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대무신(大武神)은 싸움을 잘해 얻는 왕호일까?
만화로 시작해, 게임과 드라마까지 확장된 김진 작가의 <바람의 나라> 주인공 무휼왕자는 고구려 3대 대무신왕(재위: 18~44)이 되는 인물이다. 유리명왕의 3남으로 태어난 무휼은 임금이 되어서 여러 업적을 쌓았는데, 그 업적을 토대로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준 왕의 호칭이 대무신이다.

역대 임금들 가운데 대무신왕만큼 엄청난 호칭을 가진 인물은 찾기 어렵다. 도대체 그는 얼마나 싸움을 잘한 임금이었을까? 414년 고구려인들이 만든 ‘광개토태왕릉비문’에도 대무신왕은 1대 추모왕과 유리명왕의 업적을 이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진 왕(紹承基業)으로 기록되어 있다. 엄청난 기대를 갖고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그는 부여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한 임금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대무신이란 칭호를 받았을까?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부심이 강하며 담력이 큰 인물이었다. <삼국사기>는 그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유리명왕 28년(서기 9년) 당시 강대국인 부여에서 사신을 보내와 고구려에게 신하의 예의를 갖추라는 협박을 해왔다. 14년 전에도 고구려 태자를 인질로 보내라고 압력을 가해왔던 부여였던 만큼, 유리명왕은 신하들과 상의하여 부여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회답을 하려고 했다. 그때 어린 무휼이 조정에 나아가 부여 사신을 만나 당당하게 말했다.

“부여가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다. 두 나라의 평화관계를 허물지 않는다면 부여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어라”

그러자 4년 후 부여가 대군을 보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유리명왕은 무휼을 시켜 군대를 통솔하여 막게 했다. 무휼은 적은 병사로 대군을 대적하기 위해 학반령 골짜기에 매복하며 적을 기다렸다. 적이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어있던 병사들을 출동시켜 기습을 하니 부여군이 크게 패해 말을 버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무휼은 병사를 풀어 그들을 모두 죽이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태자가 되어 군사와 국정의 일을 맡았다.

이처럼 <삼국사기>는 무휼이 왕자 시절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충실히 왕이 될 자질을 닦은 준비된 임금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부여와의 악연을 가졌던 그는 왕위에 오르자 부여를 공격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거듭했다.

부여 원정에 실패한 대무신왕
서기 21년 12월, 그는 부여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했다. <삼국사기>는 이때의 부여 정벌을 신화적인 이야기를 섞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가는 도중 비류수 주변에서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져 밥을 지을 수 있어서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신기한 솥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대무신왕을 그를 부정 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백성들의 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택한 동계 작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따뜻하게 식사하기 위한 땔감을 구하는 일이었다. 적군이 근처에 있는 경우 불을 지펴 밥을 하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큰 위험에 빠진다. 그렇다고 겨울철에 날 음식만을 먹으며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대무신왕이 부정 씨를 만났다는 것은 이런 어려움을 해결해줄 지원세력을 얻었다는 것을 뜻한다.

대무신왕은 키가 9척이나 되고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나는 괴유라는 인물도 만났다. 또 긴 창을 갖고서 스스로 길 안내를 맡겠다는 마로도 만났다. 괴유와 마로 등을 포섭한 대무신왕은 분명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지만 용기가 과했던 대무신왕은 부여 정벌에서 지나친 자신감을 보였다. 오랜 행군 끝에 부여국 남쪽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았는데, 대무신왕은 평지를 선택해 병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지친 병사들을 쉬게 했다. 대무신왕은 부여군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방심하고 경계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주 일대 최강국인 부여는 결코 얕잡아 볼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군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고 있던 부여에서는 기병대를 주축으로 쉬고 있던 고구려군을 기습 공격해왔다.

돌연 나타난 부여군의 기습에 고구려군은 크게 당황했다. 물론 부여의 군대도 너무 급하게 공격하느라 진창에 빠져 앞뒤로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했다. 그러자 고구려군도 반격에 나섰다. 그때 괴유가 부여의 대소왕을 발견하고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나갔다. 괴유는 곧바로 달려가 부여 대소왕의 목을 베어 버렸다.

왕이 죽으면 기세가 꺾이기 마련이지만, 부여는 달랐다. 여전히 고구려군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위협을 가해왔다. 포위된 고구려군은 군량이 다해 군사들이 굶주려 싸울 힘을 잃어갔다. 대무신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어 하늘에 영험이 있기를 빌었다. 다행히도 갑자기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바로 앞에서도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무신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게 했다. 허수아비에게 무기를 들려 군영 안팎에 세워놓아 병사로 위장한 후 은밀하게 행군하여 밤에 몰래 탈출했다.

전쟁에 패했지만 신뢰를 얻는 대무신왕
비록 부여왕을 죽였지만, 고구려군은 엄청난 무기와 재물 등을 잃고 인명 피해도 많았다. 분명 고구려군의 패배였다. 다음해 2월 처참한 패배 끝에 돌아온 대무신왕은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못나서 부여를 얕잡아 보고 섣불리 공격하여 비록 그 왕을 죽였지만,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우리의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대무신왕은 곧이어 전사자를 직접 조문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했다. 왕이 이렇게 진솔하게 반성하자 고구려 사람들은 대무신왕을 중심으로 다시 뭉치기로 결의했다. <삼국사기>는 대무신왕의 행동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임금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하여 모두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약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는 여러 부족이 연합한 부족 연맹체의 나라였다. 패전한 책임을 물어 연맹체의 대표를 교체해도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패전한 고구려에서 내분까지 생긴다면 부여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줄 수 있었다. 부여의 침략 위협 앞에서 고구려인들이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왕이 다른 이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묻고 책임을 회피한다면 고구려는 분열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한 덕분에 대무신왕은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부여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오히려 내부의 신뢰를 얻어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었다. 모든 전쟁에서 매번 승리를 거두는 자는 거의 없다. 진정한 대무신은 패배 이후의 상황을 잘 극복하여 다음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자다.

