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내막은...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입력 : 2017.12.14 14:16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은 말 그대로 ‘역사적 사건’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동서화해를 아시아로 확산시키는 대 사건’이라 했고 요미우리는 ‘71년 키신저의 중국방문에 필적하는 충격적 소식’이라 전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내용은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현장에서 지켜본 염돈재 교수를 통해 그 내막을 알아본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태우 대통령이 1시간 20분이나 기다리는 등 의전도 엉망이었고, 회담결과도 ‘멀지않은 장래에 수교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는데 그쳤고, 회담 후 두 달이 지나도록 아무 후속조치가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회담전략을 잘못 짰기 때문이다. 첫째, 준비채널을 잘못 선택했다.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두나예프를 통해 체르냐예프 보좌관 측과 접촉했어야 하는데 메신저에 불과한 도브리닌 채널에 매달렸다. 둘째, 페레스트로이카에 큰 자부심을 가진 고르바초프의 감성을 자극했어야 하는데 경협문제를 제기해 정서적 교감 없는 회담이 돼 버렸다. 셋째, 후속협의 채널을 지정하지 않아 후속조치 추진이 불가능했다.”


-정상회담 준비에 직접 참여했을 텐데 왜 그런 문제가 생겼나
▶“정상회담 수락 메시지를 받은 후 나는 박철언 장관이 준비작업을 주관하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서동권 안기부장 안가에서 청와대 팀과 함께 준비작업에 들어갔는데 박철언 장관이 완전히 배제됐다.
1주일 뒤 삼청동 청와대 안가로 옳긴 후 김종휘 외교안보 수석이 작업을 주도하면서 슬그머니 나를 배제해 준비작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2-3일 후 내가 청와대 팀에 강력히 요구해 대담준비 내용을 봤는데 경제의제 중심인 데다 “소련이 2차 대전에 참전해 우리에 독립을 앞당겨 준데 감사한다”는 황당한 내용도 있어 함께 작업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철수했다. 철수 후 서동권 부장께 보고 드렸는데 별 말씀이 없어 김종휘 수석과 얘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돼 다시 참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팀의 구성은
▶“민병석 비서관 등 외교안보수석실과 외무부 이상철 동구과장 등 외무부 팀 몇 명이 참여했으나 중요작업은 김종휘 수석 등 외교안보수석실 요원들이 담당했고 총 지휘는 노재봉 비서실장이 했다.”
청와대 팀이 두나예프 채널을 활용하지 않고 도브리닌에 매달린 이유는
“김종휘 수석이 정상회담 성사과정을 대통령과 노재봉 실장에게 정확하게 보고하지 않아 두 분은 도브리닌이 정상회담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데다 청와대 주도를 위해서는 두나예프 채널을 배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2015년 9월호 월간조선에 게재된 이정빈 전 외무장관 회고록을 보면 외무부도 신현확 전 총리를 통해 도브리닌이 서울개최 전직정부수반협의회(IAC)에 참석토록 교섭했고 5월 22일 도브리닌의 서울도착 후에는 최호중 장관과 공관에서 만찬을 갖기로 얘기가 됐는데 외교안보 수석 면담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고 돼 있다. 왜 그런 혼선이 생겼나
“당시 정부 각 부처가 모두 북방접촉 채널개척에 열중해 혼선이 많았던 데다 한소정상회담이 극비리에 추진됐기 때문이다. 도브리닌 입국 시 외무부 이상철 동구과장이 공항에서 외무장관 관저에서의 만찬약속을 받았으나 나중 도브리닌이 몸이 아프다고 해 만찬이 취소됐다. 도브리닌은 그 시간 노재봉 실장과 김종휘 수석을 만났다. 이때까지 외무부는 도브리닌이 정상회담 메시지를 가지고 온 걸 모르고 있었다.”


