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정유정 작가, “인간이 가진 ‘연민’이란 존엄함 믿어”

<28>은 희망 이야기…‘삶의 가치 지켜내는 인간’에 대해 쓸 것

머니투데이 더리더 편승민 기자 입력 : 2020.05.08 10:45
정유정 작가/사진=신형덕ⓒ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는 우리 삶의 모습을 많이 바꿔놨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다 보니 북적이던 길거리는 한산해졌고, 재택 근무, 온라인 개학 등으로 ‘집콕’이 생활화됐다. 집에 틀어 박혀 있는 게 답답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그동안 여유가 없어 책을 못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실제 코로나19 발생 이후 인터넷 서점가의 도서 판매량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독서량 증가와 함께 감염병을 주제로 다룬 소설을 찾는 독자도 급격히 늘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1947년 출간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다시 읽는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꼽힌다. 국내 소설 중에서는 정유정 작가의 <28>과 편혜영 작가의 <재와 빨강>이 주목받고 있다. 

<더리더>는 코로나19 시대에 다시 읽는 베스트셀러 <28>의 정유정 작가를 인터뷰했다. 2013년 출간된 <28>은 눈이 빨개지는 인수공통전염병이 발병한 도시 속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그린 작품이다. 이제 코로나19를 겪어본 독자들이 느끼는 소설의 느낌은 그전과 또 다른 새로움이 있다. 정 작가는 “책을 통해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타당성을 지닌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한 코로나19 사태를 지켜보면서 “두렵고, 고통스럽고, 모욕적이기까지 했던 과정을 묵묵하게 견뎌냈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모두가 박수받아 마땅하다”고 답했다.



코로나19로 독서량 증가와 함께 ‘감염병’ 관련 소설 읽기가 유행하고 있다. 국내 소설로는 작가님의 2013년 작품인 소설 <28>이 재조명되고 있다. 오랜만에 책에 대해 소개한다면


<28>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빨간 눈으로 불리는 인수공통전염병의 창궐로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가 될 것 같다. 전염병의 원인이나 해결과정에 집중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생명의 타당성과 평등성’에 대해 묻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 속 감염병은 사람과 동물 모두에 전염되는 인수(人獸)공통전염병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구제역이었다고 하는데


/이미지=출판사 은행나무 제공
구제역 당시 인터넷에 올라온 돼지 살처분 동영상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 눈보라 치는 밤, 깊은 구덩이 안에서 죽음을 직감한 돼지들이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는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찍은 분도 숲에 숨어서 소리 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내겐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인간 이외의 종을 대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잔혹함에 몸서리가 났다. 귓가에선 필사적으로 울부짖는 돼지소리가, 머릿속에선 ‘우리는 천벌을 받을 거다’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잠들기를 포기하고 책상에 앉아 <28>의 시놉시스를 썼다. 작가 노트에도 썼지만, 나는 이야기를 대부분 어떤 질문에서 출발한다. 28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이었나


비관적인 답이 나왔다. 우리는 소나 돼지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할 거라는 결론이다. 어떤 이는 가족이라 부르던 반려동물을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며 버릴 테고, 어떤 이는 인간의 생명이 우선이라고 합리화하며 진실을 외면할 테고, 어떤 이는 상황을 핑계 삼아 학살을 자행하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했던 행동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될 거다’라고 말이다.
그런데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종을 넘어 ‘생명’ 그 자체에 헌신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다. 인류가 포식자 자질만 가진 사납고 냉정한 종이었다면, 이렇듯 고도로 진화하고 번성한 종이 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인간이 가진 ‘연민’이라는 자질의 존엄함을 믿는다. 동정심과 달리 연민은 상대에 대한 사랑과 이해, 이타적 사고가 바탕이 돼야만 가능한 공감의 감정이다. <28>은 인간이 지닌 이 뛰어난 자질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구심점이자 주인공인 수의사 서재형은 바로 그 자질을 극적으로 확대시킨 인물이자 이야기의 주제를 수행하는 희망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는 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곤 한다.



소설에는 전염병이 강타한 도시 ‘화양’이 등장한다. 전염병 예방수칙 등은 최근 우리도 생활화된 부분으로 낯설지 않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과정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궁금하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경으로 바이러스를 방어할 수는 없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치료제나 백신이 등장할 때까지 최대한 느리게 움직이도록 시간을 벌어, 의료붕괴를 막고 방역체계를 단단히 구축하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 정부는 그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한다. 두렵고, 고통스럽고, 모욕적이기까지 했던 과정을 묵묵하게 잘 견뎌냈다는 자부심도 있다. 정부, 의료진, 국민 모두 박수받아 마땅하다. 

지난달 9일 오후 코로나19 대응 지역거점병원인 대구 중구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서 격리병동 근무를 앞둔 의료진이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다./사진=뉴스1


소설에서는 감염 속도와 치사율로 인해 정부가 도시를 물리적으로 폐쇄함에 이른다. 봉쇄된 도시를 표현하면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참조했다고 하는데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


도시가 봉쇄되는 과정, 붕괴되는 사회시스템,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성, 이런 부분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참조했지만, 이 소설 자체가 80년 광주를 은유하고 있지는 않다. 제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단순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타당성을 지닌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28>을 계기로 독자들이 생명의 평등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참고로 철학자 마크 롤랜즈가 정의한 평등의 의미는 이렇다. ‘도덕과 무관한 특성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다’.