전쟁에서 패배한 고구려가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 사이, 고구려군을 물리친 부여는 도리어 어려움에 빠졌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대소왕이 죽고, 눈앞에 적군이 사라지자 내부에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전쟁의 승리가 도리어 화를 부른 셈이었다. 대소왕이 죽은 지 두 달도 못돼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 자신의 무리 백여 명을 이끌고 부여를 탈출해 갈사국을 세웠다. 또 3개월 후인 그해 7월에는 부여왕의 사촌동생이 무리 1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로 투항해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무신왕은 그를 낙씨왕에 봉하였고, 그 무리들을 받아들였다. 낙씨왕이 고구려에 항복해왔다는 사실은 주변 소국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강대국 부여는 점점 내분으로 약화된 반면, 고구려가 새롭게 강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솔선수범하며 신하들을 믿어준 대무신왕
대무신왕은 직접 개마국을 정벌하여 그 왕을 죽였지만, 그곳 백성들을 위로하고 자기 군사들에게 노략질하지 않게 했다. 그리고 개마국 땅은 고구려의 군현으로 삼아버렸다. 그러자 개마국과 이웃한 구다국의 왕이 스스로 항복했다. 대무신왕은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전쟁에 나섰고, 적들을 포용함으로써 나라의 영토를 키웠다.

대무신왕은 자신이 직접 행동하기도 하지만, 아랫사람을 신뢰하여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능력을 믿어주었다. 부여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괴유가 병들어 죽게 되자 직접 문병을 하며 부하들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서기 28년 후한의 요동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왔을 때, 우보 을두지의 주장을 받아들여 농성 작전을 통해 물리쳤다. 비류부의 구도, 일구, 분구 3명의 신하들이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리자, 추발소라는 인물을 보내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도록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대무신왕은 또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연이 있는 낙랑국을 멸망시키는데도 성공하여, 건국 초기 고구려를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임금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업적만으로는 왕호인 대무신처럼 그가 엄청난 전쟁의 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가 엄청난 칭송을 받은 이유는 반드시 전투에서 이겨서가 아니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백성들로부터 신뢰를 얻은 임금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의 미래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부하들에게 용서를 직접 구한 임금이었다. 전쟁에서 패전한 임금들은 많다. 하지만 패전 후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고백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다시금 묻는 지도자는 그리 많지 않다. 높은 지위에 오른 리더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신뢰를 버리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1592년 4월 30일 새벽, 조선의 14대 선조 임금은 백성들이 잠자는 사이에 몰래 도성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쳤다.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울 생각보다 자신의 안전을 먼저 생각한 임금이었다. 그는 다음날에는 심지어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겠다는 뜻을 신하들 앞에서 밝히기도 했었다. 그는 백성들을 믿지 않았고, 도리어 상국이었던 명나라를 믿었다. 1599년 2월 2일 조선에 출병했던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게 되자,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明(명)군이 머무른다면 인심이 의지할 데가 있겠지만, 이제 만약 철수하여 돌아가면 호남과 영남의 인심은 필시 모두 불안해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 明 장수가 돌아간 뒤에 혹시 대중을 불러 모아 거사하는 무리가 있다면 현재의 군사와 무기로 방어할 수 있겠는가? 백성의 원망이 이미 극에 이르렀으니 어찌 모두가 선량한 백성이겠는가? 나라 밖의 적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안에서 일어날 화가 염려스럽다”

백성을 믿지 못하는 지도자가 임금이었던 나라 조선. 선조가 이 말을 한 지 38년 만인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인조 임금은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에게 항복하여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청나라 군대는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군은 불과 7일 만인 12월 15일 인조가 도망간 남한산성까지 달려와 성을 포위했다. 조선이 믿었던 명나라의 원군도 없고, 백성들의 적극적인 의병 활동도 없는 탓에 인조는 45일간 성에서 외롭게 버티다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삼전도의 굴욕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의 필연적인 운명이기 때문이다. 반면 똑같은 패전을 당했지만 고구려의 경우는 달랐다. 대무신왕이 앞장서서 신뢰 회복에 노력한 결과, 고구려는 다시금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이웃의 숱한 적들과 싸워야 하는 가혹한 환경에서 성장한 나라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서로를 믿어야 했다. 서로 간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700년 넘게 생존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

리더십의 기준 신뢰
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2017년 5월 출범한 신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는 규범만큼 강한 규제력은 없지만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상대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위는 스스로 억제하게 된다.

신뢰의 리더십은 조직 구성원들의 기대를 벗어나는 행동을 억제하고,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거짓말과 핑계, 무책임한 지도자는 신뢰의 리더십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런 지도자의 미래는 없고, 그런 지도자를 가진 집단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정 구성원들을 위한 행동부터 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신뢰의 리더십을 가진 리더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을 저술하여 고구려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보여준 생활사 연구로,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를 화두로 삼아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 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고구려, 수, 당, 북방제국의 대립관계’ 등의 논문과 <고구려의 발견>,<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조선이 가지 않은 길>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