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는 남자를 위하여

[박미산의 맛있는 시읽기]

서울디지털대학 박미산 교수입력 : 2018.06.28 09:50
/그림=원은희
백수광부에게 보내는 연서

- 문정희

늘 먼 곳만 바라보는 사나이
슬픈 노을만 그리워하는 사람
아침부터 술로 온 가슴 불 지르고
따습고 편한 것은 모두 버리고
흰 머리칼 강바람에 허위허위 날리며
끝 모를 수심 속으로 빠져들었네

바람의 혼에서 태어났는가
귀밑머리 풀고 만난
아내의 손목조차 견디지 못해

광풍에 덜미 잡혀 떠도는
백수광부, 고조선 땅 내 애인이여

오늘 서울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만나
황홀한 몰락에 동행하고 싶구나

강 건너 그대 아내 땅을 치고 울더라도
눈부신 노을 함께 삼키고 싶구나


남자는 흰 머리칼을 강바람에 허위허위 날리며 강변에 앉아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있다. 늘 먼 곳만 바라보고 슬픈 노을만 그리워하는 남자는 술을 마시며 천 길 푸른 수심 속으로 빠져든다. 바람의 혼에서 태어난 사내의 그 투명한 자유.
따습고 편한 것은 모두 버리고 귀밑머리 풀고 만난 아내의 만류에도 왜 그는 술을 마시고 있는가?
세상의 광풍에 덜미 잡혀 살아야 하는 사나이의 삶.
사내는 자식과 아내에 덜미 잡혀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식구들 밥을 사기 위해 살아야 한다. 가장의 삶을 살면서 어느새 뜨거웠던 심장의 온기도, 팔팔했던 자존심도 사라지고, 검었던 머리카락은 어느새 하얗게 세어있다.
필사적으로 살았던 세월이 지나간 후, 초라하고 쓸쓸해진 사내.
사내는 아침부터 술로 온 가슴 불 지르며 눈부신 노을과 함께 술을 들이켜고 있다.
절대 미궁의 황홀한 몰락 앞에서도 원초적인 꿈을 마시는 백수광부!
사람의 삶이란 어차피 덧없는 것임을 아는 사내는 술을 마시지 않고 어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권력과 부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나 아무것도 없이 빈손으로 사는 사람이나 죽음의 강을 건너갈 때는 결국 다 같이 쓸쓸하고 초라할 수밖에 없다.
백수광부의 아내여!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소.(公竟渡河·공경도하)
땅을 치고 울지 말고 오늘 서울 어느 골목에서 그를 만나 황홀한 몰락에 동행해 보는 것이 어떨지.

박미산 교수
서울디지털대학 초빙교수
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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