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소통(疏通)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안민호 교수입력 : 2018.12.05 17:03
첫눈이, 그것도 폭설이 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야당의 비아냥거림이 들려온다. 청와대 행정관 한 사람의 거취를 두고서다. 첫눈이 오면 그를 놓아주겠다던 비서실장 말이 빌미가 됐다. 야권의 비아냥에는 그 행정관의 남다른 홍보기획 능력에 대한 시샘도 일부 있고, 문재인 정부를 감성 몰이에 치중하는 ‘쇼통’ 정부로 프레임하려는 나름의 전략도 있는 듯하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또 소통이든 쇼통이든 간에, 문 대통령의 청와대가 대국민 소통에 남다른 노력을 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들어 국정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장과 민정수석까지 SNS에 글을 올리는 횟수가 부쩍 늘었는데 이 역시 이전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소통을 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사회 소통 이론을 가르치는 수업의 첫 시간에 내가 항상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20년째 늘 수위를 차지하는 학생들의 대답이 있는데 그것이 ‘공감(共感)’이다. 이어 ‘경청(傾 聽),’ ‘잘 듣기’라는 답변도 많다. 언뜻 소통 잘한다는 것이 말을 유창하게 하거나 설득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와 반대로 잘 듣고, 공감하는 것이 소통에서 중요하다고들 말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숙고의 흔적이 보이는 대답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아마도 학생들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비슷한 대답이 나올 것이다. 손쉽게 포털 검색을 해봐도 ‘소통’을 ‘공감’이나 ‘경청’과 연결 지어 설명하는 많은 글과 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대통령이 SNS에서 직접 칭찬하며 소개한 정혜신 박사의 책도 ‘공감’에 관한 것이다.

강자와 약자의 소통

경청과 공감이 성공적 소통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인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소통을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문제로 다루게 될 때 경청과 공감을 긍정적으로만 해석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그것은 권력관계의 개입 가능성 때문이다. 소통은 사회적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모든 사회적 관계는 엄밀히 말해 권력 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 강도(强度)와 지속성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권력관계에서 강자가 약자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소통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반대, 즉 약자가 강자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은 그와는 다른 맥락의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사회 소통에 있어 권력관계를 고려치 않는 것은 단순히 오해를 넘어 그 자체가 심각한 불통의 문제를 야기 한다. 약자의 경청과 공감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을 심각히 훼손하는 아부나 순응, 동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때때로 매우 파국적이기도 하다.

소통 과정에 있어 권력 작용의 문제는 다른 서구 사회에서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지 모른다. 미국의 기자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Outlier)>에서 1997년의 대한항공 괌 추락 사고를 한국의 수직적 위계 (位階) 문화로 인한 불통 문제, 구체적으로 기장(機長)의 명백히 잘못된 판단과 지시에 대해 부기장이 감히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초래한 비극으로 설명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글래드웰의 분석이 일종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입각한 과도한 해석이라는 비판이 일부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추락 원인의 타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권력에 기초한 위계적 소통 구조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 부인하기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 탄핵 당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된 대통령을 둔 입장에서 이것이 비단 여객기 조종사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파르헤시아(Parrhesia)

사회 소통과정에 있어, 공감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파르헤시아’다. 고대 그리스 견유학파 (犬儒學派)의 시조였던 디오게네스는 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파르헤시아’라고 답했다고 한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다 주겠다는 알렉산더 대왕 에게 “당신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 비켜달 라” 했던 이가 디오게네스다. 권력에 대한 아부나 순종과 대비되는 파르헤시아는 ‘진실을 말하기,’ ‘담대하고 솔직한 비판,’ ‘입에쓴 약’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파르헤시 아는 권력자에 대한 아랫사람의 쓴 소리일 수도 있고, 집단대중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는 한 개인의 준엄한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는 정치인들의 대중에 대한 아부를 위험시하면서 대중에 쓴 소리 하는 것을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어떤 삶이 훌륭한 것인지, 무엇이 탁월함(Arete)인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던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파르헤시아는 민주 시민의 미덕이면서 동시에 의무기도 했다.

강자의 관용과 약자의 두려움 없는 비판

그리스인들의 중요한 덕목이었던 파르헤시 아를 현대적 의미에서 재조명한 이가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다. 그는 <두려움 없는 발언(Fearless Speech)>이라는 책에서 파르헤시아를 현대적 언론자유 개념과 연관 지으면서 비판적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다. 소통을 권력문제로 바라본 대표적 학자인 푸코에게 바람직한 소통은 강자의 관용과 약자의 파르헤시아를 의미한다. 강자와 약자라는 권력 관계의 틀 속에서 해석되는 아부와 파르헤시아는, 지지와 반대 또는 편안함과 불편함이라는 맥락에서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파르헤시아는 옳지만 쓴 소리이 기에 매력적이지는 않다. 이미 알고 있고, 동의하고 있는 익숙한 얘기를 할 때는 공감과 박수를 받지만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생경하고, 동의하기 어려운 메시지라면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아부가 공감과 지지가 주는 편안함에 기초한다면, 파르헤시아는 반대와 생경함이 유발하는 불편함과 연관되어 있다. 거짓은 편하고 진실은 불편하다. 소통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야

대통령의 소통 역시 마찬가지다. 핵심은 파르헤시아다. 스스로 생각하는 진실을 꾸밈없이 말한다는 것은, 이득이 확실한 손쉬운 기회를 저버리고 반대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대통령이 자신을 뽑아준 대중이라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얼마나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지, 또 대통령의 생각과 정책에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대 통령 당신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가 대통령의 소통 능력을 판가름하는 척도 다. 결국 불편한 반대자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는 관용과 공감, 그리고 익숙하고 편한 지지자들에게 변화와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용기가 대통령 소통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지지자들에게 아부하고 반대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익숙하고 편한, 그렇지만 실패로 가는 넓은 길이다. 어려운 점은 권력이 교체되면서 입장도 뒤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강자와 약자의 혼동이다. 현재의 권력은 약자의 입장에 있던 과거의 파르헤시아스트 들이다. 문 대통령이 비판하던 강자의 권력은 이제 경청해야 하는 반대자들이 되었고 공감하던 지지자들은 쓴 소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게 낯설고 불편하다. 과거의 권력은 여전해 보이고 반대자적 태도의 관성도 계속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길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


안민호 교수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 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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