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비밀 수교교섭 비사

[염돈재의 외교이야기(7)]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입력 : 2018.01.31 10:54

▲염돈재 건국대 초빙교수

1990년 9월 30일 이루어진 한국-러시아 간의 수교는 한국 외교사에 가장 극적인 순간의 하나이다. 건국 이후 42년 만에 처음으로 공산 종주국이자 북한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러시아와 국교관계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비밀 수교교섭에 참여했던 염돈재 교수를 만나 뒷얘기를 들어본다.


-박철언 회고록에 의하면 1988년 8월 28부터 9월 10일까지 2주간 한국정부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국제회의 참가가 아닌 개별방문 비자를 받아 비밀리에 러시아를 방문했다. 무엇 때문에 갔나

▶“공산 종주국이며 북한의 가장 가까운 우방인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은 북방정책의 성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으나 그 때까지 양국 정부 간의 접촉은 전혀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접촉채널 개척과 관계개선 문제 협의를 위해 방문했다.”


-그 때까지의 한러관계는 어땠나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개혁·개방정책 후에도 한·러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 1987년 인적교류는 290명이었으나 대부분 서울올림픽을 앞둔 체육교류였다.
교역량은 수출 6,700만 달러, 수입 1억 3천만 달러, 총 2억 달러에 불과했다.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의 간접교역은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8년 1월 러시아정부가 88서울올림픽 참가를 발표해 관계개선 분위기가 다소 호전된 상태였다.”


-국교가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방문에 성공하게 됐나
▶“여러 방법으로 러시아와의 접촉채널 개척에 노력하다가 내가 1983년 샌프란시스코 근무 시 알게 된 루이스 앤 클락 대 하만경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다.
하 교수는 20여 년 동안 한·러경제협력위원회에서 활동해 러시아 고위층과 친분이 깊었다. 하 교수 주선으로 미국·캐나다연구소의 초청을 받았고 많은 러시아 고위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밀방문이었지만 정부관리로서의 개별방문이었다. 무슨 여권으로 갔는가, 입국비자는 어디서 받았나
▶“외교관 여권은 안 된다고 해 관용여권으로 갔다. 비자는 여권사본을 하 교수께 보내 샌프란시스코 주재 러시아영사관에서 문화 비자를 받았다. 덴마크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하 교수가 비자를 갖고 와 함께 러시아로 갔다.”


-하 교수가 미국 시민권자인데 보안상 문제는 없었나
▶“하 교수님의 러시아인맥이 두터워 미국 CIA와도 연결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서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이상 미국에 감출 것도 없고, 미국에 자연스럽게 알릴 기회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나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정책결정자들을 대부분 만났다. 동양학연구소 카피차 소장, 미국·캐나다연구소 아르바토프 소장, 게오르기 김 동양학연구소 수석부소장, 이반 이바노프 국가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 카티로프 우즈베키스탄 각료회의 의장, 티타렌코 극동문제연구소장 등을 만나 우리의 북방정책 의지와 한소수교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박철언 회고록을 보면 한국 관리로는 처음으로 외무성을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는데 누구와 만났나
▶“블라드미르 루킨 차관보와 파노프 남북한 담당관 등과 만나 노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우리 대통령이 러시아 서기장에게 보낸 첫 친서였다.
또 루킨 차관보는 우리가 소련 외무성에 들어온 첫 한국인이라 했다. 루킨 차관보는 하 교수와 절친한 사이로 그 후 러시아 하원 외무위원장을 역임했고 소련 출발 전날 박 보좌관이 주최한 주최한 만찬에 부인동반으로 참석했다. 파노프 남북한 담당관은 1992년 7월부터 1993년 11월까지 제2대 주한 러시아대사와 외무차관을 역임한 한반도 전문가이다.”


-대통령 친서 내용은
▶“양국관계 발전 필요성과 7·7선언 내용을 설명하고, 러시아의 서울올림픽 참가에 대한 감사와 러시아선수단에 대한 환영의사를 표시한 후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계속적인 이해와 협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대통령 친서는 절대 분실하거나 훼손돼서는 안 되므로 10여 일간 친서 넣은 가방을 식사 때든 어디든 항상 들고 다니느라고 고생 좀 했다.”


-러시아 측 인사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고위급으로 갈수록 군축과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 얘기하고 비중이 낮은 사람들은 주료 경제에 관해 얘기했다. 특히 아르바토프 미국·캐나다연구소장은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우려를 표시하면서 한국의 대러정책이 독립적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바노프 대외경제위 부위원장은 러시아의 극동개발계획을 설명하고 한국의 적극적 참여를 요청했으며 카피차 동양학연구소장은 아시아의 평화에 대해 얘기한 후 말미에 경제에 관한 좋은 제안이 있으면 알려주기 바란다고 했다.”


-러시아체류 기간이 2주나 됐는데 뭣 때문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노 대통령 친서와 우리 측 제안내용에 대한 답변을 듣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 오래 머물렀다. 러시아 측은 항상 중요한 문제는 관련기관 간의 충분한 토의를 거친 후 결정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러시아 측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레닌그라드와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다. 레닌그라드는 유서 깊은 소련 제2의 도시이고 우즈베키스탄은 고려인 20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의미 있는 방문이었다.”