<28>이라는 제목의 의미와 그렇게 지은 까닭은 무엇이었나


소설 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전체 시간이 28일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이젠 코로나19로 인해 28일이라는 시간이 치료제나 백신 같은 무기가 나오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고, 한 도시를 쓸어버리기엔 충분한 시간이라는 게 학습됐을 것이다.
하지만 2013년 당시에는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분들이 그 부분에 의문을 표하곤 했다. ‘정부는 왜 봉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어떤 영웅이 세계를 구해내는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이 컸을지도 모르겠다. 의학은 뚝딱 하는 사이에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마술지팡이가 아닌데 말이다.
덤으로 말씀드리자면, ‘28’이라는 제목은 이 소설을 읽으실 독자에게 드리는 정신적 해열제이기도 하다. 열 받을 때마다 센 발음으로 읽으면 화가 좀 풀리지 않을까 해서…(웃음)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에게 ‘연민’이라는 존엄한 자질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연민하자,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님 소설은 대부분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분위기의 작품이 많은데


나는 기본적으로 대중적 정서의 방향이 제시된 이야기에는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이라든지 평범한 ‘일상’이라든가, 아름다운 연인의 ‘완벽한 사랑’, 혹은 ‘도덕적이고 고결한 삶’의 이야기를 멋지게 쓰는 작가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운명의 변덕에 휘둘린 불운한 인간, 최선을 두고도 파멸로 치달아버리는 어리석은 인간, 욕망에 눈이 멀어 자신을 내던지는 무모한 인간,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지키고자 하는 것을 기어코 지켜내는 인간, 추하고 졸렬한 민낯을 드러낸 야만적인 인간, 죽음 앞에서 분노하고 두려워하는 남루한 인간 등이다.



작가마다 성향에 따라 장르가 나뉜다는 말인가


이런 성향은 ‘작가의 테마’와 관련이 있다. 테마란 ‘내가 이런 걸 써야지’ 해서 만들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타고난 성향과 성장배경, 삶의 경험이 합해져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빚을 지고 감옥에 가는 바람에 소년 가장이 됐던 찰스 디킨스는 아버지를 찾는 소년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했다. 아버지가 권총으로 자살한 헤밍웨이는 본인도 총구를 입에 밀어넣을 때까지 죽음 앞에 선 인간에 대해 썼고, 스티븐 킹은 인간 본성의 공포를 끊임없이 변주하고 있다.
나의 테마는 앞에서 이야기한 ‘인간들’이다. 나는 불운하고 어리석고 무모하고 남루하지만, 자기 삶의 가치를 지켜내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사랑한다. 내 소설 중 세 편은 스릴러 장르고(<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세 편은 성장소설(<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내 심장을 쏴라>, <진이, 지니>)이다. 여기엔 테마와 관련된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 이 두 장르가 제 이야기에 가장 적합하다. 

정유정 작가/사진=채널예스ⓒ


간호대학을 나오고 간호사로도 일하셨는데 어떻게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로 간호사가 됐지만, 그 꿈을 버리지 못했다. 좀 더 일찍 도전하지 못한 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제가 처녀가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돌봐야 할 동생이 셋이나 됐다. 그래서 결혼한 후에야, 남편의 도움과 격려를 받으며 뒤늦게 작가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평소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는지, 작품 구도를 설계하기 위해 본인만의 방법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세상과 인간, 삶에 대해 늘 레이더를 세워두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딱 걸리는 생각들이 있다. <28>을 썼을 때처럼 말이다. 그 생각이 가슴을 뛰게 한다면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은 예스나 노로 답할 수 있는 류의 것은 아니다. 주관식 답을 해야 하는데, 그 답이 세상에 내놓을 만한 의미가 있다’라는 판단이 서면 비로소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가장 먼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이야기할 시공간을 만들고, 적절한 인물을 배치한다. 나는 사전작업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이는 편이다.



<28> 외에도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 작가님을 대표하는 작품이 많다.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내 심장을 쏴라>이다. 힘겨웠던 내 청춘을 은유한 소설이자,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들을 위해 썼기 때문이다. 책 첫머리에 ‘분투하는 청춘들에게 바친다’라고 헌사를 쓴 건 그 때문이다(참고로 <28> 책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헌사가 써 있다. ‘침묵의 겨울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이 있나. 다음엔 어떤 작품으로 독자들을 만날 계획인지 궁금하다


지금 다음 작품을 작업 중이다. 장르는 스릴러고 우리가 추구하는, 때론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행복’이라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년 6월 출간을 목표로 진행 중에 있다. 기대해주시고 기다려주시기 바란다.



‘정유정은 ○○한 작가다’에서 ○○에 들어갈 형용사를 완성한다면. 어떤 작가로 독자들에게 각인되고 싶은가


정유정은 (알고 보면)‘다정’한 작가다. 하지만 독자에게 ‘이야기꾼’으로 기억되고 싶다.


정유정 작가
●1966년 8월 15일 전남 함평 출생
●기독간호대학교 학사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2007년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 수상
●<내 심장을 쏴라> 2009년 제5회 세계일보 세계문학상 수상
●<7년의 밤>(2011), <28>(2013), <종의 기원>(2016), <진이, 지니>(2019) 저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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