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 승리에서 본 신뢰와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입력 : 2018.03.12 17:40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연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역사에 길이 남은 살수대첩

우리나라 전쟁 역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612년 수나라 30만 대군을 격퇴한 살수대첩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살수대첩의 영웅으로 을지문덕 장군이 널리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고구려를 보존하고, 수나라 군사를 거의 다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조선의 경세가인 양성지는 1458년 국가에서 제사 지내야 할 인물로 고구려 26대 영양왕(591~618)을 비롯한 12명의 왕과 을지문덕 등 24명의 신하들을 추천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우리 동방을 강국으로 여기어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한 것은 을지문덕이 남긴 공적이었다”고 칭송했다. 

20세기 초 의병들이 부른 ‘용진가’에도 “한산도에 왜적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 백만 몰살하오신 이순신과 을지공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라며 을지문덕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이처럼 을지문덕은 이순신과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김부식의 말처럼 그가 고구려의 위기를 거의 혼자 힘으로 구해냈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가 고려 혹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적의 대군과 맞서 싸우는 장군이었다면, 살수대첩과 같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끈 청야전술
을지문덕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방법은 청야전술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청야전술은 을지문덕이 처음 실시한 것은 아니다. 

서기 172년 후한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해왔을 때의 일이다. 당시 고구려 재상 명림답부는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는 퇴각하는 한나라 대군을 좌원전투에서 대파했다. 명림답부가 을지문덕보다 앞서 청야전술을 실시했던 것이다.

살수대첩 상상도 - 전쟁기념관 소장
투르크 말에 투란(Turan)전술이라는 것이 있다. 투란전술은 척후―유인―매복―기습으로 구성된다. 기원전 200년 전한의 고조 유방은 32만 대군을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에서는 척후병을 보내 한나라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유인책을 실시했다. 흉노의 묵돌선우는 정예 부대를 숨겨두고 패하여 도망치는 것을 가장하여 한나라 대군을 깊이 유인했다. 그러다가 평성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매복해 있던 묵돌의 대군이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한나라 고조를 백등산 위로 몰아 놓고 포위했다. 결국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흉노뿐만 아니라, 돌궐, 오토만제국 등 유목제국들이 농경제국과 전쟁을 할 때 이 같은 전략을 자주 사용한다. 환경의 차이에 따라 작전 전개 형태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적군을 지치게 한 후 기습해 승리한다는 점은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수나라 대군을 상대할 때 사용한 청야전술도 단순히 투란전술의 복사판에 불과할까. 

고구려의 작전
612년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무려 113만3800명의 대군을 동원했다. 군량 수송을 맡은 자들이 군사들의 배가 되었다고 하니, 당시까지 전 세계에서 단일 전쟁에 동원된 가장 많은 병력이었다. 현재 북경 부근에서 군대를 출발하는 것에만 40일이 걸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기 때문에, 수나라는 군량 보급 등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맞서 고구려에서는 적군을 지치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수립했다.

먼저 요하에서 수나라 대군의 진격을 1개월이나 지연시켰다. 또 수나라 수군이 수나라 육군에게 군량을 보급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평양 부근까지 진격해오자, 먼저 이들을 유인했다. 뒷날 영류왕이 되는 고건무 장군의 지휘 하에 평양성 전투에서 수나라 해군을 격퇴해 식량 보급을 끊어 버렸다. 또 수나라 대군의 본진을 요동성에서 수개월간 막아냈다. 고구려의 성 하나도 점령하지 못한 것에 조바심이 난 수나라 양제는 30만5000의 별동대를 동원해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게 했다. 

별동대는 요하 서쪽인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출발했는데, 100일분의 식량과 갑옷, 각종 무기와 장막, 공성 무기 등을 모두 군인들이 짊어지기나 끌고 와야만 했다. 1인당 3석 이상의 짐을 가져와야 하는 병사들은 너무 힘들어 구덩이에 군량을 일부러 파묻고 진격했다고 하지만, 군량 부족을 패전의 이유로 삼으려는 핑계일 수도 있다. 

30만5000 별동대에 대항하는 고구려군의 지휘자 을지문덕은 오골성 주변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저들의 치중(輜重) 부대를 공격했다. 치중부대는 식량과 무기, 장막, 의복, 공성 무기 등을 담당한다. 이들을 공격한 것은 적의 군량과 공성 무기를 없애 청야전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을지문덕은 적군이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직접 적진을 찾아갔다. 그는 적장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항복하는 조건을 협상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적군의 허실을 파악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수나라 양제는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을 만나면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그럼에도 을지문덕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적진에 직접 찾아갔으니, 보통 대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을지문덕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청야전술을 구사했다. 적이 진격하는 길목에 있는 성의 군사들에게 적극 대항하지 않도록 시키고, 그 대신 적의 보급로를 끊는 기병을 보내 적과 맞서는 정도의 소극적인 대응만 하게 했다. 또한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 다 져주도록 했다. 적군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적군이 고구려 내부로 진격할수록, 그들은 굶주려야 했다. 그들은 거듭된 작은 승리에 교만함이 생겨나,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몰랐다. 유인작전에 말려든 적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까지 진군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을 우롱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별동대에는 식량 못지않게 성을 공격할 무기가 마땅히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을지문덕이 적의 치중부대를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은 충차, 운제, 발석차 등 공성용 무기가 없이는 절대 함락할 수 없는 튼튼한 성이다. <손자병법> ‘군쟁’편에는 “군이란, 장비와 보급품(치중)을 잃으면 망하고, 군량의 보급이 없으면 망하며, 물자의 비축이 없어도 망하게 된다”고 했다. 

