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분 내 퇴거, 공사 괴롭힘, 소송 폭탄 등… 영화, 다큐 속 부동산 약자들

[김동하의 컬처 리포트]부동산과 법, 그리고 약자들의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김동하 교수 입력 : 2020.09.01 09:37
▲김동하 한성대학교 자율교양학부 교수
#1. 20년 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군 제대 후 미국 사는 친구의 유혹으로 ‘묻지 마 연수’를 갔는데, 도착하니 친구 부모님은 이사를 갔고 집은 소파 하나 놓인 채 텅 비어 있었다.
멍하니 빈집에서 지낸 지 3일째. 얼떨결에 ‘Inspection’(인스펙션)이란 걸 받게 됐다. 일을 핑계로 자리를 비운 친구는 ‘진정한 첫 실전 영어연습’이 될 거라며 부추겼지만, 알고 보니 렌트 계약이 끝날 무렵 하자를 조사해 보증금(downpayment)에서 삭감하는 꽤 중요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맞은 금발의 중년여성. 긴 막대기를 들고 온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파 소굿’(So far so good, 지금까지는 좋다)이라는 말을 연신 해댔다(당시 난 소파가 정말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방으로 들어가면서부터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방문을 열자 손잡이가 닿는 부분이 까맣게 움푹 파여 있었고, 바닥과 벽에서도 몇 개의 ‘스크래치’를 발견했다. 그녀는 막대기로 해당 부분을 짚고 메모하며 나에게 빠른 말로 질문을 해댔고, 이해가 힘든 나는 ‘Yes’를 연발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돌이켜보면 ‘너희가 그런 거지?’라고 추궁한 것 같은데, 멋모르는 내가 ‘No’라고 할 용기도 확신도 없었다. 

그 결과 이사 전 보증금으로 넣었던 600달러는 200달러로 줄었다. 3~4개 스크래치 탓에 400달러가 깎여나갔다. 나중에 등장한 친구는 ‘이 스크래치는 우리가 한 게 아닌데…’라며 투덜댔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집주인이 아니라 멀리서 온 전문 인스펙션 업체의 인스펙터였다. 재검사는 소송까지 각오하지 않고는 과정, 시간, 비용 모두 어림없는 일이었다. 인스펙션을 받기 싫었던 친구는 나에게 불편을 떠넘겼고, 그 결과 후회했다. 쌤통이라고만 하기엔 슬픈 일이었다.
▲<촐처: 영화 라스트 홈 스틸 컷>

#2. ‘퇴거 날짜가 오늘입니다. 모두 밖으로 나오세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라스트 홈>(원제 <99 Homes>, 2014)에 나오는 대사다. 보안관과 함께 집을 방문한 부동산 관리인 릭 카버(마이클 섀넌 분)는 규정에 따라 퇴거를 명령한다며 인부들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간다.
보안관은 ‘2분 드립니다’라며 가족들이 필요한 것들을 챙겨 밖으로 나갈 것을 종용하고, 동행한 인부들은 2분이 넘자마자 모든 물건을 밖으로 빼 집을 비워버린다.
순식간에 홈 리스가 된 주인공 데니스(앤드류 가필드 분)는 소송을 해보지만, 법원은 부동산 관리인의 퇴거조치가 합법적이라고 판결한다. 

이후 생계의 궁지에 몰린 주인공은, 자신을 쫓아낸 릭 카버 밑에서 일하며 큰돈을 벌게 된다. 자신처럼 월 모기지 이자를 못 낸 사람들을 ‘퇴거’시키는 일을, 자신이 직접 집행함으로써 말이다. 생존을 위해 사람들을 내쫓는 일을 계속하면서 죄책감으로 갈등하는 데니스. 릭 카버는 흔들리는 데니스를 다독이며 이렇게 말한다.
‘집에 감정을 싣지 말고, 물렁해지지 마. 이 나라는 패자(loser)를 구해주지 않아.’

#3. ‘소환장을 받고, 날 왜 고소했는지 전혀 몰랐어요’
‘지난주만 각종 수수료로 400달러를 더 냈는데, 표시된 금액을 안 내면 퇴거시킨답니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연체한지는 하나님도 모를 거예요.’
‘위층에서 공사를 시작했고, 천장에서 물 폭탄이 떨어졌어요. 다음 날엔 침대로 벽돌과 흙이 쏟아졌죠.’
‘소송을 통해 보안관이 연체한 세입자를 구류하고 구치소에 가두도록 합니다. 현대판 채무자 감옥이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검은 돈> 시리즈의 ‘슬럼로드 밀리어네어’ 편에 나오는 증언들이다. 대부분 JK2웨스트민스터라는 회사(이하 쿠슈너 컴퍼니)가 운영하는 건물의 세입자들로, 월세가 밀린 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얘기다. 이 회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가 2세 경영자로 있는 대형 부동산 개발회사다. 

