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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난 21세기 초반, 정쟁은 정치의 일상사가 되었고, 지식인은 정치냉소주의에 빠졌고, 정치 관심층은 이념의 칼날 위에서 대립하고, 사회는 개인주의 파편화와 분산의 길로 들어섰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정당에 있다.
정당원에 중산층이 없다
민주주의 다당제 정치는 정당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한국 국민이 가장 혐오하는 단어가 ‘당(黨)’이라는 곳이다. 당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치꾼을 자원하는 것이라고 인식한다. 시민이 가장 가기 싫은 곳이 정당 당사다. 뭔가 구린 곳이고, 더러운 음모와 거래 그리고 권위주의가 판치는 곳이고, 공천으로 떼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당사다.
정당법 제22조의 취지에 맞게 일부 교원과 공무원을 제외한 국민들 중에서 민주화에 나섰던 사람들이 얼마나 정당에 가입하였을까? 중산층의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가 영업기밀이니 알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그 정당이 좋아서 당사를 찾아 회비 내고 가입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동적 가입자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중에는 회비를 대납해주어서 가입한 경우도 많다고들 한다.
정치인들은 정당원의 구성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정당법의 규제를 풀어서 일부 공직자, 교원, 군인을 허용하느냐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정당원의 수준이 정당정치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누구와 만나나
지방의회 의원이나 국회의원 그리고 정치 후보자들은 누구를 주로 만나는가? 그들이 만나는 사람을 보면 정치 수준을 알 수 있다. 우리 정치는 실내 토론장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전통시장 골목이거나 역전이다. 시장의 상인들은 일상으로 손님을 맞기 때문에 인사성 있고 항상 미소를 띠고 있다.
정치인들이 전통시장 상인을 자신의 당에 우호적인 상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장 어묵 먹기 수준으로는 정치를 바로 세우기 어렵다. 열린 공간에서 작동하는 언사는 극단적일 것이고 태도는 투박해질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정치 현실이다. 모처럼 좋은 모임이 만들어지는 경우에도, 판에 박은 인사말과 자기 자랑을 나열하느라 진정한 정치적 성찰은 없다.
한국식 머신 폴리틱스의 고착화
19세기 머신 폴리틱스(machine politics)라는 정치 적폐가 미국에 있었다. 시카고 등 대도시에서 기층민을 조직화하여 선거 때 일시에 표를 모을 수 있는 선거동원 체제를 기계에 비유한 말이다. 조직의 구성원에게는 시청이나 정부의 허드렛일이 일자리로 제공된다. 할아버지 때부터 아는 사람에게는 하수도 공사도 준다. 미국의 청소사업이 기계화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전기만 넣으면 언제든지 각양각색의 부품을 돌릴 수 있는 큰 공장시스템과 같은 선거동원장치다. 정치부패가 만연하던 시대에, 부평초처럼 흘러들어온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선거 때 표와 허드레 일자리를 교환하는 지역구 관리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가? 오늘도 기계식 선거장치 구축에 몰입하는 것이 정치인의중요사이다. 지방자치제의 중첩적 선거는 이러한 장치를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방의 공설운동장이나 공공건물에 입주하고 있는 수많은 ‘시민단체’의 상당수가 이러한 기계장치의 부속품 역할을 하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시민사회의 활력’이라는 취지로 지출하는 많은 종류의 보조금이 이러한 기계정치의 기름 값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중앙당과 중앙정치인은 힘들고 험한 일을 지방정치인에게 맡겨 놓고 이들을 부리는 뼈대 정치(skeleton politics)를 개발하고 있다. 중앙은 척추를 잡고 있고, 정당의 지방 하부구조는 지방자치라는 허울을 쓴 지방정치인이 하수인이 돼서 잔뼈들을 연결하느라 고생이 많다. 우리가 고대하는 숙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성숙한 시민사회는 이러한 선거조직이나 선거 전문 정치인의 소멸 뒤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먼저 구체제를 허물어야 다양한 시민사회의 싹이 틀 수 있다.
