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경영자 장수태왕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머니투데이 더리더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입력 : 2018.01.24 14:02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년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광개토태왕을 제국의 건설자라고 한다면, 그의 아들 장수태왕은 제국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장수태왕의 이름은 거련(巨連)으로, 크게 이어받았다는 뜻이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이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장수태왕은 무려 98세까지 장수하며 79년(412~491)간 통치하면서 고구려 제국을 완성시켰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創業易守成難)’는 옛말이 있듯이, 수성의 군주 장수태왕의 리더십은 아버지 광개토태왕에 비견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강한 자부심을 가진 장수태왕
고구려를 대표하는 유물인 광개토태왕릉비는 414년 아들인 장수태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광개토태왕릉비의 내용은 장수태왕에 의해 최종적으로 검토되고 확정되었다. 그 내용에는 고구려가 하늘신(天帝, 皇天)의 아들이며, 알에서 태어난 추모왕이 세운 신성한 나라이며, 세상 한 가운데에 있는 위대한 나라임을 선언하고 있다. 장수태왕은 고구려인의 강력한 자부심을 담은 글을 거대한 비석에 새기게 했다. 비문은 광개토태왕을 기리는 글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자의식은 장수태왕의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중원고구려비는 그의 재위 시절 고구려와 신라 관계를 보여준다. 비문에는 두 나라가 세세토록 형과 동생같이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하늘의 질서를 지키자는 글귀가 있다. 신라 등을 제후국으로 거느리며 하늘의 질서를 수호하는 제국 지배자의 각오를 보여주는 말이다. 장수태왕은 스스로를 신의 자손의 사는 천하에서 가장 신성한 땅을 다스리며 천하 질서의 수호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태왕이었다.

장수태왕 시기 고구려 지도 - 김용만 저, 『지도로 보는 한국사』, 64쪽.
과감하지만, 치밀한 행동가

《삼국사기》는 그가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방한 그는 과감한 행동가였지만, 철저한 준비 후 계산된 행동을 하는 인물이었다. 427년 그는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전란으로 인해 임시로 수도를 옮긴 일은 고구려 역사에서 몇 번 있지만, 장수태왕의 천도는 국가 중심을 완전히 옮기는 것이었다. 따라서 임시 천도와는 크게 달랐다. 국내성은 압록강 유역의 산간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적을 방어할 때는 좋지만 제국의 수도로는 면적이 좁고 교통이 불편했다. 반면 평양은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고, 교통 조건이 좋으며, 국내성보다 따뜻했다.

천도는 고구려의 장래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이를 시행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 국내성에 기반을 가진 귀족들의 반발, 대규모 인구의 이동, 교통망과 방어망의 재정비, 그리고 무덤과 신전에 모신 선조들에 대한 제사 등 여러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평양 천도는 단기간에 실행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장수태왕이 재위 15년이 되어서야 천도를 실행한 것은 그가 철저한 준비 끝에 행동에 옮기는 성격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의 이런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가 475년 백제 정벌이다.

첩자를 이용한 백제 정벌
장수태왕의 79년 재위 기간은 대체로 평화로운 시기였다. 오랜 평화를 깬 세력은 백제였다. 백제는 396년 광개토태왕에게 패한 이후 수십 년간 고구려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469년 개로왕이 장수를 보내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472년에는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협공하자고 요청했다. 그런데 북위는 백제의 요청을 거절하고, 도리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사신을 보내온 사실을 알렸다. 북위는 강력한 고구려와 전쟁할 의지가 없었다. 북위로부터 백제가 고구려에 대항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장수태왕은 백제와 전쟁을 결정했지만, 당장 공격하기보다는 철저한 준비부터 했다.

장수태왕은 백제에 침투해 첩자 활동을 할 사람을 구했고, 자원한 승려 도림을 보냈다. 바둑 고수인 도림은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하여, 그와 바둑을 두면서 친근해졌다. 도림은 개로왕이 자신의 말을 신뢰하게 되자, 개로왕에게 “성곽과 궁궐을 수리하고, 선왕들의 무덤을 수리하며, 강변에 둑을 쌓는 일을 해서, 왕의 위엄과 국력의 강대함을 보여야 이웃나라들이 감히 엿볼 생각을 못할 것입니다.”고 이야기를 건넸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에 따라 궁궐과 선왕의 무덤, 그리고 거대한 제방을 건설하는 일을 즉각 시행했다. 그러자 대규모 공사 때문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 백제의 창고가 비었고,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시달리느라 곤궁해졌다. 대규모 공사로 백제 국력이 약화됨을 본 도림은 돌아와서 장수태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장수태왕은 즉시 3만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해, 수도인 한성을 포위했다. 개로왕은 도망치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이때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했고, 백제는 수도를 공주로 천도해야만 했다.
그가 472년 곧장 백제를 치지 않고 적이 약화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한 것은, 백제와 정면으로 싸워 굴복시킬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북쪽에서는 물길 부족이 고구려를 배신하고 북위 및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고, 국경을 맞댄 북위도 잠재적인 적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제국을 경영하려면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긴 하지만, 힘을 함부로 쓸 경우 틈이 생겨 수많은 적들의 공격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손해를 보면서 최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통치술과 통찰력을 갖춘 리더십이 필요하다.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리더십을 갖춘 그는 제국에 적합한 리더였다.

