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의 수교 비사

[염돈재의 외교이야기 마지막]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윤희 기자입력 : 2018.03.21 11:11


▲염돈재 교수/사진=더리더
1992년 8월 이루어진 중국과의 수교는 한·중 양국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를 바꾸어 놓은 극적인 사건이었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중요한 이벤트였다.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핵심 실무 역할을 담당했던 염돈재 교수를 통해 뒷얘기를 들어본다.


-중국과의 수교는 러시아보다 1년 늦은 1992년 8월 이루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은 러시아의 개혁·개방정책, 북·중 관계, 러시아의 전략적 가치 등을 고려해 러시아와의 수교 노력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기로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인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북방정책은 국가별로 우선순위를 정해 추진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 여건이 되는 대로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헝가리와의 수교가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여건이 가능했기 때문이며 중국과의 수교가 늦어진 것은 여건이 안 됐기 때문이다.”

 
-북방정책 초기 핵심 역할을 한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에 소극적이다가 정무장관 퇴임 후 활동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노 대통령 지시 때문이었다. 박철언 보좌관이 헝가리와의 수교와 러시아와의 접촉에 성공하자 중국과의 관계개선 문제는 처남인 김복동 장군에게 좀 맡겨 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대통령 친인척으로 정치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 같다.”


-서울올림픽 이전까지 러시아와의 접촉은 거의 없었던 반면, 중국과는 1983년 중국 민항기 피랍 및 춘천 불시착 사건, 서울아시안게임 등으로 관계가 많았는데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어려웠던 이유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이 본격화되지 않아 중국이 정부 간의 접촉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많은 중국 전문가들이 중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 때문에 한국과는 수교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해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먼저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86서울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90베이징아시안게임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중국인들이 우리 발전상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중국인의 눈에는 기적이었고 특히 중국정부는 88올림픽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 경험 전수와 베이징아시안게임 준비 지원을 원해 민간분야 교류가 대폭 확대됐다.”


-정부 간 접촉 이전에 민간분야에서 많은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88서울올림픽 이후 선경, 고려합섬,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대우 등 기업들이 각종 인맥을 동원해 중국과 접촉해 왔고, 준정부 기관으로는 무역진흥공사(KOTRA·코트라)가 1989년 초부터 중국 국제신탁공사(CITIC)와 접촉했다. 개인으로는 김복동 국제문화전략연구소 이사장이 중국국제신탁공사와 접촉했고, 박철언 의원이 중국정부 초청으로 90베이징아시안게임을 참관하고 중국국제우호연락회 측과 접촉했으며, 88장애인올림픽 실무부위원장이던 김한규 의원이 베이징아시안게임 준비 지원을 위해 장바이파(張百發) 베이징부시장과 접촉하는 등 다양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1989년 3월 코트라 이선기 사장이 베이징에서 무역사무소 설치 교섭을 한 후 5월에 다시 서울에서 회담을 했으나 중단되었다가 1990년 10월 무역사무소 개설에 합의했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이 회담은 1989년 1월 중국 측 제안으로 코트라와 중국국제상회(CCOIC) 간에 이루어졌는데 우리는 포괄적인 명칭 사용과 정부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인데 중국 측은 양 기관 사무소 명칭 사용과 양 기관 간 합의 형식을 주장해 교섭이 중단됐다. 특히 우리 측은 천안문 시위가 격화돼 협상 중단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 협상을 진전시키지 않았는데 예상대로 곧 이어 천안문 사태가 발생해 협상이 중단됐다.”


-무역사무소 설치에는 선경 이순석 사장이 밀사 역할을 했다는데 그 배경은
▶“선경이 1989년 12월 로비 목적으로 리셴녠(李先念) 전 국가주석의 막내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 부부를 한국에 초청했는데 당시 선경은 몰랐지만, 그는 톈지윈(田紀雲) 부총리가 맡고 있던 당 정치국 남조선 업무 영도소조의 일원이었다. 그 후 무역사무소 설치 협상이 교착되자 톈지윈 부총리가 류야저우를 통해 이순석 사장을 만나 중국정부가 노 대통령에게 전하는 공식 메시지라면서 무역대표부 설치 제안을 한국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국 측은 노 대통령 사돈 회사인 선경 라인을 통해 노 대통령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사돈 회사를 통해 메시지를 받았으니 교섭은 급진전됐을 것 같다
▶“아니다.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중국은 천안문 사태 이후 9월 아시안게임 개최에 전념하느라 교섭이 지연됐고 그 기간에 우리 정부는 대회 운영에 관한 기술적 지원 외에 승용차 700대, 복사기 100대 등 많은 물질적 지원을 했다. 중국 측 제의에 따라 아시안게임 후 외무부 김정기 아주국장이 코트라 부사장 자격으로 대표단을 인솔, 베이징에서 협상을 벌여 10월 20일 베이징에서 이선기 코트라 사장과 정홍예(鄭鴻業) CCOIC 회장 간에 무역사무소 개설합의서가 서명됐다.”


-무역사무소의 지위 등 우리 정부가 희망했던 사항들이 잘 관철됐나
▶“비교적 잘 관철됐다. 이 합의서가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은 것임을 명시했고 사증 발급 업무 수행, 주재국 정부 당국과의 접촉 및 교섭기능 부여, 대표부 직원에 대한 외교특권 부여, 외교행낭과 암호통신 사용, 대표부 및 직원에 대한 세금 및 공과금 면제 등을 규정해 외교공관과 유사한 지위를 갖게 됐다. 천안문 사태로 대외관계 개선이 급해진 중국 측이 많이 양보한 편이다.”


