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대한 환상과 남북관계 판타지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반복되는 뉴스가 있다. ‘해외 여행객 신기록 돌파.’ 매년 해외여행 신기록 경신에 크게 일조하는 여행지가 유럽이다. 유럽은 여행객들에게 선망의 지역이고, 판타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공짜로 주는 물을 적게는 1유로 80센트에서 많게는 3유로라는 비싼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고, 깨끗하지도 않은 화장실을 가는 데도 50센트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곳이 유럽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관광객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 유럽 각국들이 밀려오는 관광객들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제도적인 통제를 시도하거나 시행하고 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8월13일자에 그 내막을 특집 ‘투어리즘 트랩(Tourism Trap)’으로 게재했다.

“유럽 대륙은 테마파크가 되었다. 2017년의 경우 무려 6억7000여만 명이 유럽 각국을 여행했다. 세계 관광객의 51%를 유럽이 점유하고 있다. 미국으로 향하는 관광객은 강한 달러의 영향으로 줄고 있고, 1570여만 명의 미국인들이 유럽을 다녀갔다. 이에 유럽의 일부 도시는 반관광 데모까지 벌인다. 스페인 마요르카(Mallorca) 시민들은 7월14일 ‘관광이 마요르카를 죽인다’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의 경우, 쇄도하는 관광객들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목욕할 때 입는 옷을 걸쳐 입고 다니는 관광객들에게 벌금을 물리거나, 도심에 호텔 신축도 제한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당 주변은 유원지(amusement park)가 된 지 오래다.

<왕좌의 게임>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는 2017년부터 일일 방문객을 8000여 명 선으로 제한하고 있다. 매년 600여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암스테르담은 당근과 채찍 정책을 병행하고 있다. 비어바이크(beer bikes)와 같은 모바일 바를 금지했다. 동시에 잔드보르트(Zandvoort)같이 사람들이 덜 몰리는 지역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려 하고 있다. 베네치아는 일시적 체크포인트 제도를 도입해 혼잡지역에 일일 관광객들이 몰리지 않도록 통제한다. 동시에 호텔 신축이나, 테이크아웃 레스토랑 허가를 제한하고 있다. 한편 유명 관광도시 거주민들의 불만도 커져가고 있다. 도시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역사가 숨 쉬는 도심은 관광객들을 위한 음식점이나 상가로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거주민들은 정든 집을 팔고 도심 외곽으로 이주한다. 베네치아의 경우 17만5000여 명이던 도심 거주민들이 5만50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필자가 <타임>지의 기사 내용을 대략적으로 인용한 것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과 냉정한 현실세계의 괴리를 지적하려는 의도에서다. 필자 역시 유럽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8월 초 가족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 및 잘츠부르크로 떠난 자유여행은 유럽 환상을 깨는 데 일조했다. 빈의 외곽, 다뉴브 강가에 있는 5층짜리 작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3일 동안 주로 지하철을 타고 빈 시내를 둘러보았다. 여행 둘째 날 슈타디온이라는 곳에서 탑승한 지하철에서 40대 초반인 듯한 두 아이의 엄마가 필자에게 취한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지하철 문 옆에 서있던 필자에게 손을 휘저으며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하고, 비켜준 데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보면서 유럽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기념관은 33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 몇 대만을 틀어 관광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을 보고 ‘유럽의 오만’도 느끼게 되었다. 필자를 실망시킨 또 하나는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였다. <타임>지의 기사를 보도한 매체가 하나도 없었으며, KBS <배틀 트립> 같은 여행 프로그램은 평범한 잘츠부르크 미라벨 정원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 장소였다는 이유로 실제보다 부풀려 환상을 불어넣고 있었다. 실상을 정확히 보도해야 할 언론이 여행사 광고를 의식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외면하는, 언론 본연의 자세를 저버리는 행태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나아가 ‘판타지’라는 관점에서 한반도 상황에도 대입해 보았다.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이 유럽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듯이 남북관계에도 판타지가 성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그 판타지 중의 하나가 ‘평화 담론’이다. 남북 간 평화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화를 여망하고 정착시켜나가는 노력에는 동의하면서도, 마음 한쪽에 불안한 마음 또한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이나 국가나 그 근원적인 속성은 똑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지 않는가. “저 인간 어릴 때나 똑같네!” 타고난 속성이나 캐릭터는 그 만큼 변하기 어려운 데서 기인한다. 이해관계는 세상사 일처리의 기준이다. 형제 간에도 이익이 상반되고 충돌하면 남과 다름없다. 옛말에도 ‘형제는 잘 두면 형제고, 못 두면 원수’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실주의 이론은 국가도 인간과 같이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한다. 미중 무역전쟁, 이란과의 핵협정 파기 등은 국가도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우선한다는 점을 실증시켜준 사례이다. 남북관계의 경우에도 항구적으로 북한 지도부의 생각이나 심성이 지금 같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구상유취(口尙乳臭)가 아닐까. 주변 사람들 중 힘이 강해지고 지위가 변하면 냉랭하게 변하는 모습을 특히 퇴직자들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재직 시절의 그 많던 인맥이나 전화번호는 필요성이 있을 때 인맥이었지, 그 효용성이 퇴색하는 순간 ‘전화번호 저장창고’로 전락하고 있음을 퇴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된다.

필자는 또한 모 교수가 주장하는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하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로마의 격언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국방을 무시했던 중국 송나라가 그 적절한 사례다. 북방 민족 금나라에 매년 금괴 1100만 개와 비단 1000만 필을 바치는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평화를 돈 주고 구입’했지만, 그 결과는 북송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인간사에서도 경제력을 갖추고 건강함을 갖출 때 주변 사람들이 얕보지 않고 대우해주는 것이지, 경제력도 시원찮고 신체적 건강도 겸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무시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스트리아 빈 여행 중, 무슬림들이 운영하는 시장(게르하르트 거리)을 둘러보는 과정에서 한 아랍계 점원이 “South Korea에서 왔느냐”며 밝은 소리로 묻는 것을 보고, 남한의 국제적 위상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평화에도 적당한 긴장이 필요하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인간의 생존력을 높여주듯이 평화에도 적당한 긴장이 수반되어야 지켜질 수 있다. 진보 학자들이 분단 비용과 분단체제를 비판하지만, 분단에 따른 긴장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남한이 발전했다고 본다. 북한의 위협에도 생존하기 위해 지도자나 국민이 헌신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필자의 염려는 평화를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만 매달려 ‘가드를 무작정 내려놓는 형국(off-guard)’이다. 김정은 정권이 과거와 다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과거 70년간 남한에 대해 자행해온 속성이 근본적으로 변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남북관계도 연애관계와 같다고 본다. 연애하는 순간에는 모든 상황이 황홀하다. 하지만 그 연애가 깨어지는 순간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연애가 다 성공한 경우는 없지 않은가. 연애가 파행되는 경우나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1%의 가능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남북관계라는 연애’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남과 북의 결혼’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판타지에서 벗어나 냉철한 눈과 차가운 가슴도 겸비해야 한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치고, 마오쩌둥(毛澤東)이 현실을 무시한 구름 위를 날아다닐 때, 중국 공산당과 중국의 미래를 고민하고 중심을 잡으려 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같은 ‘절제하고 중심 잡는 현실주의자’가 우리 남한에 필요하다. 유럽에 대한 환상이 유럽인들의 내면 감정을 포착하지 못했듯이, 북한이나 남북관계에 대한 판타지가 자칫 냉엄한 현실과 인간적 속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