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P에 관한 복수의 시나리오

▲박한진 코트라 타이베이무역관장

미래는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개다. 미래예측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변수와의 싸움이다. 낫 놓고 기역자 보듯 하면 미래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눈감고 멀리 크게 봐야 잘 보인다.

미래예측은 무심코 ‘툭 던지는 말’이 아니다 ‘나 한마디 너 한마디’식 설전은 더욱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과거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미지의 미래를 발굴하는 일이다.

지금 국제통상 분야의 가장 큰 이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향방이다. 통상분야 미래예측에 단골로 쓰이는 건 연산가능일반균형(CGE, Computable General Equilibrium)모형이다. 개방에 따라 생기는 새로운 균형을 추적하고 이 균형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추계하는 계량예측기법이다.

CGE 모형 연구는 결과가 깔끔하게 나온다. 대개 이런 식이다. “한국이 참여하는 TPP가 발효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몇 % 증가한다.” “생산성 향상과 자본축적 효과까지 포함하면 GDP는 몇 % 추가 증가한다.” 이런 예측은 공무원들이 특히 좋아한다. 그들은 용역연구를 하는 국책연구소에 결과를 빨라 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일반인들은 CGE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놀라운 결과에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한다.

중요한건 이 모형이 효용성 못지않게 결함도 많다는 것이다. 변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가 될 수 있다. 동일 변수를 채택해도 연구대상 기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지난해 중국 인민은행의 이코노미스트가 “TPP에 한국과 중국까지 포함될 경우 한국은 GDP가 2.2% 늘어나며 최대 수혜국이 될 것”이라는 산업연관 및 CGE 모형 분석 보고서를 내놓은 적이 있다. 손에 잡히는 수치로 나와서 우리 언론에도 이른바 ‘야마’ 있는 기사로 크게 보도됐다.

하지만 만약 열 명의 연구자가 CGE 모형을 돌린다면 열 개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심지어 필자 혼자서도 열 개의 서로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 뻥튀기기도 가능하고 정반대로도 만들 수 있다. 그러다보면 연구자들끼리 서로 자신의 연구결과가 옳다며 다투기도 한다.

양자·다자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제적 효과 연구에 CGE 모형 분석이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날 FTA는 더 이상 경제영역만의 도구가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이며 정치와 경제, 사회영역이 섞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CGE 모형 분석 외에도 다양하고 복합적인 연구와 예측이 필요하다.

한·미 FTA, 한·EU FTA, 한·중 FTA를 아울러 우리가 그동안 CGE 모형 분석에만 몰두한 건 아닌지 돌이켜볼 일이다. 한국은 TPP와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이라는 메가 FTA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 이제 CGE 모형 연구는 과거의 절반 정도로만 했으면 한다. 특히 미국 대선 레이스 과정에서 양상이 달라져버린 TPP에 대해선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측과 대비가 필요하다.

미래예측은 우선 팩트(facts)에 기초해야 한다. TPP에서 팩트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혹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트 가운데 누가 대통령이 돼도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TPP로 가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두 사람 모두 현재의 TPP 그림에 반대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다. 복수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첫 번째 시나리오는 ‘투량환주(偸梁換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바꾼다” “겉은 그대로 두고 내용이나 본질을 바꾼다”는 뜻이다. 힐러리가 남편 빌 클린턴이 20여 년 전에 했던 방식을 모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빌은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극구 반대했으나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한 후 NAFTA를 전격 통과시켰다.

힐러리도 올 연말 선거 전까지는 표를 의식해 TPP에 반대하다가 당선이 된다면 입장을 바꿔 TPP를 통과시킬 수도 있다. TPP는 지난 8년 간 미국 행정부가 추진해온 최대의 자유무역 이니셔티브다. 게다가 힐러리 자신이 국무장관 시절 거의 전도사가 되다시피 옹호했던 것이 바로 TPP다.

여기서 두 가지 방향의 가능성이 있다. 당선 후 취임 전 오바마 현 대통령이 전격 통과시키는 경우와 힐러리 자신이 내년에 취임한 후 통과시키는 경우다. 만약 이런 시나리오가 작동한다면 힐러리로서는 전자의 경우가 부담이 적다. 임기 마지막 해인 오바마가 레임덕 없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힐러리가 실제로 태도를 바꿔 TPP를 폐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문제는 매우 복잡해진다. 미국 주도의 TPP에 대항해 중국은 야심차게 RCEP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이 TPP를 내려놓는다면 아시아는 물론 세계 많은 국가들이 적어도 경제적으로 급속히 중국 편향으로 갈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아시아 중시 정책(Pivot to Asia)에 정면 배치될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연합 간에 추진 중인 범대서양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Transatlantic Trade and Investment Partnership)에도 결정적인 타격을 줄 것이다.

현실적으로 민주당 정부 하에서 TPP는 변형될 수는 있지만 폐기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변형이라는 것은 미국이 자국 이익 확보에 방점을 찍고 참여국에 대해 보다 큰 폭의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화당 정부가 들어설 경우에도 지금 선거 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TPP가 철저하게 무시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 경우에도 미국은 자국 이익에 더 치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할 일은 큰 방향이 정해진다. CGE 모형 분석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미국 내 정세와 국제정치 분야의 동향을 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게 해야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그 다음 할 일은 어떻게 하면 많은 기업 특히 중소기업들이 TPP를 보다 쉽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 방안을 내놓는 것이다. “TPP에 가입하면 우리나라 GDP가 몇 % 늘어날 것”이라는 식의 예측은 이제 좀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