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성사 비사

염돈재 교수의 외교 이야기(5)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입력 : 2017.11.16 16:01
편집자주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은 양국이 미수교 상태에서 개최됐다는 점과 노태우 대통령 북방정책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나 극비리에 성사되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들이 많다. 회담성사에 핵심역할을 했던 염돈재 교수를 만나 비사를 들어본다. / 편집자

▲염돈재 교수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의 성사배경은 아직까지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누가 먼저 제의했는지 분명치 않다”면서 소련이 먼저 제의한 것 같다고 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 측은 “1990년 3월 소련방문 시 고르바초프와 합의한 것”이라고 했고 박철언 전 장관은 자신의 작품이라고 했다. 어느게 맞는가
▶“조금씩은 맞지만, 노 전 대통령이 가장 틀린 셈이다(웃음).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은 노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박철언 전 장관이 교섭을 시작하고 내가 마무리해 성사된 것이지만, 크게는 노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 의지와 우리의 국력신장이 낳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미수교 상태에서 소련과의 정상회담을 지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며 교섭은 어떻게 시작 됐나
▶“1990년 4월 7일 국내 일간지들이 5월 30일 예정된 노 전 대통령의 방미기간이 고르바초프의 방미기간과 겹쳐 한소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는 연합통신 이문호 특파원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를 읽은 노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김종휘 수석이 4월 23일 박철언 전 정무장관에게 부탁을 했고 박 전 장관이 4월 27일 동경에서 소련과의 비밀접촉 창구인 노보스티 통신 동경특파원 두나예프를 만남으로써 교섭이 시작됐다. 당시 국내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노 대통령은 한소정상회담을 중요한 정치적 돌파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해서 정상회담 교섭에 참여하게 됐나
▶“노태우 정부 출범 후 청와대 정책보좌관실에서 소련과의 비밀교섭 업무를 담당하다, 1989년 8월 박철언 보좌관이 정무1장관으로 부임하면서 정책보좌관실이 해체돼 안기부(현 국정원)로 돌아왔다. 당시는 미주담당 부국장으로 있었는데 YS와의 불화로 4월 13일 정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박 장관이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서동권 부장의 허락을 받아 주어 참여하게 됐다.”


-처음 정상회담 추진지시를 받았을 때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나
▶“사실 4월 7일 한소정상회담 가능성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다. 정부가 추진한다면 박 전 장관이 맡을 것이고 결국 그 임무가 내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박 전 장관으로부터 지시를 받았을 때는 황당하면서도 “한번 해보지 뭐”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간 소련과의 비밀접촉 채널개척에 성공한 데다, 누구도 큰 기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두나예프는 소련 국가보안부(KGB) 소속이라는 설도 있는데 어떻게 개설된 채널인가
▶“1990년 3월 방소 시 소련공산당 국제부 부르텐스 부부장이 박 전 장관에게 긴급접촉을 위해 지정해 준 채널이다. 나중 알게 된 일이지만, 두나예프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대외담당 수석보좌관인 아나톨리 체르냐예프의 지시를 받는 사람이었다. 미 CIA는 체르냐예프가 하루 6시간을 고르비 곁에 있다고 평가했다. 결국 한소정상회담 뒤에는 고르비의 최측근인 체르냐예프가 있었다는 의미이다.”


-박 전 장관은 4월 27일 두나예프와 접촉했는데 무슨 얘기를 했나
▶“조찬면담 시 배석했는데, 한반도와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 양국관계 개선 및 경협문제 논의를 위해 정상회담이 필요하며 워싱턴에서의 양자회동이나 부시 대통령이 포함된 3자 회담, 또는 그 외의 어떤 시간, 장소에서의 회동도 가능하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두나예프가 소련귀국을 망설이자 여비지원을 약속하면서 두나예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 한소정상회담이 끝날 때까지 박 전 장관의 역할을 없었다. 왜 그랬나
▶“박 전 장관은 정무장관 사임 후 카이로 및 유럽여행 예정이었는데 정상회담 지시를 받고 일정을 바꿔 동경을 방문하게 됐다. 따라서 두나예프의 소련행이 확정되자 나머지 일은 내게 맡기고 4월 30일 카이로로 출발했다. 그 후 5월 17일 소련 측으로부터 정상회담 수락 메시지를 받을 때까지는 상황진전이 없어 나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수락 메시지 수신 후에는 엄격한 보안지시가 있어 5월 19일에 귀국 후에도 공식발표 시까지 진행사항을 알지 못했다. 그 후 정상회담 준비는 청와대가 주관하면서 박 장관의 개입을 배제했기 때문에 역할을 하기가 어려웠다. 만약 박 장관이 정상회담 준비를 주관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 아쉽다.”


-박 전 장관이 카이로로 출발 한 후 두나예프와 무슨 일을 했나
▶“두나예프가 일시귀국 허락을 받은 후 한소 정상회담이 필요한 이유를 보다 상세히 설명하고 박 전 장관님이 주일대사관에서 빌린 여비를 전달했다. 한소 정상회담이 필요한 이유는 서울 출발 시부터 구상해 온 내용을 영문으로 정리해 노 전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구두메시지 형식으로 전달했다.”


-소련 측을 뭐라고 설득했나
▶“첫째,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저서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데올르기의 차이가 국가 간의 관계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소관계 개선을 통해 페레스트로이카의 진실성을 입증하라.

