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영웅 문무왕의 리더십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입력 : 2018.07.30 13:56
편집자주천년의 왕국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제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고구려, 백제가 아닌, 삼국 가운데 가장 약소했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주변 강대국들을 상대하며 자국의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신라는 대한민국이 본받아야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삼국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많은 이들이 노력했지만, 신라 역사상 최고의 인물인 문무왕의 탁월한 리더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리더십을 알아보자.
김춘추의 위험한 도박

신라의 삼국 통일은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642년 백제가 신라 서부 방어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켰을 때, 대야성 성주 부부가 죽었다. 그런데 이들은 신라의 왕족 김춘추의 사위와 딸이었다. 김춘추는 딸의 죽음을 보고 백제에 대한 복수를 결의했다. 이때 신라는 백제에게 40여성을 빼앗겼지만, 당장 백제에게 복수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김춘추는 백제를 협공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 김춘추는 새로 권력자가 된 연개소문과 만났지만, 도리어 객관에 갇혀 돌아오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결국 고구려에게 과거 신라가 빼앗은 죽령 이북의 땅을 되돌려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서 풀려날 수 있었다. 고구려마저도 원수로 만드는 외교적 실책을 저지른 김춘추는 647년 백제와 친했던 왜국을 방문했다. 왜국에서는 그가 용모가 수려하고 화술이 뛰어나다고 했지만, 김춘추에게 설복당하지 않았다. 왜국과의 외교 역시 실패로 끝났다.

그러자 김춘추가 최후의 희망을 품고 당나라로 가서 당태종을 만났다. 김춘추는 비록 절박한 심정으로 당나라를 찾아갔지만, 무턱대고 당나라에 원병을 청한 것은 아니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나라는 645년 고구려와 전쟁에서 참패한 후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당태종에게 김춘추는 먼저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면,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군량과 군사를 내어 돕겠다고 제안했다. 당태종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 나라의 동맹은 처음부터 대등한 관계는 아니었다. 동맹이 절박한 쪽은 신라였기에, 649년에는 당나라 의관제도를 채용하고,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를 받아들여 사용했다. 

김춘추에게는 고구려 연개소문에게는 없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하나는 김유신이라는 벗이었고, 또 하나는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들 김법민이 있었다. 김유신은 가야인의 후손으로 신라에서 비주류의 인물이었다. 김유신은 뛰어난 전공을 바탕으로, 김춘추의 충실한 도우미를 자처했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김춘추는 혼인을 했다. 김춘추는 처남 김유신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비담의 난 등을 제압하고 권력을 잡아 654년 즉위하여 신라 30대 무열왕이 된다. 

655년 고구려가 백제,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내어 신라 북쪽의 33성을 빼앗았다. 무열왕은 즉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659년에도 백제가 공격해오자, 또 당에 원병을 청했다. 하지만 당군이 원군을 보내오지 않자, 김춘추는 몹시 근심했다. 당시 신라는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드디어 660년 3월 당나라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김춘추의 차남 김인문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13만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해왔다. 이때 당나라는 무열왕을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당군을 도우라고 칙명을 보내왔다. 신라왕이 당나라 장군의 부하이고, 자신의 아들보다 낮은 총관직으로 전쟁에 참여하라는 요구는 분명 굴욕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공격했다. 6월 21일 신라와 당군은 덕물도에서 만나 작전을 협의한 후, 7월에 백제를 총공격하여, 마침내 7월 18일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냈다. 8월 2일 승전 잔치에서 무열왕은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의자왕의 항복의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18년 전 대야성 전투에서 자신의 딸과 사위를 죽게 만든 검일이란 자의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져버리는 복수를 했다. 

김춘추는 의자왕의 항복을 받았지만, 백제 땅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백제 땅에 1만 명만 남겨놓고 철군했다. 백제 지역 곳곳에서 백제 부흥전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복신과 도침, 부여풍, 흑치상지 등이 이끈 백제 부흥군은 백제 지역 곳곳을 회복했다. 백제 땅을 완전히 병합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라마저 병합하려는 야욕을 가진 당나라를 끌어들인 무열왕은 661년 6월 죽고 말았다. 백제 통합과 고구려 멸망, 당군 축출이라는 엄청난 과제는 오롯이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 즉 문무왕의 숙제로 남겨졌다. 