-관련부처 장관들이 알게 된 것은 언제인가
▶“노 대통령이 5월 23일 도브리닌을 만난 후 다음 날 청와대에서 있은 극비회의 때였다. 정무수석, 외교안보수석, 경제수석, 공보수석, 외무장관, 국방장관, 안기부장,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등이 참석했고 이병기 의전비서관, 민병석 외교안보비서관, 안기부 부국장이던 나 등 3명이 배석했다.”


-이날 회의에서 어떤 문제가 협의 됐나
▶“내가 회의자료를 준비해 갔는데 김종휘 수석이 회의를 주관해 배포하지 못했다. 그러나 참석자들의 난상토론이 계속되자 서동권 부장이 나에게 자료배포를 지시했고 서 부장님 주관 하에 회담장소, 회담의제 등에 대해 하나하나 검토했다. 나는 회담장소로 아세안박물관, 페어몬트호텔, 슐츠 전 국무장관 별장을 제시했다.


아세안박물관은 세계 최대의 아세안콜렉션을 갖고 있어 상징성이 높고 페어몬트호텔은 외국 정상들이 자주 묵어 ‘서부의 백악관’이라 불렸다. 슐츠 별장은 슐츠 전 국무장관이 노 대통령과 친분이 깊다는 점을 고려했다. 회담장소 선정을 위해 이병기 의전비서관을 현지에 파견하고 회담준비는 외교안보 수석이 주관키로 했다.”


-노 대통령 회고록에 의하면 우리는 고르바초프가 귀국길에 들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자고 했는데 소련 측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소련 영사관에서 만나자고 수정 제의했다고 돼 있다. 그리고 슐츠 전 국무장관이 정상회담 성사에 도움을 준 것처럼 돼 있는데 그의 별장을 회담장소로 고려한 것도 그 때문인가, 회담장소는 결국 페어몬트 호텔로 결정됐는데 이유는
▶“우리 측이 굳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지정한 것은 아니고 워싱턴이든 블라디보스토크든 어디든 좋다고 했는데 소련 측이 샌프란시스코가 좋다고 했다. 소련이 회담장소로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을 제의한 적은 없고 내가 회의자료에 그럴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해 놓은 것이 와전된 것 같다.


슐츠 장관이 한소정상회담 성사에 도움을 준 것은 없으나 슐츠 장관 별장을 넣은 것은 한-소 양국이 미국 측에 감출 것이 없다고 선언하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정상회담 장소가 페어몬트 호텔 고르비 숙소로 정해진 것은 소련 측이 이동시간 절약을 원한 데다 두 정상 모두 그 호텔에 머물고 있고 호텔 내에 다른 방을 얻기도 어려웠기 때문인 것으로 들었다.”