-그 외에도 우리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많이 노력했다는데
▶“노태우 정부 출범 후 많은 노력을 했다. 88서울올림픽 후 하와이대 동서센터 조이제 소장과 그의 지인인 송젠(宋健) 중국 국무원 부총리를 통해 노 대통령의 친서를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에게 전달했다.
1989년에는 박철언 보좌관 요청으로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이 중국국제우호연락회 진리 상근 부회장을 통해 노 대통령의 친서를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전달했다. 1989년 이후 외무장관 회담 가능성을 계속 타진했으나 중국 측은 여건이 안됐다고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노 대통령 자서전에는 위의 친서 관련 내용이 없고 친서가 전달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데
▶“조이제 소장과 장치혁 회장의 경우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이 한·중 수교 후 수교훈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기록도 부정확한 경우가 있다.”


-정부 간 접촉 계기는 어떻게 조성됐나
▶“1991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유엔 아·태지역 경제사회위원회(ESCAP) 총회 때 이상옥 외무장관이 중국 외교부 류화추(劉華秋) 부부장과 만나 남북한 유엔 가입과 한·중관계 발전에 대한 입장을 전달했고 중국 측은 1992년 ESCAP 총회의 베이징 개최에 지지를 요청해 우리가 적극 도왔다. 1991년 9월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한 후 유엔본부에서 이상옥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부장 간의 회담이 있었고 두 달 후 11월 첸 부장이 아·태경제협력체(APEC) 각료회의 참석 차 서울에 와서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1992년 제48차 ESCAP 회의 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한 이 장관에게 첸 부장이 비밀 수교교섭을 제의해 수교 절차가 급속히 진행됐다.”

 
-첸치천 장관 회고록에 의하면 한국 측이 수교 교섭을 먼저 제의했다고 돼 있는데
▶“두 분의 얘기가 모두 맞는다. 우리가 오랫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수교를 제의했으니 첸 장관의 말도 맞고, 공식으로 비밀수교 교섭을 제안한 것은 첸 장관이니 우리 측의 얘기도 맞는다.”


-중국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는
▶“1992년 1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개혁·개방정책을 명백히 천명해 해외시장 개척과 대아시아 외교 강화가 중요한 과제가 됐다. 남북한이 모두 유엔에 가입해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른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덩샤오핑은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의 수교 결심을 굳혔고, 특히 포항제철(POSCO)과의 협력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과도 20억 달러 경협을 약속했다는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는데
▶“1988년 12월 중국 정부가 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CITIC) 국제연구소 화티(華梯)에게 왕전(王震) 부주석의 보증서한을 휴대시켜 김복동 장군에게 20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요청했다. 우리 정부가 극비리에 검토했으나 양국 관계 발전 시까지 유보키로 결정해 끝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중국과의 수교 통보 후 대만 측에서 흘려 퍼지게 됐는데, 당시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500억 달러로 우리보다 훨씬 높아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과의 수교 이전 한국정부의 밀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아 큰 혼선이 있었다는데
▶“노 대통령의 임기 내 수교 의지가 워낙 강한 데다 각계의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 과당경쟁과 혼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기관으로는 외교부, 안기부, 코트라가, 정계에서는 김복동 장군, 박철언 의원, 김한규 의원, 민간분야에서는 선경 이순석 사장, 고려합섬 장치혁 회장, 하와이대 동서센터 조이제 소장 등이어서 혼선 가능성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박철언 회고록 내용처럼 박철언 의원이 중국 고위층을 접촉하려는데 서동권 안기부장이 훼방을 놓고, 선경측이 접촉하고 있는 류야저우를 서동권 부장이 방한 초청한 것이 중국 측으로서는 좀 혼란스러웠을 것 같다.


-중국과의 수교 과정에서 전통 우방인 대만 측에 3일 전에 통보해 대만정부가 크게 분노했다는데
▶“대만 측이 좀 과장했다. 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거듭 천명했고 1991년 5월 이후 이상옥 장관이 여러 차례 학술회의 등에서 한·중관계 개선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했다. 이 장관을 비롯한 외무부 간부들은 설명을 요구하는 중화민국 대사관 관계자의 면담 요청을 거의 대부분 수용했고 수교 발표 1주일 전과 3일 전에 두 번 통보했다. 대만 측의 불만은 대사관과 영사관 부지 중국 이관, 단교 후 중화민국 국호 사용 거부여서 국제관례상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미국과 일본은 언제 대만 측에 통보했나
▶“일본은 10일 전에, 미국은 몇 시간 전에 통보했고, 중국은 2주 전인 8월 초 첸치천 외교부장을 북한에 파견해 통보했다. 러시아는 한국과의 수교 1개월 전 북한에 통보했다. 그러나 대만 측이 특히 분노한 것은 노 대통령이 1991년 11월 중국 입법원장 일행 접견 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옛 친구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것인데, 국가 지도자가 당면한 입장 모면을 위해 지나친 수사(修辭)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現 건국대 초빙교수
1943년 8월 27일, 강원도 강릉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박사
청와대 비서관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부소장
국가정보원 제1차장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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