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아닌 소통 같은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안민호 교수 입력 : 2019.12.02 10:07
대통령이 TV 토크쇼 포맷을 빌려 연예인과 함께“ 국민과 각본 없는 대화”를 한다. 야당 대표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아가며 풍찬 노숙 단식을 하고 TV는 실시간 경쟁적으로 그것을 중계한다. 연예인같은 미소와 턱없이 결의에 찬 그이들의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답답하다가, 또 안타깝고 그러면서 쓴 웃음이 지어진다. 현란한 의상과 우스꽝스러운 짙은 분장으로 자신을 가린 채 스스로 웃는 것을 잊지 말라고 되뇌는 ‘조커(영화 Joker)’적 삶이 그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의 전유물만은 아닌 것 같다.


연기적 삶

인간은 타자에게 누구나 광대다. 어느 노(老) 연극인이 독백하듯 한 말이다. 살고 보니 우리 인생이 배우 노릇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얘기다.“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라는 유명한 말도 있다. 연극 같은 삶에 대한 일종의 응원인데, 대학 첫 학기 교양 영어 수업에서 처음 접했던 기억이 있다. 35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마음에 울림을 주는 경구다. 같은 제목의 세계적 유명 밴드의 음악도 있는 것을 보면, 삶과 인생 여정을 하나의 연극으로, 연기로 해석하는 것은 꽤나 공감되는 시각임이 분명하다.

인생이 연극이란 표현은 사실 아프고 또 슬픈 고백이다. 그것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도 분명 격려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설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막이 오르면 시작하고 내리면 끝나는 게 연극이다. 유한하기에 연극이고, 인생인 것이다. 연기(Acting)와 비유되는 것도 아프다. 연기는 일종의 모사(摹寫), 흉내 내기다. 진짜가 아닌 그런 척하는 가짜라는 것인데, 그 가짜가 우리 삶의 본질이라면 슬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슬프고 당황스럽지만, 나이가 들수록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진짜가 아니라 진짜 같이 흉내 내며 사는 것임을 고백하게 된다.

진짜 대신 진짜 같은

진짜로 살기 어려운 이유가 한두 가지 아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들라면 그건 결국 소통의 문제다.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의 어려움, 소통의 부재가 진짜 아닌 진짜 같은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말이다. 시인 김중식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는 시에서 말이 안 통해 더 이상의 진지함이 없고, 사랑 대신 사랑 같은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의 말을 지나치면서,
그러나 고개는 끄덕이면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한다
대화란 서로가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 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행위임
얼마나 자신을 달래는지 그대는 아는가?
나의 자살 시도가 그대에게는 해프닝으로 해치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대와 나 사이엔 국경이 있다는 사실,
말이 안 통하므로 더 이상의 진지함이 없다
말이 안 통해서 술을 먹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기 싫고 술을 먹으면 집으로 안 들어간다
말이 안 통해서 병 대신 병적인 것, 아픔 대신 아픔적인 것,
애인 대신 애인적인 것에서 우리는 위안받는다
말이 안 통해서 우리는 상처 없는 아픔과 절망 없는 고통을 하고 싶어 한다.
- 김중식 시집 <황금빛 모서리>(문학과 지성사, 2008),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에서 발췌

어느 때보다 소통이 칭송되고 강조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하기 어려운 시대다. 어쩌면 소통이 너무 강조되기 때문에, 그런 만큼 소통의 어려움과 부재를 더 실감하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토로처럼, 우리가 소통한다고 해도, 어쩌면 그것은 소통 아닌 소통적인 것, 소통 같은 것이기 십상이다. 서로 귀를 틀어막은 채 서로의 등 뒤에 있는 벽에 대고 고함치는, 아니면, 상대방의 말은 지나친 채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떡이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열심히 구상하는 거죽만의 대화가 우리의 소통이다.

모순적 소통

소통은 그 본질에서 모순적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말은 자신과 타인을 연결하는 매개체다. 조르주 귀스도르프는 그의 저서< 말>에서 소통의 어려움을 스스로에 대한 표현 기능과 타자를 향한 전달 기능의 모순적 관계를 통해 설명한다. 말이라는 언어적 행위는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도를 외부로 드러내는 표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표현된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 수용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이다. 즉 우리는 자신을 표현하고, 그것의 전달(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 타인과의 온전한 연결이란 자신이 표현하는 내용과 타인에게 전달된 내용이 일치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전달하려 한다면 그 내용이 ‘나 중심적’으로 구성될 것이고, 상대방이 완벽히 이해하도록 전달하려면 그럴수록 ‘상대방 중심적’으로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더 완벽하게 표현하려 하면 할수록 상대방에게 덜 전달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더 전달하려 하면 할수록 나와는 멀어진다. 귀스도르프는 우리가 두 가지 대립된 양식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미친 사람이나 신비주의자처럼 나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거나 아니면 타인의 언어를 대거 수용함으로써 내가 아닌 그들처럼 말하는 것. 조커와조커가 살해한 유명 토크쇼 진행자 사이에 존재했던 간극만큼의 거리가 거기에 있다.


소통은 타협이고 연기(Acting)

나의 온전한 의도나 생각을 상대방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소통은 그렇게 모순이고 또 역설이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면 굳이 소통이 필요 없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소통이 필요하고, 또 그것을 원한다. 그런데 그 다름 때문에 온전한 소통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소통은 결국 일종의 타협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나 같은 것, 네가 아닌 너 같은 것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통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매일 배우가 된다. 소통 아닌 소통 같은 것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열광과 비난 사이

자신을 감추고 인생이란 무대에서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 같은 삶을 사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그중에서도 공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연예인이 그렇고 정치인이 그렇다. 그들의 연기적 삶은 누구보다 더 고달프고 날카롭다.

그들처럼 매순간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 아닌 나 같은 삶을 산다는 건 벅찬 일임이 틀림없다. 열광과 비난이 일상이 되는 삶의 과정에서 행복과 불행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할 정도로 정신을 잃는 게 무리가 아니다. 평생 한순간도 행복했던 적이 없던, 그래도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조커는 영화에서 무엇이 진짜 자신인지를 헷갈려하며 미쳐간다. 그 결과, 그의 비극은 코미디가 되고, 그 코미디는 또 비극이 된다.

행복 아닌 행복 같은, 소통 대신 소통 같은, 진짜 보다 진짜 같은 것들의 시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믿음이 더 확고해진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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