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최후의 날에 황진

리더를 위한 북(book)소리

머니투데이 더리더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입력 : 2021.11.03 09:46
▲최보기 북칼럼니스트
BC480년 페르시아군이 그리스로 밀려들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는 결사대 300명을 이끌고 테르모필라이 협곡으로 향했다. ‘무기를 내놓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통첩에 레오니다스는 Molon Labe! (몰론 라베, 와서 가져가라!)를 외쳤다. 이 전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300>이다.

‘와서 가져가라!’는 결기는 임진왜란 때도 있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해로가 막힌 왜군은 조선의 곡창이자 병참기지 호남을 치기 위해 1만5000 군사를 보내 전주를 노렸다. 왜군이 전주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은 금산에서 이치(배티재), 진안에서 웅치(곰티재), 장수에서 남원을 통하는 것이었다. 호남에 남아 있는 군사는 의병까지 2500명에 불과했다. 전라절제사 권율은 이들을 쪼개 웅치, 이치, 남원에 마지노선을 구축했다.

웅치 전투에서 제 1방어선을 맡은 의병장 황박 부대 200명이 장렬하게 무너졌다. 제 2방어선 나주 판관 이복남 부대 500명도 무너졌다. 고개 꼭대기 제3방어선은 김제 군수 정담과 300명의 군사들이 최후를 기다렸다. 그들은 한 명 남김없이 목숨을 바쳤다. 

적장 안코쿠지는 조선군의 시체를 수습해 무덤을 쓰고 ‘조선국의 충성스러운 넋을 조상한다’고 쓴 푯말을 세운 후 웅치를 지나 안덕원에 머물렀지만 뒤늦게 남원에서 달려온 동복 현감 황진 부대에게 기습을 당해 금산으로 철수했다. 연이어 이치대첩이 벌어졌다. 

이치 사수 지휘봉은 황진에게 주어졌다. 황진의 노련한 전략전술과 결사항쟁에 나서는 조선군의 투지에 밀려 타격을 입은 왜군은 이치를 넘지 못하고 금산으로 후퇴해야 했다. 호남을 왜군으로부터 지켜냈던 것이다.

1년 후인 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 목사 김시민에게 패한 1차 진주대첩을 설욕하고, 호남을 궤멸시키라’는 명령을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내렸다. 왜군 본대 10만 명이 진주성으로 향할 때 조선군 지휘관들의 의견이 갈렸다. 도원수 권율은 후퇴를 결정했고, 의병장 곽재우도 수성을 포기했다. 

진주성에는 6만여 명의 백성이 있었다. 나주 의병장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뚫린다’며 가장 먼저 부대를 이끌고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뒤를 따랐다. 성안 군사는 관군과 의병을 합해 6000명에 불과했다.

무관 황진에게 사령관 격인 순성장 임무가 주어졌다. 그들은 최후 1인까지 진주성에서 순국했다. 중과부적으로 진주성 결사대는 패했지만 마찬가지로 큰 타격을 입은 왜군 역시 호남 진격을 포기했다. 이순신 장군은 황진 장군의 순국 소식을 듣고 통곡했다. 백성들은 당시 ‘바다에 이순신, 땅에 황진’이라고 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보다 장엄한 ‘웅치, 이치, 2차 진주성 대첩’ 선봉을 맡아 종횡무진했던 황진 장군 역시 항복을 요구하는 왜장에게 외쳤다.
“와서 가져가라!”

▲『임진무쌍 황진』 / 김동진 지음 / 교유서가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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