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계절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안민호 교수 입력 : 2020.03.02 11:06
공포가 스멀거린다. 분위기를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는 모양새다. 곧 덮칠 것만도 같다. 아니 이미 덮친 건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말겠지 하던 것이 벌써 몇 주 전이다. 평소 안 보던 TV를 하루종일 켜놓고 시시각각 속보에 귀를 쫑긋거린 지도 꽤 됐다. TV가 실시간으로 전하는 위태로운 숫자들과 그만큼 더 흥분하는 출연자들의 목소리에 평정심 유지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예정된 모임과 행사를 취소하는 연락이 많아지고, 인터넷 쇼핑몰 식품코너 품절 목록이 늘어가면 무언가라도 해야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우스운 건 이게 처음 겪는 일도 아니고 하루 이틀도 아니니 익숙함마저 든다. 그렇다. 월레 소잉카가 말하는 공포의 계절(Climate of fear)이다. 그의 말이 옳다. 우리는 공포의 계절을 살고 있다.

걱정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공포로 자란다. 걱정이나 두려움, 공포란 게 원래 그렇다. 연쇄적이고 순환적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막연한 불안함은 내 마음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 주위 사람들을 감염하고 돌고 돌아 눈덩이처럼 부푼다. 커져버린 집단적 불안감은 위기로 자라고 구체적 현실이 되어 내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나의 공포가 된다. 개인 심리적으로 또 사회 집단적으로 상호 연쇄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게 바로 걱정, 두려움, 공포와 같은 ‘불안한 마음’이다. 불안한 마음의 사회 심리적 속성은 한자(漢字)적 의미에도 잘 내포돼 있다. 두렵고 어리둥절한 상태를 말하는 공황(恐慌)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이나 공포와 같은 심리적 불안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적 침체나 혼란과 같은 사회 위기적 상황이다. 두 의미는 다른 듯하면서도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적 인과관계(因果關係)로 밀접히 연관돼 있다.

공포 또는 그 확산이 사회 심리적이라는 것은 타인의 공포에 대한 사람들의 예민한 반응을 전제한다. 타인의 공포가 모방을 통해 바이러스처럼 동종 복제되어 나에게 이식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공포에 빠진 타인에 대한 나의 인식 자체가 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공포에 빠진 타인에 대한 나의 공포, 즉 ‘공포에 대한 공포’가 확산을 부추긴다. 공포에 사로잡힌 타인들이 식품을 사재기 하리라는 판단이 불안을 재생산하고, 나로 하여금 식품 사재기에 동참하게 한다. 타인들의 주식 투매 행위에서 그들의 공포를 읽은 내가 주식 폭락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덩달아 투매에 나서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집값 상승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집값 폭등을 부추길 것이라는 나의 인식이 마음을 불안케 하고 그래서 부동산 투기 대열에 참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공포에 대한 나의 심리적 우려와 불안이 커지면서 그것이 또 다른 나의 공포가 된다. 그런 식으로 공포는 확산되고 구체적 현실이 되어 사회적 위기로 이어진다.

공포는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릴수록 더 빠지게 되는 늪과 같다. 위험에 예민하게 반응할수록 더 위험해지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포를 제어하고 규제하려는 정부당국의 노력 자체가 공포를 더 부추기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외칠수록 더 불안해지고, 거짓 정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규제할수록 가짜 뉴스는 더 범람하고, 매점(買占) 행위를 엄단한다고 하면 할수록 사재기가 더 심해지는 통제 불능 상황은 공포 확산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정보와 지식의 절대량이 많다고 항상 공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그런데도 공포는 더 빈발하고 더 사회적 문제가 된다. 공포심이 환경 변화의 불확실성과 정보 부족이 초래하는 무지함에 비례하는 것도 사실이고, 미래 예측이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확장되고 깊어지는 것도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상대적 기대와 사회적 상징 체계의 작동방식이다.

