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관의 중립화 문제, 히말라야 등정 같은 그 至難(지난)한 길

이일환의 情(정보의 눈으로)•世(세상)•思(바라보기)

이일환 청장정보연구원 원장 입력 : 2019.09.17 09:26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문재인 정부가 중반기에 들어서고 총선이라는, 한국 정치지형과 국가 패러다임의 대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치 일정이 다가오면서 정부 부처나 기관들의 ‘중립’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공영방송의 대표격인 KBS가 ‘정파방송’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말을 들으면서 ‘중립화 논란’의 핵으로 자리 잡아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가 공영방송의 금도를 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검찰이나 법무부 역시도 중립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은 적폐 수사를 진행해오면서 중립 문제가 제기되어왔고, 법무부 역시 조국 전 민정수석이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후임으로 인상청문회를 전후하여 ‘중립화 논쟁’에 또 하나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그간 정치중립을 다짐해왔던 국가정보원이 정치중립 논란(the red flag)의 대열에 합세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지난 5월 서훈 원장과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원장이 4시간가량 회동한 사실이 특정 매체에 의해 보도되었다. 이에 일부 언론은 ‘탈정치화’를 약속한 국정원이 또 다시 시험대에 올랐으며, 국내정보 수집을 중단하겠다고 밝힌 문 대통령의 ‘국정원 정치중립’ 공약이 무색해졌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7월 24일 정말 오랜만에 잡은 북한의 <정찰총국> 소속 직파 간첩 체포 소식도 low-key로 언론플레이함으로써 중립성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예전에는 비교적 확대 보도되었을 내용이 사회면 한구석에 배치되고, 칼럼 등에서만 가볍게 다루었을 뿐 관심 갖지 않으면 거의 알 수도 없을 정도였다. 남북관계를 염두에 둔 현 정부의 정책기조를 의식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정보의 대국인 미국 역시도 심심찮게 정보기관, 특히 정보 수장들의 정치 중립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7월 28일 트럼프 대통령과 배치된 발언을 종종 한 댄 코츠(Dan Coats, 76세) 국가정보국장(DNI)을 트윗을 통해 해임(해임 5일 후 조지 맥가이어 대테러 국장을 후임으로 임명했다)함으로써 “정보기관의 임무는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인데,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하는 사람(truth to power)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같은 국내외 사례는 정보기관이나 정부 부처, 그리고 공영방송과 같은 각급 기관들의 ‘중립 지키기’가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과제인지를 잘 보여준다. 책임이 작은 비판자 시절에는 ‘중립’을 소리 높이 외치다가도 자신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면 ‘중립’이라는 단어는 박물관 지하 창고로 들어가고 모두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기관이 되길 희망한다. 어쩌면 당연한 길인지도 모른다. 집권자들은 자신들이 고민해온 정책들이 옳다는 확신이 있고, 실제 현장에 집행하고 싶은 욕망 또한 강하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의 중립화 문제와 직결되는 학문적 단어가 ‘정보의 정치화’이다. ‘정보의 정치화’는 ‘윗사람을 기쁘게 하는 정보(intelligence to appease)’에 매몰될 가능성이 높다. 지도자는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교과서적으로 말하지만, 권력자는 아부성 얘기(북한식 용어로 ‘노죽’)를 좋아하지 자신이나 자신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는 듣기가 싫다. 이는 국정 파행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일체화된 집단적 사고에 영향을 주어 ‘값비싼 정보실패’를 유발하게 된다. 정보사용자는 자신이 ‘선호하는 것만 취하기(cherry picking)’ 현상을 보임으로써 부지불식 간에 정보실패에 이어 국가적인 실패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국가적인 정보실패를 방지하려면 고통스럽지만 정보기관은 중립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영삼 정부는 국회 내에 정보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관여죄라는 법적장치를 신설하여 정보기관 요원들의 정치관여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엄정히 사법처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노무현 정부는 특히 ‘순수정보기관’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정보기관의 중립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같은 고통스러운 노력의 결과로 외형적인 중립화는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내용적 측면에서 보면 아직 미흡하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내용적 측면의 중립화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중립화’가 달성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정보기관은 國益無門의 관점에서 정책결정 집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99명이 하얀색이라고 주장해도 빨간색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오늘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이 내일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것이 무수히 많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어느 기관보다 국가정보기관은 ‘중립화’라는 어렵지만, 무거운 책무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보기관 스스로 존재 가치를 지키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는 일이다. 국가안보와 국가안전보장 업무이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지고한 가치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6세가 영국 정보기관의 지침(?)에 따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역정보 공작에 일조했듯이 우리나라도 대통령이 정보기관의 요청대로 움직이는 그날이 와야 한다.


둘째, 제도적•법률적 중립화 논의는 이제 접어야 한다, 제도적 중립화 장치는 선진국 그 어느 나라보다 완벽에 가깝다. 어찌 보면 가혹한 측면도 없지 않다.


셋째, 국회 <정보위원회>의 역할은 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록 회의 내용 전부가 공개되지 않더라도, 비공개회의에서 정보위원들의 지적과 비판은 ‘미약한 중립화’만이라도 지향하도록 해준다.


넷째, 정보사용자의 인식도 중요하다. 내 입맛에 맞는 정보가 아닌, 나와 다른 견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갖추어져야만 정보기관은 객관적인 활동과 정보보고가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판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보기관장 임명 사례는 귀감이 된다. 개인적으로 아무 인연이 없는 제임스 클래퍼 전 국방부 정보차관을 DNI 국장으로 임명하면서 말했다. “클래퍼는 귀에 거슬려도 대통령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다섯째. 조직 내부의 중립화 조치를 확실히 시행하는 일이다. 특정 부서 내지는 간부들이 특정 출신들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인사의 안배와 균형이다. 코드에 맞는다고 동질적인 집단으로만 다수를 구성하면 다른 의견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작은 팀에서부터 큰 부서에 이르기까지 균형적인 안배 인사는 서로가 상대를 배려하고 조심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중립화의 길로 가게 된다.


우리도 이제는 이스라엘 다간(2016.3.17. 사망)처럼 국민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스파이를 가질 때가 왔다. 이스라엘 진보언론 <하레츠>는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며, 다간은 자신을 임명한 총리와도 의견 대립을 할 정도로 모사드를 초당파적 조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해 국민의 신뢰를 끌어냈다”고 추모했다. 우리나라 정보기관도 하루속히 이런 평가를 받을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이일환 청장정보연구원 원장
한양대 자문교수
정치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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