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의 조건

[안민호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안민호 교수 입력 : 2019.07.11 11:21

영화는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이다.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젊은이와 늙은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어떤 묘사와 서사(敍事)도 궁극적으로는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다. 미학적 비평과는 별개로 영화가 정치•사회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 같은 사회소통 연구자도 그래서 가끔은 꽤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영화를 들여다보게 된다.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은 말 그대로 기생충 같은 삶을 사는 없는 자들의 이야기다. 없는 자들의 이야기는 당연히 있는 자들과 대비될 때 극적 의미를 가진다. 영화 <기생충>은 그 빈부(貧富) 이항 대립의 다양한 변주들을 솜씨 있게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몰입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른들을 위한 한 편의 우울한 동화 느낌을 주는 이 영화는 빈부(貧富)의 만화적 묘사와 대비로 주목받았던 이전 작품 <설국열차>의 연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웃기면서, 여전히 허무적이고, 또 우화적인 그런 영화다.

좋은 영화가 주는 미덕, ‘낯설음’
이데올로기로써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내 나름 좋은 영화의 기준 혹은 미덕 같은 것이 있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내 생각에 좋은 영화는 우리에게 내재화된 어떤 전형적 것들을 뛰어넘는 ‘낯설음’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의 익숙한 기대, 자연스러움, 당연함을 뒤트는 반전이나 충돌과도 같은 것인데, 이런 생경함을 영화적 공감 속에 어떻게 녹여내는가가 감독의 역량이고 영화적 가치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봉준호는 작가 감독이라기보다, 복잡하지 않은 주제를 대중적이고 세련되게 잘 만드는 솜씨 좋은 감독이다. 어떤 철학적 깊이까지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영화 <기생충>은 우리에게 꽤 재미있는 뒤틀림과 낯설음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흐릿한 경계다. 어두운 지하와 지상의 대저택이라는 더할 수 없는 분명한 공간적 대립 장치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송강호와 부유한 이선균의 대조는 의외로 날카롭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가난뱅이의 전형적 모습과는 다소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송강호와 그 가족의 캐릭터 때문이다. 송강호가 연기한 기택에게는 없는 자들에게 허용되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무능함을 가리기 위한 여유로움이기도 하고, 유능한 사기꾼들에게 있음직한 낯 두꺼운 여유로움일 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부자들에 대한 맹렬한 시기와 분노가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야”와 같은 나름 객관적이고 여유로운 현실 인식이 그에게는 엿보인다.

송강호다운 전형성이 만드는 비전형성
꼭 기택이라는 영화 속 캐릭터 때문만은 아니다. 송강호라는 배우 자체가 일종의 영화적 마크다. 송강호가 연기하면 조폭<우아한 세계>도, 경찰<살인의 추억>도, 대통령<변호인>도 우리 이웃의 평범한 아저씨가 된다. 송강호 배우의 전형적 연기가 어떤 직업군을 만나면 그 직업의 전형성을 무너뜨린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장인데, 기대와 다르다. 한편으론 속물적이고, 거칠고, 비릿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여유롭고, 정도 많고, 의롭기까지 하다. 우리네 중산층 보통사람을 대변하는 송강호는, 그들도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음을 보이기 위한, 색다른 빈한함을 위해 준비된 감독의 의도적 장치 같은 것이다.

“계획이 다 있구나”
다른 것은 또 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집요하게 자신들의 목표를 이루어내는 기택 가족의 욕망과 추진력 또한 가난한 자들의 전형적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찌들고 무기력한 이들이 아니라, 한줌이라도 더 넓은 아파트로 옮기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속물적 중산층의 모습이 그 가족에게 투영되어 있다. 이것은 번듯이 잘 차려입고 넓은 저택에 사는 이선균 가족의 여유롭고 착해 보이는 겉모습의 숨겨진 내면이기도 하다. 이선균 가족은 영화에서 매우 전형적인 부자들의 모습으로 묘사되면서도 물질적 수준을 제외한다면, 별로 상류계급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설픈 영어 섞어 쓰기나, 인디언 놀이 가든파티 등은 우스꽝스럽고 속물적인 우리네 중산층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선균의 과거가 송강호의 현재고, 이선균의 현재가 송강호의 미래임을 암시하는 강력한 은유는 송강호가 숨어 있는 빈 저택을 사들이려는 송강호 아들이 등장하는 미래 상상 장면이다. 누구도 저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한국 사회의 계급적 차별성이 서구 국가들의 그것과는 다름을 의미한다. 피식민인의 경험 때문인지, 급격한 산업화와 고도성장으로 인한 전통 파괴 때문인지, 엄밀하게 말해, 우리 사회에는 고급한 상류문화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화가 없으니 구분도 없다. 본질적 구분이 불가능하니, 형식적 구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냄새’다.


냄새는 이 영화에서 가장 전형적 상징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한 자들과 부자를 구분하는 냄새는 볕이 들지 않는 눅눅한 지하적 삶의 흔적이다. 기생충과 곰팡이의 냄새고 지하철 1호선의 냄새다. 전형성이 문제인 것은 그것이 본질을 가리기 때문이다. 본질은 송강호와 이선균의 속물적 동질성인데, 그 동질성을 가리는 것이 냄새라는 구분이다. 냄새는 꽤 그럴듯 하지만 가짜고 허튼 것이다. 송강호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분노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짜 같은 가짜, 본질 같은 외피가 분노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우리 욕망의 이면이기도 하다.

  
좋은 영화는 비루함에서 고귀함을 보고 고귀함 속의 비루함을 드러낸다. 그런 영화는 우리 내면에 깊게 자리 잡은 고정관념을 흔들어대고 전복한다, 광고에 의존하는 텔레비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돈을 지불하고 직접 극장으로 찾아가는 수고를 요구하는 영화라면, 응당 보이고 보여지는 것들을 뛰어넘어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낯설음을 마주하고 경험하게 하여야 한다. 전형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해서 물론 영화의 모든 부분이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전형성은 지루하지만 공감을 만든다. 불편함과 긴장을 유발하는 ‘낯설음’ 만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좋은 영화에는 항상 전형성과 비전형성이 적절히 섞여 있다. 영화 <기생충>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어느 정도는 성공적이다.
영화 <기생충>이 외국 영화제서 최고상을 받았다고 해서, 거장의 심오한 철학이나 날카로운 예술적 감각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실망할 것이다. <기생충>은 어렵거나 복잡한 영화가 아니다. 한국 분위기 물씬 나는 웰메이드 대중영화라 할 수 있다. 송강호가 지하실서 숨어 지내며 전등불 깜박임으로 모르스 메시지를 보내는 장면과 같은 억지스러움도 없지 않지만 충분히 박수 받고 또 칭찬받을 만하다. 이번 수상을 통해 뛰어난 한국 영화감독들과 작품들이 국제적으로 더 많은 관심과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7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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