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대표가 재선하는 방법

대통령·첫 보수정당 여성 원내대표·첫 진보정당 3선…쟁쟁한 비례대표 입문 정치인

머니투데이 더리더 홍세미 기자입력 : 2019.03.04 09:49

비례대표 의원들이 ‘재선’을 달성하는 것은 4년의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비례대표 의원들이 재선하는


경우는 지역구 초선 의원보다 어렵다. 비례대표 의원이 재선 의원이 된 경우는 17대는 5명, 18대는 8명, 19대는
5명이었다. 재선 성공 비율로 따지면 10.9%다. (관련기사: the300 [단독]비례대표 재선율 ‘1.8%’…‘이러려고 비례했나 자괴감’) 20대 국회의원


298명 중 재선 의원은 66명(22%)이다. 19대 국회에서 비례대표였던 의원이 20대 국회에서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9명이다. 남인순·한정애·홍의락·박선숙·이은재·전현희·전혜숙·진선미·한정애 의원이다.


이전 국회보다 많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비율로 따지면 16%다. 지역구 의원보다 낮은 수준이다. ‘비례대표 의원이 재선 성공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 같다’는 비유가 나오는 이유다. 그러나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사람들은 쟁쟁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부터 보수정당 첫 여성 원내대표, 진보 정당 첫 3선, 그리고 27년 동안 정치 인생을 이어오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초선 비례대표 시절 어떤 ‘필살기’로 재선에 성공했을까.

▲2010 장애아이 We Can 산타의 작은선물 행사에서 나경원 의원이 장애우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나경원의 필살기 #감동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보수정당에서 첫 여성 원내사령탑에 올랐다. 4선인 나 의원의 정치적 무게감이 커졌다는 평이다. 나 원내대표는 17대 총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당시 비례대표 11번이었다. 초선이었지만 그의 인지도는 높았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판사 출신 정치인인 데다가 수려한 외모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정치를 시작한 나 원내대표가 내세운 것은 ‘감동’이었다. 그는 한나라당 당선자 연찬회에서 ‘나는 17대 국회에서 이것만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라는 다짐에 “감동을 주는 정치를 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딸이 다운증후군을 앓는 것과 관계가 없지 않다. 나 원내대표는 국회의원과 장애아동 부모·전문가가 의견을 나누는 국회 연구단체 ‘장애아이,위 캔(We can)’ 회장을 맡았다. 한나라당 장애인 복지특위 위원장을 역임, 장애인 처우 개선을 포함한 복지·인권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보수정당에서 복지·인권 분야의 포지션을 담당한 점, 한나라당 대변인을 1년 8개월 동안 진행하면서 인지도를 높인 점 등이 그에게 강점이 됐다. 나 원내대표는 18대 총선에서 서울 중구로 전략 공천됐다. 서울 중구는 정대철 민주당 상임고문이 터줏대감으로 있는 지역구다. 보수정당에서는 쉽지 않은 곳으로 통했지만 나 원내대표는 46%의 득표율로 재선을 기록했다. ‘험지에서 승리한’ 점이 두드러져 그는 정치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이 나왔다.

▲▲ 백봉신사상 대상 받은 심상정 의원(왼)이 문희상 국회의장(오른)으로부터 상패를 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심상정의 필살기 #중앙 정치인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진보정당 의원 중 처음으로 3선을 기록했다. 심 의원은 진보진영의 ‘간판스타’로 자리 잡았다. 심 의원은 서울대학교 78학번으로 1980년 최초로 총여학생회를 만들어 초대 총여학생회장을 맡았다. 구로공장에 근무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고 1985년 구로동맹 파업을 주도했다. 25년 동안 노동운동에 몸담은 그는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선출, 정계에 진출했다. 당시 심 의원 외에도 김문수, 임종석 등 노동운동 출신의 국회의원이 배출돼 노동운동가의 약진이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