문무왕이 시신을 화장한 곳으로 전하는 능지탑/사진=김용만 제공
서둘지 않고, 굴욕을 참고 기다린 문무왕
문무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사이에서 626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정치에 나섰다. 그는 650년 아직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655년에 태자가 된 그는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661년 6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아직 상중이던 문무왕에게 당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니, 원군을 보내라고 요구해왔다. 아직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문무왕은 당장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김유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하지만 당군의 출전이 지연되는 가운데, 8월에 백제 부흥군의 저항을 받게 되자, 백제 부흥군부터 공격했다. 문무왕은 당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척 하면서, 당장 신라에게 절실한 백제 부흥군 제압에 나섰던 것이다. 그는 더 크게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662년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군에게 필요한 군량을 신라에서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명하여 수레 2천여 대에 쌀 4천 섬과 조 2만 2천여 섬을 싣고 평양으로 가도록 명했다. 신라군은 고구려군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전면전은 피했다. 신라군은 당군에게 식량을 넘겨주고 곧장 철군했다. 662년 고구려와 당의 2차 전쟁에서 당군은 처참하게 패했다. 신라는 이때 고구려와 전쟁에서 피해를 최소화했다.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보다 백제 부흥군 제압이 급했다. 663년 8월 당나라는 백제 부흥군을 멸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고, 문무왕 역시 김유신을 비롯한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백제 부흥군의 중심인 주류성을 공격했다. 그해 8월 말 신라-당 연합군은 백강 전투에서 백제-왜 연합군은 크게 물리쳤다. 이어서 9월에는 주류성을 함락시켰다. 문무왕은 의복을 만들어 웅진에 있는 당나라군에게 제공해주고, 수도인 계림(금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임명했다. 게다가 멸망한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664년 2월 당의 칙사 유인원과 함께 맹약을 하라고 명했다. 665년 8월 문무왕은 당의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맹약을 했다. 망한 나라의 왕자와, 신라 임금이 동등한 자격으로 당의 신하가 보는 앞에서 맹약한 것은 신라로서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당나라의 강요에 의한 맹약은 신라가 옛 백제 영토를 함부로 점령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당나라는 신라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동맹국이 아니라, 속국처럼 취급하며 힘들이지 않고 옛 백제의 땅은 물론 신라 땅마저 지배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문무왕은 굴욕을 꾹 참고, 때를 기다렸다.

문무왕 무덤으로 알려진 대왕암 - 그는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되겠다며 화장한 후 뼈가루를 동해에 뿌려달라고 했다 /사진=김용만 제공
당과의 정면 대결
666년 고구려에 큰 분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이 아들 연남생이 권력다툼에 패해 당나라에 투항했고, 그의 작은 아버지 연정토가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마침내 당과 신라는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668년 6월 문무왕은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신라군은 여러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해 그해 9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김춘추와 당태종이 처음 합의한 것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평양 이남은 신라가, 그 이북은 당나라가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문무왕은 당장 고구려 지역으로 깊숙이 군대를 보내 영토를 넓히는 것보다,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백제 옛터를 완전히 신라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급했다. 그러자 670년 1월 당고종은 신라 사신을 감옥에 가두고,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한다고 힐책하기도 했다. 670년 3월 문무왕은 사찬 설오유로 하여금 고구려 부흥군을 이끌고 있는 고연무와 함께 당군과 맞서 싸우게 했다. 그리고 6월에는 고구려 부흥군을 이끌고 있던 안승을 맞아들여 왕으로 삼아 신라편으로 삼았다. 

