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을 이룬 광개토태왕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머니투데이 더리더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입력 : 2017.12.06 15:58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년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19세기 말 광개토태왕릉비의 재발견으로 인해 고구려를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사의 슈퍼스타로 등장한 광개토태왕. 그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 고구려를 일약 제국의 반열에 올린 위대한 영웅이다. 그의 무덤과 릉비는 제국의 지배자인 태왕의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 만포에서 그의 무덤과 릉비를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조상의 것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느 황제의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다. 제후국 조선 사람들의 가슴에 담기에는 너무 컸던 광개토태왕. 그의 리더십을 알아보자.


고구려를 바꾼 광개토태왕
374년에 태어난 그의 이름은 담덕으로 18세가 되던 391년 5월에 즉위해 412년까지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 짧은 기간 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정복군주다. 하지만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전쟁을 하여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는 의미도 된다. 단지 전쟁을 좋아해 적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기만 한 정복군주였다면, 우리는 굳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할 필요가 없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고구려를 질적으로 크게 변화시켰다는데 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비참한 죽음을 큰 아버지인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으로부터 듣고 자랐다. 그는 고구려의 숙적인 백제 및 후연과 치룬 전쟁들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그는 태자시절부터 전쟁에 참전해 병사를 부리는데 능하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타고난 리더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고 적었다.


고구려인들이 그에게 기대했던 것은 할아버지 고국원왕 시절 수모를 씻도록 백제와 후연을 정벌해 굴복시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지역 강국이 아닌, 제국으로 변화시키는 더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제국은 다양한 민족들을 통치, 통제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단일한 문화만이 아닌,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여 거대한 용광로처럼 융합하고, 주변 세계에 그 영향력을 끼치는 나라이기도 하다.


고구려인의 수호자를 자처하다
광개토태왕은 부왕의 장례기간이 끝난 후, 그해 9월 돌연 거란을 정벌했다. 고구려 서북방에 위치한 거란은 378년 변경을 침략하여 고구려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즉위할 때까지 잡혀간 고구려인들을 되돌려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거란을 공격해 포로로 붙잡혀갔던 고구려인 1만 명을 되찾아왔다.


그가 거란 원정을 서둘렀던 것은 이 전쟁을 통해 그가 고구려인의 수호자라는 명분을 획득하여 백성들의 지지를 획득하려는 구체적인 목적 때문이었다. 포로로 끌려간 자식과 생이별을 했던 사람들에게 그는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고 싶은 리더였다. 18세의 젊은 광개토태왕은 이 전쟁을 통해 고구려인의 신뢰를 획득함으로써, 그가 꿈꾼 원대한 꿈을 향해 힘차게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전쟁이 잦은 나라에서 백성들의 삶은 온전히 평안(平安)하지는 않다. 하지만 전쟁을 치룬 가운데도 구성원의 평안함을 먼저 고려한 리더와 그렇지 않은 리더가 있다.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태왕의 은택은 하늘에 두루 미쳤으며, 위무는 온 세상에 떨쳤도다. 태왕이 나쁜 무리들을 쓸어 없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업에 종사케 하시니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은 불어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고 그의 업적을 요약했다. 그는 정식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었다는 평안이란 말이 들어 있다. 아들인 장수왕과 신하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단순히 부여된 호칭만은 아니었다.


거란 공격은 395년까지 이어졌다. 『비문』에는 거란 원정의 성과에서 『삼국사기』기록에 등장하는 잡혀간 사람을 되찾아 온 이야기가 빠져있다. 고구려인이 붙잡혀갔던 아픈 역사를 기록하기 싫은 탓일 것이다. 그 대신 수년에 걸친 원정의 결과 소와 말, 양을 무수히 획득했다고 적고 있다. 광개토태왕은 거란을 집중 공략해 고구려에게 필요한 전략문자부터 획득했다. 고구려는 늦어도 2~3세기에는 소를 이용해 농사짓는 우경을 시작했다. 거대한 보습을 단 쟁기를 끌고 땅을 갈면 황무지도 쉽게 개간이 된다. 거란에서 확보한 소는 고구려 농민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데 이용되었다. 거란의 말은 튼튼하고 빨랐다. 강군을 육성하는데 말을 무엇보다 필요했다. 양은 양탄자를 비롯한 모직물의 재료가 된다. 고구려는 일찍부터 질 좋은 모직물을 생산해 수출했었다. 광개토태왕은 소, 말, 양과 같은 경제성 높은 동물들을 확보해 고구려인의 경제적 수준을 올리는데 먼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편안함을 먼저 생각한 리더였다.


▲구리시 광개토광장에서 세워진 광개토태왕 동상.
백제를 포용하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특별한 나라였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한반도 중부지역 지배권과 황해 제해권을 놓고 경쟁하는 나라였고,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제압해야 할 나라였기 때문이다. 광개토태왕은 392년 황해 제해권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성인 관미성을 함락시켰고, 396년 백제 수도를 공격해 아신왕의 항복을 받고 58개성과 많은 포로와 재물을 빼앗았다. 하지만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켜 통합시키지는 못했다. 백제의 국력이 만만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서쪽의 후연과의 전쟁을 남아있었기에 남쪽에 많은 군대를 주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는 백제인을 적극 포용했고, 경제적 실익을 취했다. 고대에는 인구가 곧 국력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갈라진 나라였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가진 백제인을 쉽게 포용할 수 있었다. 관미성을 장악한 고구려는 황해를 통제해 백제가 대륙의 나라들과 직교역을 막고, 외교교섭을 차단했다.


