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권익백서]‘공무원은 현장 속으로!’를 외치는 이유

김태응 국민권익위원회 권익개선정책국장

“엄마! 시청에서 노인일자리 신청하고 오셨어요?”(딸)
“그래, 청소나 급식도우미 하고 싶다고 했는데, 신청서에 최종학력도 쓰고 이름도 본인이 직접 쓰라고 하더라.”(어머니)
“엄마! 청소나 급식도우미 하는데 최종학력이 왜 필요하데요?”(딸)
“그건 안 물어 봤어, 일자리 생기면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어머니)

얼마 전 동료직원이 고향주민이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일화다. 청소도우미나 급식도우미를 뽑는데 최종학력을 왜 확인해야 할까. 노인일자리 신청서를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쓰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자필서명을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정부가 제공하는 노인일자리 대부분은 최종학력 확인이 의미가 없다. 무학이나 문맹의 노인들에게 자필로 일자리 신청서에 서명하라고 하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날뿐더러 자칫 노인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행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일선 담당자들의 변명은 허탈하게 만든다. 정부가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정책을 만든다하더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행정은 그 의미를 바래게 하고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 얘기는 중국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고사를 연상시킨다. 옛날 중국 춘추시대 때 정(鄭) 나라에 신발을 사려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시장에 신발을 사러 가기 위하여 자신의 발의 크기를 본으로 떴다.(한자로 이것을 ‘탁(度)’이라 한다.) 이 사람은 시장에 와서 탁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집으로 되돌아가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다. 하지만 이미 장은 파해 신발을 살 수 없었다. 주변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직접 신어보면 될 것을 어째 신어보지 않았소?” 이에 정나라 사람은 대답했다. “아무려면 발이 탁만큼 정확하겠소?“

우리 공직사회도 혹시 제도라는 ‘탁(度)’ 속에 갇혀 국민의 불편이나 고충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사회가 복잡다기하게 변화하고 국민의 요구가 다양해지면서 제도를 개선해야 할 이유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개선이 필요한 제도가 제때 개선되지 못하면 그만큼 국민에게 부담과 고충이 되기 때문에 제도개선은 선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개선에는 실제 적용되는 현장에 들어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이를 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민원 등 국민이 제기한 문제를 토대로 현장에서 답을 찾는 기존 접근방법에서 더 나아가 잠재적 국민불편 사항을 발굴하기 위해 현장에 나가 직접 문제를 찾는 새로운 접근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일례로 옥외광고물(간판) 설치허가를 받은 후에는 3년마다 연장신고를 해야 하는데 신고하지 않은 불법간판이 늘고 있다는 일선공무원들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하지만 현장을 찾아본 결과 간판의 변경사항이 없는데도 3년마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연장신고를 해야 하는 ‘제도’는 소상공인들에겐 ‘고충’이었다.

이외에도 관련부서·기관 간 자료가 공유되지 않아 석유판매업자, 건설기계수출업자 등이 두 번 관청을 방문하여 신고해야 하는 불편, 건설기계 매매업자에게 차량 이전등록 시 유사한 내용의 자료를 중복하여 요구하는 경우, 저공해자동차의 등록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 혜택이 달라져 형평성 문제가 제기된 경우, 불필요한 절차 등으로 민원처리가 지연되는 경우 등 현실과 동떨어져 운영되고 있는 20여건의 제도개선과제를 발굴하여 관계부처에 권고한 바 있다.

이처럼 현장에는 우리가 책상 앞에서는 알 수 없는 ‘국민의 소리’가 넘친다. 작은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소소한 요구들부터 오래된 제도적 관행으로 체념해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큰 고충들까지 존재한다.

국민의 고충을 살펴 좋은 정책과 제도로 이를 해소시켜 주는 것은 정부와 공직사회가 해야 할 본분이다. 여기에 다양한 국민의 소리를 들어 제도를 현실에 맞게 운영하려는 공직사회의 노력이 있어야 국민이 감동한다. 우리 공무원들이 열일 제쳐두고 현장을 찾아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