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정책의 첫 결실, 헝가리와의 수교 협상 비사

염돈재 교수의 외교 이야기②

임윤희 기자입력 : 2017.08.07 10:49

▲염돈재 교수
헝가리와의 수교는 우리 외교사에 큰 획을 긋는 대사건이다. 공산국가와 수교한 첫 사례이고, 민족 자존 외교의 첫 결실이고 서울 올림픽 열기를 더욱 뜨겁게 달군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특히 헝가리와의 수교는 누구의 도움이나 간섭도 받지 않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당시 청와대 북방 정책 담당 비서관으로 수교 교섭에 직접 참여한 염돈재 교수를 만나 뒷얘기를 들어본다.

헝가리를 첫 교섭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는
▶“헝가리는 동유럽 국가 중 가장 개혁 성향이 강한데다 양국 간에는 이미 무역사무소가 설치돼 있었고, 동유럽 국가로는 처음으로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해 일찍부터 첫 목표로 점찍어 놓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헝가리와 비즈니스를 하던 대우 김우중 회장이 30억 달러의 경제 지원을 하면 수교가 가능할 것 같다고 알려와 1988년 7월 박철언 정책보좌관을 단장으로 수교 교섭단을 파견하게 됐다.”

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이 대표 단장을 맡게 됐나
▶“북방 정책 의지가 강했던 노태우 대통령이 대북·통일 정책과 북방 정책 임무를 최측근인 박철언 보좌관에게 맡겼으나 박 보좌관은 대북 협상, 5공 청산, 정계 개편 등으로 바빠 협상대표로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헝가리와의 수교 협상은 성공 가능성이 적고, 경협부담이 걸려 있어 각 부처가 협상 대표 맡기를 꺼렸다.
게다가 외교부 차관은 헝가리가 거부할 가능성이 있고, 경제부처가 맡으면 회담이 경협 중심이 될 가능성이 많아 내가 신동원 외무차관께 말씀드렸고, 신 차관이 강력히 주장해 박 보좌관이 맡게 됐다.”

협상은 잘 진행됐는가
▶“헝가리에서의 1차 협상이 특히 어려웠다. 헝가리 협상단장인 마르요 부수상이 경협 규모 15억 달러를 고집해 협상이 여러 차례 중단됐고, 우리 대표단은 짐을 꾸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결국 박 단장이 마지막으로 노태우 대통령의 메시지와 선물 전달을 구실로 그로스 서기장 면담을 강력히 요구, 그로스 서기장과 직접 담판했다. 이를 계기로 서울에서의 2차 협상이 열렸고, 그 후 헝가리에서의 3차 협상에서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주요 쟁점은 무엇이었나
▶“경제 협력 규모, 관계 개선 속도 및 발표 시기 등 세 가지 쟁점이었다. 당시는 헝가리 정세가 매우 유동적이어서 대규모 경제 협력은 큰 모험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경협 규모를 12억 달러로 승인했으나 박 보좌관은 잘못하면 국가에 큰 부담을 주고 북방 정책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생각, 경협 규모 조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2차 협상에서 6억 5,000만 달러로 합의됐다. 이 협상에서도 우리 협상 대표 한 사람이 격앙돼 퇴장해 버리고, 새벽 1시에 대우 최계룡 부사장이 와서 헝가리 대표를 설득하는 등 난항이 계속됐다.”

다른 쟁점들은 어떻게 해결됐는가
▶“헝가리 측은 북한 입장을 고려해 가급적 수교 일정과 발표 시기를 늦추려했고, 우리는 서울 올림픽 이전, 가급적 빠른 시기 발표를 원했다. 그러나 헝가리 측이 북한 9·9절에 참석할 자국 경축사절단이 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9월 11일 이후 발표를 고집해 결국 올림픽 개막 4일 전인 9월 13일 대사급 상주대표부 설치 합의를 발표하게 됐다. 당초에는 정식 수교까지 1년 정도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북한으로부터 큰 모욕을 당한 헝가리가 태도를 바꾸어 4개월 후인 1989년 2월로 수교 일정이 앞당겨졌다.”
▲염돈재 교수

여러 차례 회담으로 비밀 유지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비밀이 유지됐나
▶“북한의 방해 가능성 때문에 양측 모두 엄격한 보안 하에 추진했다. 헝가리 회담은 공산당 사냥터 별장에서 했고, 서울 회담은 워커힐에 있는 특수 빌라에서 했다. 이 빌라는 장세동 안기부장이 비밀 회담을 위해 최종현 선경 회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마련된 시설이다. 또 경제 협력을 위해서는 경제부처 장관들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보안 때문에 회의 개최를 못하고 박 보좌관이 관계 장관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서명을 받았다.”

흔히 공산국가는 외국 협상 대표단의 대화 내용을 도청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비했나
▶“협상 대상이 누구든 그런 문제는 늘 신경 쓰고 있어야 한다. 간단한 내용은 필담으로 하고 협의 내용이 많을 때는 정원 가운데 서서 얘기한다. 벤치나 조명기구 부근은 도청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또 도청을 염두에 두고 이를 역이용하여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경우도 있다.”


소련과 수교할 때 30억 달러의 차관을 줬다가 제때 돌려받지 못해 큰 문제가 됐는데 헝가리는 어땠는가
▶“헝가리와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경협 자금 6억 5,000만 달러 가운데 대부분은 우리 상품 구입 시 제공하는 전대차관(轉貸借款)이나 연불수출(延拂輸出)자금이어서 애초부터 문제 발생 소지가 적었다. 그 후 헝가리 경제가 호전돼 합의된 금액 일부는 집행되지 않았고, 차관은 4∼5년 후 모두 상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박철언 장관 회고록에 의하면 헝가리와의 협상 결과를 공식 발표 48시간 전에 미국에 통보해 불만이 많았다고 하는데 왜 그런 일이 생겼나
▶“자주 외교, 민족 자존 외교를 표방하던 시기지만 헝가리와의 수교 협상을 담당한 외교부 구주국(歐洲局) 직원들이 미국과의 협조 관행에 익숙하지 않아 제때 챙기지 못한 것인데 많은 오해를 낳았다. 미국 통보가 누락됐다는 것은 공식 발표 며칠 전 최종점검 과정에서 발견돼 뒤늦게 통보하게 됐다. 그 후 박 보좌관을 만난 CIA 관계자는 자기들은 한국 측 통보 열흘 전에 이미 헝가리 거점으로부터 통보를 받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어떤가
▶“헝가리에 수교 교섭단을 파견할 때 가까운 장래에 수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제장관들 가운데는 설령 차관을 떼이더라도 수교만 되면 성공이라고 얘기하는 분도 있었다.
그런데 헝가리를 계기로 북방 정책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공직자들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국민적 성원이 이룬 성과라고 생각된다. 하면 된다는 것을 그 때 새삼 깨닫게 됐다.”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1943년 8월 27일, 강원도 강릉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박사
청와대 비서관
주독일 대사관 공사
국가정보원 제1차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초빙교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現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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