399년 가야는 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가 배후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가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오자, 400년 광개토태왕은 5만 대군을 파견해 한반도 남해안 대원정에 나섰다. 신라 영토에 들어온 가야, 왜군을 격퇴하고, 금관가야(김해)까지 쳐들어가 동해와 남해안의 제해권까지 장악했다. 이 작전으로 백제는 더 이상 고구려에게 대항할 수 없었으며, 신라는 고구려의 충실한 속민이 되었고, 가야는 약화되고, 왜는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고 물러서야 했다.


그는 한반도 일대를 제압하고 제국의 실마리를 열었다. 하지만 400년 남해안 대원정의 대가도 컸다. 고구려의 적인 후연이 이때를 틈타 서부변경을 침략해기 때문이다.


후연과 전쟁을 마무리하는 법
유목민 출신 모용선비족은 한때 북중국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큰 제국을 건설한 바 있다.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제압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의 부친 고국양왕은 385년 4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의 원수인 후연과 무리하게 전쟁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복수에 연연하여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그는 후연 북쪽에 위치한 거란을 먼저 제압하여 후연을 다방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다시 백제를 제압해 남쪽 국경부터 안정시킨 이후에야 비로소 후연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상상도
고구려는 후연의 공격을 받은 즉시 반격을 시작했고,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한데 이어, 후연의 연군을 공격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고구려가 만리장성 남쪽까지 쳐들어갔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의 연이은 공격에 후연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멸망의 위기를 느낀 후연 내부에서는 마침내 내부 정변이 일어났다. 후연의 왕 모용희가 풍발이란 자에 의해 살해되고, 고운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고운은 고구려 출신이었다. 풍발을 비롯한 후연의 귀족집단들이 멸망의 위기에서 자구책으로 고운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자 광개토왕은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 종족의 예를 베풀었다는 것은, 고구려가 종주국, 북연이 제후국이 되는 관계로 양국 관계가 정리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북연 서쪽에는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한 북위가 있었다. 고구려와 북위가 국경을 마주대하는 것은 또 다른 충돌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두 나라 사이에 북연을 완충지대로 삼아 충돌을 피한 대신,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동부여, 숙신 등을 제후국으로 복속시키는 등, 고구려를 중심으로 북연, 신라, 거란, 그리고 백제를 포괄하는 고구려 제국의 권역을 완성했다.


제국의 리더 광개토태왕

▲그의 무덤인 태왕릉과, 그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

그의 무덤 곁에 있는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그를 태왕(太王)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태왕은 단순히 큰 임금이 아니라, 유목민들이 부르는 카한, 영어의 Emperor, 그리고 중국에서 사용하는 황제와 같은 제국의 지배자 호칭이다. 광개토태왕은 단순한 정벌을 통해 원수에게 복수하는 작은 속내를 가진 임금이 아니다. 그는 제국의 건설자였다. 그는 재위 22년 동안 고구려를 제국으로 성장시켰다. 그가 만약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백제나 후연을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했다면, 엄청난 국력을 소비해야 했을 것이다.


z하지만 그는 불필요한 전쟁, 단순한 복수전은 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평화를 가져오는 전쟁, 고구려인이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전쟁을 해왔다.

 
412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구려는 약 140년 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후손인 장수왕, 문자명왕 등이 정치와 외교를 잘한 탓도 있지만, 광개토태왕이 고구려제국을 견실하게 구축한 탓이 크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거대한 제국의 틀 안에서 많은 것이 공존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고구려 제국을 이룩했다. 고구려가 천하질서를 지키는 제국이라는 인식은 그의 후손인 장수왕 때에 만들어진 『중원고구려비』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영원히 형과 아우가 되어 위와 아래가 서로 화합하여 하늘의 질서를 지키기를 원한다(如兄如弟上下相和守天)라는 글로 표현된다.


제국의 리더가 본 미래
광개토태왕은 전쟁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구려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수시로 평양에 들려 미래의 수도가 될 기반을 조성했다. 427년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이미 광개토태왕 시절에 준비되었던 것이다. 평양은 주변에 넓은 평야가 있고, 바다로 나가기 쉽다. 400년 넘게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제국의 수도로는 좁았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미래를 준비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비옥한 요동벌판을 완전히 장악했다. 요동지역은 무순의 철광산, 은산의 은 등 지하자원도 풍부한 곳이다. 요동과 한반도 중부를 장악하고, 서북부 초원지대와 동북부 삼림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함으로 고구려의 영토는 그의 시대에 크게 확대되었다.


그는 이렇게 성공적으로 고구려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전쟁을 잘하는 용병술에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먼저 해야 할 일부터 실천했다. 무엇보다 백성들의 신뢰를 획득하는 일부터 실천하고, 고구려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했다. 또한 적들을 크게 포용하여 고구려라는 큰 울타리 안에 넣어 버렸다. 힘만 강한 강국과 포용력을 가진 제국은 이점에서 다르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제국의 경영자였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을 저술하여 고구려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보여준 생활사 연구로,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를 화두로 삼아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 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고구려, 수, 당, 북방제국의 대립관계’ 등의 논문과 <고구려의 발견>,<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조선이 가지 않은 길> 등을 저술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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