중산층이 정당 하체로 들어와야
우리의 정당정치 개혁은 중산층이 정당 활동 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데서, 그리고 그들이 민주적 기질(democratic disposition)을 학습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부터 통일 이전까지, 총기 아닌 다른 수단에 의한 내전(civil war by other means)의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정착되지 못한 단계의 통일은 또 하나의 해방 후 사회혼란에 불과할 것이다.
현재 정치 선진국에서 발견되는 ‘아래로부터의 예비 경선’을 만들 수 있었던 바탕은, 과거 머신 폴리틱스의 청산에 대한 정당인의 결단과 중산층의 선거에 대한 시민적 책무를 자각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 과정에서 우리는 시민의 윤리적 담론(public ethical discourse)이라는 우리 사회가 가보지 못한 강물을 건너야 한다. 다양한 지식인층의 담론 모임은 물론이고 시민의 덕목(civil merits)과 시민성(civility)이라는 품격을 갖춘 신시민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시민의 미덕(civic virtues)은 민주주의에 대한 에토스를 토대로 공정하고 관대한 정치의식을 배양하고, 공동체의 이익 나아가 공익적 관점에서 정치 과정과 성과를 가름할 수 있는 새로운 시민 역량을 갖추는 데 필수전제다. 바로 다름 아닌 정당이 신시민의 에토스를 만드는 강물에서 몸부림쳐야 한다. 한낱 선거 하수인을 배양하는 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중앙당의 체질 변화
하부구조가 이렇게 부실한 데도 불구하고 국고 지원을 받는 중앙당의 경우는 국회의 역할을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활성화되어 있다. 여당은 거의 청와대의 행동대처럼 움직이고, 야당은 전쟁 중인 무인집단과 같은 행위준칙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정당의 총재나 당수가 중심이 되어서 감성과 표심이라는 포퓰리즘으로 정치의 본질을 덮은 지 오래되었다. 말로는 민생과 국민이지만 그것은 말의 성찬이고 말꼬리 잡는 대변인 정치의 모습에 불과하다.
개인주의를 걱정하고, 정치적 냉소주의를 걱정하고, 사회적 파편화를 넘어서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나아가 시민의 윤리적 덕목을 기다리는 것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보다도 더 허망한 대상인지 모르게 되었다. 전번 대통령선거는 그야말로 절망의 상태로 우리를 몰아넣었다. 토론이 되지 않고 리더의 성숙과 관용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난장판에 불과하였다. 정치적 냉소주의를 부추기고, 시민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칼날에 세우고, 가상의 적과 공적 대화에 나서는 중앙정치는 우리 국민의 공통의 적폐가 되어야 한다.
화석이 되어야 할 당대표(최고위원)와 대변인
정당의 대표최고위원이라는 거창한 자리와 입씨름과 분열의 혈투에 모든 기지를 동원하는 대변인도 이제 벗어던져야 할 유산이다.
국가 형성기에 정당이 전국적 조직을 구성하여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형성케 하여 만든 동원 체제, 움직이지 않는 공직자를 자극하는 감시체제, 그리고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구축기의 각종 사회집단의 연계체제에서는 강력한 중앙당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 심화가 화두가 된 오늘날 강력한 정당은 정쟁의 화력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대통령제를 운영하면서 국가 권력의 2인자라고 하는 당대표를 두고 있거나 매순간 말다툼에 매달리는 대변인을 두고 있는 체제는 후진국에서만 존재한다. 발달된 대통령제에서는 위헌으로 취급할 수 있을 사항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당이 먼저 강성하게 세워지고, 당이 정부를 만들고, 당이 군대를 만들어서 국가를 이뤘다. 사회주의식 조합주의에서도 모든 사회조직의 중추를 이루는 중앙당이 ‘종주조직(宗主組織)’이었다. 발전국가에서도 근시안적으로 조합주의식 동원체제를 만들면서 정당, 특히 혁명적 여당을 강화한 나라가 많았다. 모두 20세기 후발국의 이야기일 것이다.
다당제 민주주의의 심화를 입만 열면 주창하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이러한 유제를 왜 적폐로 삼지 않는가?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