명문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
한국은 지금 빈부격차도 엄청나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토마 피게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세계적으로 수입이 경제성장률을 뛰어 넘었다고 말했다(Revenue > Growth). 돈 있는 사람들에게 자본이 쏠려 있다는 자본주의의 문제다. 이 와중에 노동력의 중심도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으로 인건비가 더 싼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필리핀이 한국보다 더 잘사는 나라였다. 1957년의 한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가집 대나무 울타리에는 ‘개조심’이라고 써있었고 집집마다 문을 다 열어놨었다. 있는 것이 별로 없어도 친절하고 관대한 문화가 있는 나라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다 경계하고 자기 것 지키기에 급급하다. 그게 다 스트레스다. 경제적으로는 발전했지만 문화는 오히려 각박해졌다.
한국이 자랑스러워 하는 현대, 삼성, 기아가 해외에 수출을 많이 한다. 나는 한국이 가진 과거의 아름다운 미풍도 수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명절에 성묘를 가서 벌초하는 것은 지켜야 할 문화다. 지금은 화장하는 문화가 널리 퍼지고 있는데 묘지엔 자주 오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대명절이면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런 미풍을 지키지 않는지 모르겠다. 제품만 수출할게 아니라 미풍도 수출하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지켜야 한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앞으로 한국의 대통령이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해서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북한에 가서 그룹 홈을 설립하고 싶다. 그것 때문에 내년 대통령 선거를 누구보다도 기다리고 있다. 좋은 인물이 되야 하는데 아직은 찾기가 어렵다.

천노엘(O’Neill Patrick Noel) 신부
–– 1932년 12월 19일 아일랜드 출생
––아일랜드 가벨리대학 졸업(1950)
––아일랜드 성 콜롬반 신학대 졸업(사제서품) (1956)
––전남대학교 대학원 심리학과 졸업(석사) (1988)
––전남 장성, 여수, 목포, 광주 성당 주임신부(1957~1985)
––한국 최초 지적장애인 소규모 가족형 거주시설 ‘그룹홈’ 창설(1981)
––엠마우스 복지관 설립(1987)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설립(1993)
––엠마우스복지관 관장(1987~1998)
––現 사회복지법인 무지개공동회 대표이사(1998~)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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