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건, 두 개의 현실

[안민호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안민호 교수 입력 : 2019.10.01 09:17


 사랑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통속적인 말이지만 이것은 사회과학적 관점에서도 참이다. 사랑, 열정, 신념이 지나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하게 된다. 보지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상태다. 실험적 증거도 많다. 그래서 중세 유럽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후고는 “여린 영혼은 세상의 한군데에 사랑을 고착시키고, 강한 사람은 모든 곳으로 사랑을 확대하고, 완성된 사람은 모든 곳에 대한 사랑의 불을 끈다”고 말한다. 또 “자신의 고국을 여전히 달콤하다고 느끼는 이는 아직 마음이 여린 초보자고, 어디를 가나 다 자신의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지만, 어디를 가든지 낯선 나라처럼 느끼는 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다”라며 사랑과 거리를 두고, 현실 세상에 대해 낯선 감정을 유지하는 게 완성된 지성의 태도라고 가르친다.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물론 사랑만 눈을 멀게 하는 건 아니다. 사랑만큼이나 증오도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무엇을 너무 좋아하거나 너무 싫어하는 심리상태는 객관적 시각을 훼방한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정치를, 정치인을 그런 감정 상태로 바라본다.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조국 법무부 장관 관련 사건에 대해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봐도 그렇고, 관련 SNS나 인터넷 댓글을 봐도 그렇다. 나이나 배움이 많으면 좀 덜 그럴 만도 한데 그것도 별 관련 없어 보인다. 조국 장관 문제에 관해서는,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내 주변의 많은 대학교수도 매한가지다. 우리나라 정치가 이 모양인 것이 비단 정치인들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게 이번 사건의 의외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스포츠와 정치, 같은 사건 다른 현실
정치는 스포츠와 유사한 점이 많다. 승패를 놓고 치열하게 겨룬다는 것도 그렇고, 심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도 그렇고 플레이어들을 열렬히 응원하는 지지그룹이 있다는 점도 유사하다. 같은 것을 보고도 입장에 따라 현실이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두 팀이 격렬하게 부딪힐 때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은 같은 경기를 두고도 정반대로 경기를 인식한다. 정치 이상으로 맹목적이고 편파적 관점이 극명하게 표출되는 곳이 스포츠 경기다. 우리 편이 반칙하는 것은 잘 보이지 않고 상대 팀의 사소한 반칙은 크게 보인다. 페어플레이는 항상 우리 편이고, 비열한 플레이는 온전히 상대방의 몫이다. 심판도 늘 불공정하다. 상대방의 잘못은 모른 체하면서 우리 팀의 실수에는 눈에 불을 켜고 과도하게 문제 삼는다고 비판한다.

 
사회심리학자 해스토프와 캔트릴(Hastorf and Cantril)은 격렬한 미식축구 경기에 대한 관중들의 이런 상반된 현실 인식을 분석한 후, 특정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정반대 해석이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사실이 될 수 있다며, 하나의 경기였지만, 분명히 그 경기는 두 개의 서로 다른 경기였다고 말 한다(『They saw a game』, 1954). 이들의 연구는 이후 심판 역할을 담당하는 언론이 항상 불공정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입장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적대적 미디어 효과 (Hostile media effect)’ 이론으로 이어진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언론이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재의 우리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이론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인척들에 대한 검찰 수사와 언론보도를 바라보는 엇갈리는 인식들도 적대적 미디어 효과와 관련 있다.

보는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는 것
사람들이 같은 현실을 두고도 상반되게 인식하는 원인은 인지적 부조화를 회피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 때문이기도 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이나 집단에 관한 부정적 정보는 심리적 안정을 해치고 부조화를 만든다. 부조화는 불편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보와 대립하는 자신의 믿음과 태도를 바꿀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보다 손쉬운 해결방안, 즉 자신의 기존의 신념에 부합하고 조화를 강화하는 정보들에 선별적으로 노출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결과는 보이는 대로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 아니라 믿는 대로 보게 되는 것(Believing is Seeing)이다. 단순한 오락인 스포츠 경기도 그렇고, 그보다 훨씬 심각하고 중요한 정치도 이처럼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는다.

네 편, 내 편이 판단의 척도가 되는 패거리 정치
정치를 ‘고귀한 목적을 지향하는 비천한 행위’라고 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극명하게 정반대로 해석하는 두 개의 현실은,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네 편인지 내 편인지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정치의 비천한 속성과도 관련 있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이고 폭력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패거리를 조직, 운영, 동원하는 행위다. 목숨을 건 패거리들 간의 전쟁이기에 거기에 고귀함은 고사하고, 어떤 논리나 객관이 있기 어렵다. 사실 어느 정도의 권력지향성이나 패거리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고, 또 어디에도 어느 정도의 권력 투쟁과 패거리 문화는 존재한다. CS 루이스는 “패거리에 들고 싶은 욕구와 패거리 밖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동기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정치는 그런 욕구와 두려움이 통제되지 않고, 민낯으로 가장 강렬하게 분출되도록 자극하고, 충돌하는 곳이다.

한국의 폐쇄적 패거리 문화와 정치
원래 비천한 정치가 우리나라에서 더 비천해 보이는 것은 우리의 남다른 패쇄적 패거리 문화와도 관련 있다. 패거리 문화가 국가나 문화권별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고약하다는 말이다. 패거리 폐쇄성 정도는 자기 패거리에 속하는 사람과 속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김연신 등(2009)의 문화비교 연구에 따르면, 동양 문화권이 서양 문화권에 비해 그 태도의 차이가 크고,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서도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집단 내외를 구분해 가장 차별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하나의 보스를 중심으로 뭉치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적 패거리 문화도 우리 공동체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우리와 그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차별하는 이런 패쇄적 패거리 문화는 당연하게도 우리 정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정치 현실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과 같은 극심한 사회 심리적 분열 상황이다.

어디에도 진실은 없다. 모두가 가짜다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자조적 토로다. 어디에도 진실은 없고 모두가 가짜처럼 보인다. 가짜 뉴스가 문제라는데, 자신의 정파적 입장에 따라 뉴스의 진위가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가짜 뉴스고 모두가 진짜 뉴스다. 당파성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곳에 진실이 있을 자리는 없다. 영국의 위대한 교육자 매튜 아널드는 당파성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어떤 이슈를 사심 없이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지성적 능력을 고양하는 것이 참된 교육이라 했다.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는 지적이다. 자신이 소속된 패거리가 한 입장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한때는 스스로도 그 입장을 지지했을지라도, 객관적 현실 인식에 근거해 반대되는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그 생각을 단호하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지성이 우리 사회에 너무 드물다. 조국 장관보다 이게 더 심각한 문제다.    

안민호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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