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의 새 지평을 연 북방정책의 비사

임윤희 기자입력 : 2017.07.06 16:18
▲염돈재 교수
북방정책은 우리 외교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정책이다. 냉전의 틀에 갇혀 서방진영만을 대상으로 했던 우리 외교는 ‘반쪽외교’를 극복하고 전방위 외교를 추진하게 됐고 17억의 인구를 가진 45개국과 국교를 맺어 우리 외교의 지평을 전 세계로 확대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북방정책 담당 비서관으로 근무하면서 북방정책의 입안과 비밀교섭 시 핵심 실무역할을 한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전 국정원 1차장)를 만나 북방정책의 뒷 얘기를 들어본다. 
북방정책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게 됐는가
▶“어느 정부든 재임 중 새로운 정책으로 ‘역사적 업적’을 거두기를 원한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소련,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반드시 필요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등장 이후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고 미·소간에 데탕트 체제가 지속돼 여건도 대폭 좋아졌다.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 국민의 ‘민족자존 의식’이 한껏 높아져 이념의 틀에 갇힌 ‘반쪽 외교’ 극복 열망도 컸다. 기회를 잘 포착하면 역사의 승자가 된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자료를 보면 우리 정부 당국자가 북방정책 추진의사를 밝힌 것은 이범석 외무부 장관이 1983년 6월 29일 국방대에서 ‘선진조국 창조를 위한 외교과제’ 라는 제목의 연설을 한 것이 처음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그 후 아무 진전이 없다가 노태우 정부 들어와 북방정책이 부각됐다. 그 이유는
▶“세상에는 사실이 아닌 것이 정설로 굳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 전날 이범석 장관의 연설문이 언론사에 배포됐으나 이 장관은 그날 그 연설을 하지 않았다. 실무자가 작성한 연설문을 보지 못한 이 장관이 아침신문에 보도된 자신의 국방대 연설기사를 보고 연설문 취소를 지시하고 국방대에 가서는 다른 내용의 강연을 했기 때문이다. 이 장관은 정책방향은 맞지만 당시는 여건도 안 돼 있는 데다 미국과의 협의도 거쳐야 할 문제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면 그 후 북방정책은 전혀 추진되지 못하다가 노태우 정부에 들어와서 갑자기 추진하게 됐다는 얘긴가
“아니다. 북방정책이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 정부의 공산권과의 관계개선 노력은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지속됐다. 서독의 ‘동방정책’이 큰 자극이 됐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한 1988년은 아직도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인데 북방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가
▶“개혁·개방을 표방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과 미소간의 데탕트로 여건이 많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성공을 확신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발전과정을 보면 성공확신 보다는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가 더 큰 동인이 됐다. 북방정책도 노태우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전방위 외교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이룬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태우 정부의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선언)’을 보면 북한을 경쟁과 적대의 대상이 아닌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겠다는 것과 타의에 의해 빚어진 민족분단을 우리의 주도적 노력으로 극복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너무 이상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동서독 관계도 정상화됐고 미·소간에 데탕트 분위기도 확산돼 북방정책 여건이 대폭 호전되기는 했지만, 7·7선언에서 이상주의적 색채가 매우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책은 항상 공식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선언적 내용보다는 정책 입안자가 얼마나 정확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중심을 잡아가면서 정책을 추진하느냐에 따라 정책의 성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북방정책에 대해서는 미국의 견제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 간에 친소감정이 고조되고 반미감정이 높아진 것과 맞물려 미국정부가 북방정책의 속도와 전략물자와 기술이전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했던 것도 사실이다. 헝가리와의 수교합의 사실을 늦게 통보해 준데 대한 불만표시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에 적극 협조하는 등 전체적으로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미 측이 우리 지도자들의 이념이나 성향에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처음으로 수교한 공산국가가 헝가리였고 이를 계기로 북방정책이 급진전을 이루었다. 헝가리와 제일 먼저 수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헝가리가 동유럽권에서 가장 개혁적이어서 가장 가능성이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우 김우중 회장이 헝가리 측의 의사를 타진하고 다리를 놓은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가까운 중국을 놔두고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먼저 추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보다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이 쉬울 것으로 봤다. 소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저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에는 “이데올르기의 차이가 국가관계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되고 대외정책이 이에 종속되어서도 안 된다”고 돼 있다. 그 반면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고 있어 우리와의 수교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소련과의 수교 2년 후인 1992년 중국과도 수교하게 됐다. 중국이 여전히 ‘하나의 중국’ 정책을 고수했는데 그건 어떻게 가능했는가
▶“문제는 중국의 전략가들이 풀어갔다. 중국은 북한에게 더 이상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기 어렵다고 통보해 김일성은 1991년 9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수락하게 됐다. 그러자 중국은 자기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외국의 대만과의 수교를 반대하지만 북한은 ‘두 개의 한국’을 인정했으므로 한국과 수교가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 배경에는 등소평의 한국과의 경제협력 의지가 강하게 작용했다. 특히 등소평은 포항제철을 몹시 부러워해 경험과 기술 전수를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방정책 추진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공산국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이었다. 일반동향이나 정책은 비교적 잘 알고 있었지만 내부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일반인의 공산권 접촉이 금지돼 학계에도 전문가가 없었다. 따라서 하나하나 접촉을 해 가면서 정보를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 내부사정에 대해서는 재미교포 하만경 박사와 고려인 2세로 소련 동양학연구소 수석 부소장이었던 게오르기 김 박사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북방정책에 대해서는 졸속외교, 용공외교, 밀실외교라는 반대도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때 사정이 어땠나

▶“소련과 접촉해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지, 반공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등에 대해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다. 정부 내에서는 특히 강영훈 총리와 노재봉 대통령 정치특보 같은 분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1988년 말 경 강영훈 총리께서 전 국무위원과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총리공관에 소집해 밤늦게까지 난상토론을 벌인 적도 있다. 또 경제기획원이 정부 국장급 실무자와 학계인사들을 초청한 만찬회의를 열어 청와대를 강력히 비판한 적도 있다.”

북방정책 추진 4년 후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권이 무너져 북방정책 없이도 이들 나라와 수교가 가능했을 것 같다. 더욱이 조급한 성과달성에 급급해 대규모 경제협력을 약속한데 대해서도 비판이 많다
▶“맞다. 수교라는 측면만 보면 4-5년 후에는 똑 같은 결과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수동적 배우가 되는 것과 우리의 주도적 노력으로 신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북방정책은 국제무대에서 수동적이었던 우리가 한국외교의 새로운 역사를 쓴 것이다. 헝가리와의 수교시 무상지원은 연수생 교육 등 2천만 달러에 불과하고 소련에 제공한 경협차관도 무기 등으로 돌려받았다. 중국은 이제 우리의 최대 무역파트너가 됐다. 북방정책은 우리 국민의 진취성과 역동성을 세계에 보여준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시대를 앞서가는 파이오니어들은 항상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기 쉽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햇볕정책을 계승해 달빛정책(Moon Light)을 추진하려는 것도 그런 파이오니어적 조치라고 볼 수 있는 있는데

▶“시대를 앞서가는 파이오니어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 간의 관계는 아직도 현실주의가 지배하고 있어 이상주의적 정책이 실현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미 햇볕정책의 경험을 갖고 있다. 더욱이 김정은 정권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이고 억압적인 정권이고 우리는 지금 북한의 핵 위협 하에 놓여있다. 지금은 엄격한 현실주의의 바탕 위에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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