-박철언 회고록에 의하면 카피차 동양학연구소장이 거물인척 행동했다고 하는데 소련 측 인사들의 태도는 어땠는가
▶“카피차 동양학연구소장과 아르바토프 미국·캐나다연구소장은 다소 거만스러워 보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두 사람은 모두 고위직이고 나이도 70을 넘긴데다 박철언 보좌관이 워낙 젊게 보여 그렇게 한 것 같다. 카피차 소장은 처음에 “유명한 분이라 해서 나이가 들었을 줄 알았는데 젊으시다”면서 조금 가볍게 대했으나 대화가 시작되자 경청하면서 열심히 메모했다. 아르바토프 소장은 처음에는 발을 내밀고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거만했으나 10분 정도 후에는 자세를 바로하고 메모하면서 경청했다. 박철언 보좌관의 태도가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인 데다 설명이 논리적이었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열정은 전염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게오르기 김 박사 댁에서는 노래도 부르고 화기애애했다는데
▶“게오르기 김 박사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지식인들에게는 매우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러시아에서 고려인으로 최고위직에 오른 분이어서 많은 한국인들이 대화하기를 원했으나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분 내외의 한국어는 매우 유창했다. 만찬이 무르익을 때 내가 노래 한 곡 하겠다고 하고 ‘고향의 봄’을 불렀다. 김 박사의 조국에 대한 향수를 읽어보고 싶어서였다. 처음 듣는 노래였을 테지만 아주 정감 있게 듣는 모습에서 같은 동포임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이 한 곡씩 불러 아주 즐거운 만찬이 됐다.”


-게오르기 김과의 만남은 어떤 도움이 됐나
▶“그 후 김 박사는 한소관계 개선의 전도사가 됐다. 당시 그 분은 신병으로 50킬로 밖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우리를 위해 자택으로 돌아와 만찬을 주었다. 내가 소련의 정책결정 과정과 실세에 대해 묻자 국내문제는 샤흐나자로프 보좌관, 대외관계는 체르냐예프 보좌관이라고 알려주어 나중 큰 도움이 됐다. 자택에 갈 때 외화상점에서 위스키, 꼬냑, 과일 등을 잔뜩 사 갔는데 사모님이 좋아하셨다. 아파트는 20평 정도였고 가구도 아주 검소했다. 러시아가 저러니 북한은 오죽할까 싶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오는 공항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 좌불안석했다는데
▶“평양서 왔다는 부부가 어디서 왔느냐 물어 미국교포라니까 부근에 있던 김일성 배지 단 여섯 명이 우리를 둘러쌌다. 자리를 피하기 위해 일찍 비행기에 탑승하자 그들도 올라와 승무원과 싸우면서 남의 자리인 우리 주변 좌석을 모두 차지했다. 모스크바 도착 후에 다시 우리를 둘러싸 걱정을 했는데 북한 깃발을 단 대사관 차가 활주로 부근으로 오자 타고가 버렸다. 우리를 납치하려 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 같다. 밀사외교는 그래서 위험성도 따른다.”


▶모스크바 체류 중 숙소인 메즈두나로디나야 호텔 로비에서 김종휘 외교안보 보좌관을 만나 깜짝 놀랐다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나
-“로비에서 만나 서로 깜짝 놀랐다. 김종휘 보좌관은 유엔주관 국제교육관계 학술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고 했고 박철언 보좌관은 그냥 러시아 사람들 좀 만나러왔다고 했다. 두 사람의 러시아 출장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노 대통령이 왜 그렇게 했을까 궁금하다. 대러관계 개선이 워낙 중요하니 여건 되는 대로 모두 추진해 보도록 한 것인지, 마음 좋은 노 대통령께서 김종휘 보좌관의 출장건의를 반려하기 싫어서 그런 건지, 박철언 보좌관의 출장이 헝가리 출장에 바로 이은 출장이어서 기억을 못하신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렵다. 내 생각에는 노 대통령께서 너무 바빠 박 보좌관의 러시아출장 사실을 잊으신 것 같다.”


-박 보좌관의 러시아출장으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노 대통령 친서에 대한 답신은 받았는가
▶“성과가 매우 많았다고 생각된다. 첫째,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우리 대통령의 친서를 러시아 서기장에게 전달했다. 둘째, 러시아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에게 한국의 북방정책 의지와 한소관계 필요성을 설명하고 인맥을 구축했다. 셋째, 정책결정 과정과 경제사정 등 소련 내부사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노 대통령의 친서에 대한 답변으로 9월 16일 있은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에서 한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의 메시지는 정확히 어떤 내용인가
▶““한반도 정세가 전반적으로 호전됨에 따라 한국과의 경제교류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입니다”라는 짧은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러시아출발 이틀 전 게오르기 김 동양학 연구소 수석부소장, 아르바토프 미국·캐나다연구소장, 루킨 차관보가 “가까운 장래에 고르바초프가 극동지역을 방문하는데 그 때 한국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 귀뜸해 줬다. 귀국 후 이 사실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는데 크라스노야르스크 연설이 나올 때까지 무척 가슴을 졸였던 생각이 난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러시아 방문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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