사람들의 기대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기대가 높을 때는 많은 정보로도 부족하지만, 낮을 때는 적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떤 경우는 작은 불확실도 문제가 되지만 다른 경우에는 큰 불확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대는 희소성과도 관련된다. 예를 들어보자. 불결함이 일상인 곳에서 웬만한 더러움은 눈에 띄지 않는다. 청결함을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더러움이 문제 될 수 없다. 반대로 청결한 곳이어야 한다는 기대를 가질 때 작은 더러움도 쉽게 눈에 띈다 . 악이 창궐하는 곳에서는 두려울 게 별로 없지만 악이 희소한 곳에서 도리어 두려움이 쉽게 확산한다. 환경에 대해 무지할 때, 웬만한 변화가 공포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지식이 넘쳐나고 모르는 것이 없다는 기대가 팽배한 시대에 설명되지 않는 변화는 작더라도 큰 공포가 된다. 상대적 기대는 작은 것을 크게 만들고 큰 것을 작게 만드는데, 이것은 사회적 상징체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공포는 그 자체로 개인들과 집단 간에 소통되는 상징이고 메시지다. 상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소통의 연결망이고 메시지가 생성되고 전달되는 의미체계다. 그곳에는 공포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 줄어드는지 늘어나는지 등에 관한 사회 분위기를 경쟁적으로 전달하는 다양한 미디어도 있고, 새롭고 자극적인 특별한 이야기를 생산하는 SNS나 인플루언서들도 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소식을 열심히 퍼 나르는 개미들도 있고, 그저 바라보고 침묵하는 수동적 다수도 있다. 이런 네트워크에서 공포는 여느 사회적 상징처럼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거나 간과되는 방식으로 왜곡되고, 성향과 선호에 따라 자의적이고 또 편파적으로 해석되며, 빠르고 폭넓은 전파를 위해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모습으로 각색되고 조명된다. 이런 사회적 상징체계 속에서 막연한 심리적 공포는 점점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 공포로 구성되고 자라난다.

공포가 이 시대의 특성이 되는 이유는 또 있다. 공포가 사회적 상징이고 메시지라는 것은 그것이 도구적이고 전략적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공포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다. 공포 마케팅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 캠페인이나 상업 광고에서 공포 소구(Fear Appeal)의 유용성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소통과 설득’이 하나의 신앙이고 이데올로기인 현대 사회에서 공포 메시지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처럼 유통되고 소비된다. 없는 공포도 만들어내야 하는 경쟁적 상황에서, 이번 사태와 같은 거대한 공포의 분위기는 전략적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어쩌면 큰 기회일지도 모른다. 언론사는 언론사대로, 정치집단은 정치집단대로, 기업이나 전문가 집단은 그들대로, 또 의지를 가진 개인들은 개인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공포의 확산과정에서 각자의 전략적 목적을 가지고 서로 경쟁하고, 훼방하고 또 투쟁한다. 그러면서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수많은 괴기스러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왜곡과 편파, 무지와 불확실성은 높아간다.

결론은 생각보다 간결하고 명확하다. 공포의 확산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 신뢰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적 신뢰의 부족이 공포 확산의 시작이고 신뢰의 파괴가 공포 확산의 끝이다. 타자의 공포에 대한 나의 공포, 대중의 공포에 대한 정부의 불안도 결국 신뢰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 반대도 역시 마찬가지다. 애당초 우리 사회의 신뢰 수준은 바닥이다. 공포가 쉽게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이다. 없던 신뢰를 이 상황에서 새롭게 만들기도 불가능이다. 정부라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바이러스 싸움에서 중요한 게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 역할이라고 한다. 공포와의 싸움에서도 시민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공포와 싸우는 게 그나마 남은 신뢰를 지켜내는 방법이다. 신뢰 없이는 어떤 사회적 협력과 유대도 불가능하고 우리 미래를 위한 어떤 건설적 논의도 가능치 않다. 우리 모두 각자가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휘둘리지 않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안민호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교수
언론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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