문무왕은 한편으로는 백제 부흥군을 제압하는 한편, 그들을 포용하고 백제 땅에서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671년 5월 석성 전투에서 당군 5,300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자, 당나라는 신라가 당나라에 배반하지 말라며, 만약 당에 대항하면 멸망시킬 것이라고 협박을 해왔다. 그러자 문무왕은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를 주겠다는 당태종의 약속을 거론하고, 신라가 당나라에 바친 충성도 크다면서 당나라가 백제 땅을 되돌려주지 않고 다시 백제를 세운다면, 100년 후에는 신라는 그들에게 멸망하고 말 것이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백제 땅을 정벌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결코 당나라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그해 9월 4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공격해왔다. 그러자 문무왕은 군사를 내어 당나라 운반선을 공격하여 당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672년 8월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이 패배하자, 문무왕은 지난번과 달리 당나라에게 사죄하는 글과 은, 구리, 우황 등 각종 선물을 보냈다. 굴욕적일 만큼 철저하게 당나라에게 머리를 숙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느라 엄청난 국력을 낭비한 당나라는 새롭게 강자로 등장한 토번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특히 670년 대비천 전투에서 토번(티베트)군에게 대패를 당했고, 당나라 수도마저 토번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할 때처럼 신라와의 전쟁에서 대군을 동원할 수가 없었다. 

문무왕은 기회를 엿보면서 어제의 적이었던 백제, 고구려 부흥군을 포용해 그들과 함께 당나라와 맞섰다. 673년 호로하 전투 등에서 당군을 격파했다. 당군을 이길 때는 계속해서 싸웠다. 하지만 675년 2월 칠중성 전투에서 패하자, 문무왕은 다시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게 또다시 사죄했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 옛 땅을 거의 다 빼앗았고,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와 군을 삼았다. 그러자 당나라는 거란, 말갈 병사와 함께 다시 쳐들어왔다. 675년 9월 매초성 전투에서 20만 당군을 몰아내었고, 676년 11월에는 기벌포 전투에서 당군을 크게 격파했다. 676년 이후 당나라는 다시 신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면 토번 등의 침략이 우려되는 등 자국에게 이익이 되지 못함을 알고 포기했다. 마침내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문무왕은 당나라가 철군한 이후에도 언제든지 당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꾸준히 대비를 했다. 당나라와 외교관계는 676년 이후 수십 년간 사실상 단절되었다. 문무왕은 당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신라를 위해 충성한 신라의 임금이었다. 문무왕은 681년 7월 죽기 전에 자신은 죽어서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려고 한다면서, 시신을 화장해 동해에 뿌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는 신라의 안전을 위해 죽을 때까지도 최선을 다한 인물이었다.

문무왕 상상도 - 경주 통일전 소장 /사진=김용만 제공
신라 최고의 리더 문무왕
문무왕은 통일전쟁 수행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진골세력을 군사적인 이유로 제거하고, 6두품 이하 하급귀족들을 관료로 대거 등용했다. 신라 조정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았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을 적극 포섭했다. 675년 신라의 북쪽 변방 아달성 전투에서 목숨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소나는 9위 급찬에 불과한 아달성 태수의 명을 받는 낮은 신분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문무왕은 소나가 충성과 의리를 보여주었다면서 그를 3위 잡찬 관등에 추증했다 비록 죽은 이에게 명예 관직을 내린 것이지만, 4~5두품에 불과한 자에게 왕족인 진골 신분이야 얻을 수 있는 잡찬에 임명한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포상이다.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울 충성스런 자들을 얻기 위해서 그는 포상을 아끼지 않았고, 공정한 포상을 했다. 전쟁의 시대에 백성들의 삶은 대단히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검소하게 살았다. 그의 무덤 역시 화장을 하고 검소하게 만들라고 했다. 그는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한 배려에도 크게 신경을 썼다. 그 결과 당나라를 몰아낸 후, 신라는 200년 이상 평화를 누리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가 내부 단속을 잘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는 것만으로 좋은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었고, 나아감과 물러설 때를 잘 알았다. 그는 명분보다 실익을 추구했고, 신라의 미래를 위해 굴욕을 참고 견딜 줄 알았다. 그는 아버지 무열왕처럼 무모하지 않았고, 연개소문처럼 꼿꼿하기만 하지도 않았다. 그는 당나라와 정면으로 싸우다가도, 필요할 때면 머리를 숙였고, 다시 신라의 이익을 위해서 맞서 싸우는 등 능수능란하게 강대국과 맞서 나갔다. 그는 탁월한 병법가처럼 당나라와의 외교를 풀어갔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통일신라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김용만 소장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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