다큐멘터리는 미국의 대형 부동산 회사들과 세입자 간의 법적 분쟁, 특히 쿠슈너 컴퍼니의 악랄한 법적 공격과 그 속에서 희생되는 취약한 세입자들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쿠슈너 컴퍼니는 뉴욕과 볼티모어, 메릴랜드 등지에 수백 채의 건물과 대규모 주택을 보유 중인데, 세입자를 괴롭히는 수법으로 공개된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뉴욕처럼 월세가 오르는 지역에서는 위험하고 몸에 해로운 공사를 계속하는 ‘공사 괴롭힘’ 등의 방식으로 세입자를 내보내려고 애쓴다. 기존 세입자들이 모두 나가야 리모델링 후 임대료 인상으로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볼티모어와 같이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최대한 세입자를 유지하면서 연체료, 각종 수수료 등으로 돈을 ‘쥐어짜기’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큐멘터리는 ‘시민 주거권 운동’을 벌이는 미국의 소수 NGO와 정치인, 언론인, 피해 세입자 다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쿠슈너 컴퍼니 사업의 잔혹한 실체를 폭로했다. 실제 쿠슈너 컴퍼니는 세입자들에게 대규모의 배상액과 법적비용까지 전가시키는 소송을 남발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불법적 관행이 노출되면서 처벌을 받는 사례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이후에도 쿠슈너 컴퍼니는 기관의 대출을 받아 보유 건물과 주택을 늘리고 있다며 다큐멘터리는 막을 내린다.
▲<출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슬럼로드 밀리어네어 화면 캡처>
▲<출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슬럼로드 밀리어네어 화면 캡처>
▲<출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슬럼로드 밀리어네어 화면 캡처>

한 달 전 임대차 보호 3법이 통과됐다.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되는 과정은 일사천리였지만, 전월세 시장의 후폭풍은 만만치 않다. 전세가 없어진다 아니다, 월세로 사는 게 좋다 아니다 등 전례없던 논쟁들도 촉발됐다.
한국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부동산 시장 관행을 긴 세월 동안 유지해왔다. 일본에서 수입된 ‘전세’는 ‘재벌’처럼 한국만의 고유명사가 되어 ‘jeonse’로 번역되고 있고, 바닥, 시설, 영업 등으로 세분화된 권리금과 분양권 딱지 등은 premium이나 goodwill, key money 등 어떤 용어로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한국만의 관행이다.
영화와 다큐, 그리고 필자의 경험 속 장면 모두 일부 해외 사례일 뿐, 한국 임대차 보호 3법의 우울한 미래라고 할 수는 없다. 작품 속 등장한 ‘2분 퇴거조치’나 ‘공사 괴롭힘’, ‘연체료 폭탄’, ‘소송과 구속요구’ 등 ‘기업화’된 거대 부동산 소유주 및 관리자의 횡포는 아직 한국과 거리가 먼 얘길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실성에 토대를 둔 작품과 이야기들이 모두 ‘법’에 의해 희생되는 취약계층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혼란과 혼선보다 더 큰 문제는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의 더 큰 소외다. 역시 한국에만 있다는 ‘정’(情)이나 배려는 없고, 내용증명과 소장이 난무하는 합법적 임대차 세상은 소외계층에게 더욱 두려운 미래다. 으레 때 되면 도배, 장판을 바꿔주던 집주인들도 비용 청구서를 만지작거리게 되진 않을까.
벌써부터 전월세 시장에서는 집주인들이 세입자 면접을 보겠다거나, 아예 안 만나고 로펌이나 전문업체를 써서 관리하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하물며 한국은 전세의 원조였던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범접하기 어려운 높은 소송률을 자랑하는 나라다. 법은 시행됐지만, 우려는 진행형이다. 선진국의 피상적인 면만을 따라, 책상에서 터득한 경제철학으로 세상을 확 바꿔보겠다는 과감한 입법은 아니었는지. 매달 렌트비에 쪼들린 적도, 자주 이사 다니며 인스펙션이나 하자보수를 걱정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입김이 많이 작용했던 건 아닌지 말이다.
지금이라도 전월세 시장의 현실과 직접 소통하면서, 더 많이 대화하고 더 많이 토론하길 바란다. 현실세계의 애환이 녹아 있는 컬처를 통해, 이성 아닌 감성을 통해서도 말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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