둘째, 냉전의 첨단에 선 한국과의 관계개선은 고르바초프의 ‘팬 아시안 포럼’ 실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서는 한국이 가장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넷째, 한국은 미국의 어깨 너머로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할 수 없고 미국과의 화해체제를 중요시하는 소련도 미국의 어깨너머로 한국과의 관계개선을 하기 어렵다. 그리고 미국도 한소관계 개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고 있어 어려운 입장이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한소정상회담은 세 나라의 어려움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이니 놓치지 말자고 했다.”


-또 한 가지 더 있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나의 사견이라고 전제하고 말했다. 민자당 대표단 방문 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YS를 만난 후 한국에서는 소련이 한국 국내정치에 개입하려는 의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민자당은 통합됐지만, YS와 노 전 대통령은 아직은 정치적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소정상회담은 이런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이번 정상회담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노 전 대통령 재임 중에는 관계개선이 어려울 것이라 얘기했다. 며칠 전 소련정부가 한국 국내정치 개입설에 당혹해 한다는 보도가 있었던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 얘기를 들은 두나예프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후 교섭은 어떻게 진전됐나
▶“소련에 간 두나예프는 한국을 직접 한번 가보고 오라는 체르냐예프의 지시에 따라 5월 7일 한국을 방문해 3일간 머물면서 나의 안내로 우리의 발전상을 직접 본 후 바로 소련으로 갔다. 그리고 5월 17일 주소련 영사처를 통해 정상회담 수락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 내용은 네 줄이었다. (1)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겠음, (2)이 문제 통보를 위해 5월 22일 도브리닌을 보내겠으니 노 전 대통령은 처음 듣는 얘기인 것처럼 해 주시기 바람, (3)5월 19일 염돈재를 동경에서 만나겠음. 결국 이렇게 해서 정상회담은 합의됐고 그 후부터 정상회담 준비는 청와대가 주관했다.”


-박철언 전 장관이 시작한 일을 청와대가 주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박 장관이 정상회담 준비를 맡을 것이라 생각했다. 노 전 대통령이 박 전 장관에게 정무장관 퇴임 후에도 소련과의 비밀교섭 업무를 담당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종휘 수석은 미국과의 협조업무만 맡기로 했었다. 그런데 정상회담이 확정되자 청와대가 준비를 주관하면서 박 전 장관을 철저히 배제했다. 정상회담 준비를 현직이 아닌 박 전 장관이 맡기 어렵다는 점도 있지만, 박 전 장관이 개입될 경우 YS의 반발이 있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한 것 같다.”


-한 때 노 대통령은 김종휘 수석이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된 이유는
▶“김 수석이 한 일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박 전 장관과의 합의대로 두나예프의 소련행이 확정된 후 5월 1일부터 3일 간 미국을 방문해 한소정상회담 추진사실을 알리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5월초 두나예프 방한 시 현대중공업과 KBS 등 노사분규 격화로 노 전 대통령의 캐나다, 미국, 멕시코 방문이 취소돼 미국에서의 한소 정상회담이 불투명하게 됐을 때 노 전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해 언제, 어디서든 만나겠다는 뜻을 확인해 준 것뿐이다. 내가 김 수석의 두나예프 면담을 주선해 준 것이 실수였고 사정을 모른 두나예프가 정상회담 수락 메시지를 김 수석 명의로 보낸 것이 혼선의 원인이 됐다.”


-김 수석의 두나예프 면담을 주선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때 마침 서동권 부장은 해외출장 중이었고 부국장급인 내가 대통령 면담을 신청할 수도 없어 고민 끝에 정상회담 추진사실을 아는 김 수석에게 부탁을 했는데 두나예프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 조찬을 마련했고 다음 날 대통령의 의중을 알려주겠다고 해서 다시 조찬을 마련했는데 나중 두나예프에게 왜 메시지를 김종휘 수석 앞으로 보냈냐고 물어보니 김 수석이 나의 직속상관인 줄 알았다고 했다.”


-정상회담 수락메시지를 안기부 통로로 보내도록 했으면 더 나았을 뻔했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안기부 요원에게만 맡겨 놓으면 혹시 출장이나 다른 일로 접촉이 지연될 수 있다고 생각돼 두나예프에게는 외교부 소속 서모 참사관의 연락처를 주고 안기부 요원에게는 그와 협조해 두나예프로부터 연락이 오면 함께 만나 메시지를 안기부 통신망을 통해 나에게만 보내라고 지시해 뒀다. 그런데 막상 서모 참사관이 두나예프로부터 김종휘 수석 앞 메시지를 받자 공로명 영사처장이 김 수석 앞 메시지는 반드시 외교부를 통해 전달해야 한다고 우겨 그렇게 됐다고 들었다. 공로명 처장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 후 도브리닌 전 주미대사 방한 시에는 어떻게 했나
▶“내가 안기부 최모 과장을 공항에 보내 영접한 후 서동권 부장 지시에 따라 다음 날 청와대 김종휘 수석과 노재봉 비서실장이 만나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토록 했다. 서동권 부장도 정상회담을 원만하게 추진하고 YS와의 불화방지를 위해서는 박 전 장관보다는 청와대에 맡겨 두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렇게 해서 한소정상회담 준비는 청와대가 담당하게 됐고 정상회담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혼선이 생기는 원인이 됐다. 그 일을 생각하면 정보와 권력은 함부로 나누지 말라는 얘기가 새삼 떠오른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1943년 8월 27일, 강원도 강릉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박사
청와대 비서관
주독일 대사관 공사
국가정보원 제1차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원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초빙교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한독통일자문위원회 위원
現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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