승산이 없음을 안 적군은 마침내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구려는 반격을 시작했다. 7월4일 적군이 살수를 건너려 할 때 총공격을 감행했다. 적의 후군(後軍)이 궤멸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수나라 군사들은 저마다 살겠다고 서둘러 강을 건너려고 발버둥을 쳤다. 군대의 질서는 한번 무너지자 걷잡을 수가 없었다. 수나라 군사들을 저마다 살기 위해 하루 만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도망쳤다. 이렇게 오합지졸로 도망가니 대부분의 수나라 병사들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적군 30만5000 가운데, 적의 본진이 있는 요동성 인근까지 돌아간 군사들은 불과 2700명뿐이었다. 무려 99.1%가 궤멸된 것이다. 세계 전쟁사상 이처럼 압도적으로 승리한 사례는 흔치 않다.

살수대첩 승리의 진정한 주역
적군을 유인한 후, 적군이 아무런 성과 없이 퇴각하게 한 후,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단숨에 일망타진하는 을지문덕의 작전은 <병법 36계>의 제28계인 상옥추제(上屋抽梯-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우기)와도 비교될 수 있다. 또 군사적 천재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부자에 의해 창안된 ‘망치와 모루’ 전술과도 다소 닮았다. 이 전술은 고착과 견제, 그리고 우회와 기동을 조합하여 적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전술은 을지문덕의 작전에 대입한다면, 모루는 적의 주력을 주춤하게 하는 평양성이 될 것이고, 망치는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는 고구려군이 될 것이다. 적을 수도 부근까지 끌어들인 작전은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작전이다. 그럼에도 을지문덕이 이 작전을 사용한 것은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을지문덕 흉상
북한이 2003년에 발행한 을지문덕 기념주화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강력한 성들이 적군이 공략할 수 없는 모루임을 확신하고 적을 깊숙이 유인한 것이다. 하지만 성벽이 튼튼한 것보다 중요한 점은 성을 지키려는 군민들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7세기 중반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이유를,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내부에 틈이 없었던 탓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612년 당시 고구려 사람들은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갖고 적과 대항했다.

청야전술은 을지문덕 혼자의 힘이 성공한 것이 결코 아니다. 청야전술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농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실시하기가 매우 어렵다. 유목민은 적이 쳐들어왔을 때에 초원을 비워두고 후퇴하면서 적을 유인할 수 있다. 초원이 전쟁터로 사용된다고 해서, 유목민들의 경제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가축을 풀어놓으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은 다르다. 농사를 짓기 위해 논과 밭을 일구는 데 많은 투자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지는 시기가 농번기일 경우, 논과 밭에 심어둔 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짧은 기간에 끝나거나, 적군의 습격 정도라면 모를까 612년 수나라 30만5000 대군의 진군을 목격한 농민들에게는 그해 농사를 다 접어야 하는 엄청난 부담이 있었다. 그럼에도 고구려 농민들은 들판을 비우고 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는 청야전술에 적극 동참했다. 그들은 고구려의 리더들을 신뢰하고 따랐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수대첩은 을지문덕 개인의 힘이 아닌, 고구려인들 모두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다.

백성들이 신뢰한 고구려 리더들의 리더십
612년 고구려를 침략해온 적군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숫자였다. 그런 적군과 상대하는 고구려 사람들은 두렵지 않았을까.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고구려의 영양왕과 을지문덕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따랐던 것은 왜일까?

그것은 고구려인들이 고구려의 리더들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26대 영양왕은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위협하자, 자신이 직접 말갈군 1만 명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전진기지인 영주를 공격했다. 왕이 적진 깊숙이 쳐들어가 적과 맞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598년 1차 고-수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또 영양왕의 이복동생 고건무는 612년 평양성 전투를 직접 지휘해 적군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왕과 왕의 동생이 직접 전쟁에 나가 용감히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가 있었다.

을지문덕은 612년 고-수 2차 전쟁에 앞서 수많은 전공을 쌓은 인물이었다. 비록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전쟁에서 승리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수나라에서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의 명장이었다. 고구려 육군 총사령관인 그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적진에 직접 뛰어들어 적 상황을 파악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대담한 일이다. 그가 목숨을 내걸고 용감하게 적과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적과 맞서 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청야전술을 펼칠 때 누군가 배반하여 적에게 식량을 나눠주거나, 고구려의 작전이나 약점을 적에게 알려주었다면 고구려는 멸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구려인 가운데는 그런 배신자가 나오지 않았다. 적에 항복하거나 배신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심리적 저항이 워낙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심리적 저항감은 고구려인들이 가진 강한 구성원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리더들을 믿고, 이웃을 믿고,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의 농토가 파괴되는 엄청난 희생을 각오하고 청야전술에 동참했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82년 조선 9대 왕 성종이 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인 진현시에서 책문의 제목을 이렇게 제시했다. 

“내가 ~ 나라를 보존하고 변방을 방비하는 계책을 생각하고 있음에도 그 요령을 알지 못하겠노라. 돌이켜보건대 우리나라는 남방과 북방에서 적국의 침입을 받았었다. 그러나 고구려에 있어서는 수나라와 당나라와 능히 대항하여 천하에서 강국으로 일컫게 되었으니 그 적국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계책이며 어떤 인재들이었는가?”

이 문제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라면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인 계책이며,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솔선수범의 리더십을 가진 인재들이라고 할 것이다. 고구려가 단지 무예를 숭상하는 나라였기 때문에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나라에 빈틈이 없는 신뢰도가 높은 사회였기 때문에 강국이 되었던 것이다.

김용만 소장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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