-회담 전 많은 전문가들이 소련이 정상회담에 응한 것은 경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고르바초프가 회담장에서 김종인 경제수석의 서류를 보고 “자료가 왜 이렇게 얇으냐”고 농담하고, 노 대통령이 수교 얘기를 하자 “성급하게 하지 말고 질적 발전을 통해 양적 발전으로 가자”고 대답했다는 것도 자주 그 논거가 됐다. 그런데도 소련의 관심사항이 경협문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는데, 누구 말이 맞는가
▶“100%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직후 이수정 공보수석에게 물어봤는데, 노 대통령이 경협문제를 꺼내자 고르바초프가 “그건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라고 해 회담 분위기가 아주 썰렁해 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노 대통령 육성회고록에도 경협문제는 원칙적, 포괄적 얘기만 했을 뿐 구체적 논의는 없었다고 돼 있다.
두나예프도 나중 나에게 고르바초프의 관심사항은 경제가 아니었는데 한국 측이 먼저 경제얘기를 꺼내 놓고 정상회담 후에는 경제협력에 신중해야 한다고들 난리를 치고 있어 소련 지도부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국내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소련이 경제 때문에 한소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고 했고 박철언 회고록을 보면 미 CIA도 박 장관에게 그렇게 브리핑 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경협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경협문제를 제기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소련 지도부가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경제지원이 아니라 한국의 비약적 경제발전 배경이었고, CIA가 박철언 장관에게 강조한 것도 첨단기술 유출문제였다. 수퍼 파워 소련이 중진국 초년생 한국의 경제지원에 큰 기대를 걸었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다.
설령 소련이 경협을 절실히 원했더라도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먼저 꺼낼 문제는 아니다. 우리가 정치관계 발전 얘기를 하면 경제문제는 소련이 꺼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협상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꺼내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상대에게 힘들여 ‘쟁취’할 기회를 줘야 한다. 내가 청와대의 정상회담 전략이 잘못 됐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정빈 장관 회고에 의하면 청와대 지시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5월 29일 워싱턴으로 가 소련대사관 예브게니 아파나시예프 정무참사관과 도브리닌을 만났으나 아무 협의도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 날 새벽 5시 노재봉 실장과 도브리닌의 면담이 이루어졌다고 돼 있다. 정상회담이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진행됐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노재봉 실장이 도브리닌으로부터 그 날 오후 4시 고르바초프 숙소에서 양측 각 5명만 배석한 가운데 면담을 하자는 통보를 받았을 뿐 사전협의가 전혀 없었다. 회담 후 고르바초프가 사진촬영을 하지 않으려 해 노 대통령이 악수 시 억지로 가까이 끌면서 급히 사진사를 불러 사진 두 장을 찍을 수 있었다고 이수정 수석이 내게 알려줬다. 우리 기대와는 달리 소련 측은 두 달 전 고르바초프가 프리마코프 사무실에서 김영삼 대표와 서서 인사만 나누었던 것처럼 노 대통령과 간단히 환담하는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 주요 인물들

-정상회담에는 누가 배석했나, 회담이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져 세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 크게 화를 냈다는 얘기도 있는데
▶“우리 측에서는 최호중 외무, 김종휘 수석, 김종인 수석, 노창희 의전, 이수정 공보수석이 배석했고, 소련 측에서는 프리마코프 대통령위원회 위원, 체르냐예프 대외담당 보좌관, 도브리닌 대통령 외교고문, 마슐류코프 경제부총리, 말케비치 상공회의소장이 배석했다. 세바르드나제 장관이 배석치 않은 것은 공식회담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며 쉐바르드나제가 배제돼 화를 냈다는 설은 사실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박철언 회고록에 의하면 청와대 측이 염 교수의 수행과 박 장관 명의 선물전달도 방해했다고 돼 있다.
▶“5월 24일 청와대 회의 시 나도 수행원으로 결정됐는데 청와대가 슬그머니 제외시켜 출발 당일 아침 서동권 부장님의 강력한 항의로 출발 2시간 전 수행 통보를 받았다.
또 정상회담 결정 실세인 체르냐예프 보좌관에게 보내는 박철언 장관 명의 선물을 가져갔는데 김종휘 보좌관이 대통령께 여쭤봐야 한다고 해 그렇게 해 달라고 했더니 노 대통령이 그렇게 하라고 해 정상회담 직전 전달할 수 있었다.”


-이 회담은 어찌 보면 좀 굴욕적 회담이라고도 생각된다. 합의내용과 성과는 무엇인가
▶“이 회담은 의전절차와 준비도 미흡했고, 차후 수교에 노력하자는 것 외에 합의사항도 없는 1시간 5분의 짧은 만남이었으나 우리 외교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회담이라 생각된다.
첫째, 자주외교의 지평을 넓히고 국민적 자긍심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둘째, 한·소 수교와 북방정책 성공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셋째,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알리고 미국이 한국의 북방정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의구심을 해소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나에겐 ‘하면 된다’는 박정희 정신을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나도 많은 것을 배운 회담이었다.”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1943년 8월 27일, 강원도 강릉 /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박사 / 청와대 비서관 / 주독일 대사관 공사 /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부소장 / 국가정보원 제1차장 /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 통일정책 자문위원 / 국정원 개혁 자문위원 / 민주평통자문위원 / 現 한독통일자문위원, 건국대학교 초빙교수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임윤희 기자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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