일생을 노동운동에 몸담은 심 의원의 의정활동도 노동에 초점이 맞춰졌다. 원내에 들어온 심 의원은 우선 삼성을 비롯한 순환출자 문제를 지적하면서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를 비판했다. 또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의 개정안 등을 통과시키면서 초선이지만 존재감을 알렸다. 진보정치가 발돋움하는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성실한 의정활동으로 정치부 기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백봉신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를 ‘중앙 정치인’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했다. 인지도는 높지만 지역살림을 잘 맡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다. 18대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 의원이 대구로 지역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된 경기 고양구 덕양갑에 심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그가 내건 대표적인 대표적인 공약은 ‘공교육 혁신’이다. 덕양구에 마을학교를 정식 출범하고 총선에서 공교육 혁신을 이뤄내겠다는 포부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는 주민들이 심 의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고양시 덕양구는 당시 한나라당 손범규 의원이 당선됐다. 심 의원은 4년 동안 심 의원은 진보신당 대표,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경
기도지사 후보 등을 거치며 명실상부한 ‘중앙 정치인’ 이미지를 공고히 다졌다. 정치적 중량감을 높인 심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단 170표 차이로 승리했다. 19대 총선에서 가장 적은 표차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발언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이명박의 필살기 #기업가 정신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했다가 대권의 고지에 오른 사람도 있다. 지금은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MB)이다. MB의 샐러리맨 신화는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하다. MB는 입사 13년 차인 1977년에 35세의 나이로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1988년에 회장직에 올랐다.

1991년 노태우 정권 말기에 정주영 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기업인이 정치에 나서면 큰 위험이 따른다며’ 현대건설 회장직을 사퇴하고 현대를 떠났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문 경영인’ 영입을 이유로 MB를 민주자유당 전국구 25번으로 공천했다. MB의 의정활동을 하면서 경영인이었던 점을 한껏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1994년 7월 대정부질문에서 이 전 대통령은 남북교류에 대해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접근했고 동남아에 진출한 중소기업의 북한 이전, 사양산업의 북한 배치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또 상임위 활동도 여당이지만 야당의원처럼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관료들이 어려워했다는 평을 받았다. 재벌의 소유집중 현상을 타파하기 위한 ‘대기업 소유집중 완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이 ‘정치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1996년 15대 총선이다. 종로 지역구에 출마한 이 전 대통령은 ‘청문회 스타’로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4선의 이종찬 전 의원과 붙었다. 종로는 ‘정치 1번지’로 불린다. 역대 대통령 중 세 명이나 당선인을 배출했다. 그만큼 총선에서 가장 주목되는 지역구다. 당시 이들을 누르고 이 전 대통령은 41%의 득표율로 당선돼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재선이지만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당선 인터뷰에서 “다음 시대에 필요한 지도 자가 누구인지 논의될 때 그중 한 사람으로 포함되고 싶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곧바로 선거비용 초과 지출 혐의로 기소돼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다.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사진=머니투데이
◇박지원의 필살기 #동교동계

박지원 의원에게 ‘2인자’라는 수식어가 잘어울리는 이유는 ‘원내대표만 세 번,’ ‘DJ의 영원한 비서실장’이라는 호칭이 붙기 때문일까. 이런 점들이 그의 정치 인생 28년을 이끈 것인지도 모른다.


30대 초반 이른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가발 사업을 성공시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박 의원은 미주지역 한인회 총연합회장을 맡으며 한인사회의 중추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만났다. 박 의원이 생활고에 시달린 DJ에게 생활비를 대줬다는 후문이다. 1992년 민주당 전국구 21번으로 공천을 받은 그는 14대 국회로 정계에 진출했다. 박 의원은 동교동계 핵심 의원으로 분류되며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에서 ‘명대변인’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그러나 1995년 새정치국민회 소속으로 경기 부천소사구 지구당위원장에 출마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낙선했지만 1997년 대선에서 DJ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자리매김했다. 국민의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 공보수석,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문화관광부 장관 등 요직을 두루 맡으며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이후 정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2006년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불법 대북 송금을 한 사실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7년 2월 특별사면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특별사면을 받은 후 2008년 18대 총선에 출마한 박 의원은 민주통합당에서 공천 ‘컷오프’를 당했다. 당시 당대표는 손학규·박상천 공동대표였다. 이들은 “금고 이상형이 확정된 자는 심사에서 제외한다”는 이유로 컷오프했다. 박 의원을 비롯 김홍업, 안희정 등이 배제됐다.

그는 굴복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당시 선거사무소에는 DJ의 차남 김홍업 전 의원 등 동교동계가 대거 참석했다. 또 이희호 여사가 두차례 현지 지원 유세를 나서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18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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