중원고구려비 - 장수태왕의 남방 경영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비문에는 고구려 인의 강력한 자부심이 표현되어 있다.
단호하고 과감한 리더

407년에 건국된 북연은 고구려와 북중국의 패자 북위와의 완충 역할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409년 북연왕의 동생인 풍비를 409~414년까지 인질로 잡고 있었고, 상국(上國)의 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북연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북연이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북연은 고위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와 구원을 요청했다. 반면 북위는 436년 북연을 공격하기 직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와 양해를 요청했다.

하지만 장수태왕은 북위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장수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주고, 북연 사신을 따라 북연의 수도 동쪽 화룡으로 진격해 들어가게 했다. 한편 북연의 수도 용성(현 요녕성 조양시)에서는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먼저 맞아들이겠다는 친북위파가 있었다. 하지만 북위군은 성안 진입을 주저했다. 이때 고구려군은 동문을 들어가 친북위파를 제거하고, 용성을 장악했다. 북위가 북연을 차지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갈로와 맹광은 용성에서 재물을 획득하고, 남아있는 주민들과 북연의 왕과 귀족들을 고구려로 이주하도록 하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이동하는 북연의 부녀자들에게 갑옷을 입혀 행렬 안쪽에 서게 하고, 고구려군은 행렬 끝에서 기병을 앞세워 진군하게 했다. 고구려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무려 80리나 되는 거대한 규모였다. 이 모습을 본 북위군은 감히 고구려와 싸울 생각을 못했다.

비록 북연의 수도는 북위가 차지했지만 빈껍데기였다. 고대에는 땅보다는 사람과 재물의 가치가 더 컸다. 북연의 왕과 백성들, 재물은 모두 고구려가 차지했다. 북위는 북연의 왕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해왔지만, 장수태왕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북위 조정에서는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논의했지만, 결국 고구려와 전쟁을 포기했다. 당시 북위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주변에 북위의 약화를 기다리는 적들이 많았다. 따라서 막강한 고구려와 전쟁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한편 고구려 변방에 살게 된 북연의 왕은 고구려에 불만을 품고 송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맞아줄 것을 요청했다. 송이 사신을 보내와 그를 데려가려 하였지만, 장수태왕은 무력을 사용해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송은 장수태왕의 의지를 거역하지 못했다.

전쟁 위기감이 잠시 고조되기는 했지만, 북연에서 많은 물자와 인구를 가져옴에 따라 고구려는 엄청난 실익을 챙길 수 있었다. 만약 장수태왕이 북위와 전쟁하는 것이 두려워 주저했다면, 북연은 고스란히 북위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위는 더 강해졌을 것이고, 고구려는 북위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또한 주변 제후국에 대한 고구려의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연 진공 작전의 성공은 고구려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 장수태왕의 과감하고도 미래를 본 리더십이 없었다면, 고구려 제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제국의 경영자 장수태왕
장수태왕 시기 고구려는 여러 제후국을 거느렸고, 만리장성 동쪽 천하를 지배하는 제국이었다. 동아시아 정세는 북중국의 북위, 남중국의 송(제), 유목 세계의 유연과 고구려가 4대 강국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며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장수태왕은 최강대국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서 유연과 송과 연결하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유연과 송은 서로 국경을 맞대지 않았지만, 고구려는 육로로 유연, 해로로 송과 연결할 수 있었다. 439년 고구려는 송나라에 말 8백 필을 보내준다. 송나라가 북위를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8백 필의 말을 해로를 통해 보낼 만큼 고구려는 엄청난 해상 운송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4강 사이에 세력 균형의 키는 고구려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기록과 이를 그대로 인용한 《삼국사기》에는 장수태왕이 북위와 송(제)에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조공이란 표현은 중국의 일방적 표현이며, 고구려가 북위와 송(제)보다 하위 국가가 아니었다. 북위는 외국 사신들의 숙소를 둘 때, 외교 접대를 할 때 고구려는 중국의 정통성을 놓고 겨루는 남중국의 제나라와 고구려를 동등하게 대접했다. 그래서 제나라가 북위에게 항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북위는 고구려를 의식해 백제의 구원 요청도 묵살했었고, 북위의 효문제는 장수태왕이 서거하자 하얀 소복을 갖춰 입고, 애도 의식을 정중하게 거행할 정도로 고구려를 존중했다.

동아시아 4대 강국으로 고구려가 군림할 수 있게 된 것은 장수태왕이 제국의 운영을 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력과 외교를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유연과 고구려 사이에는 지두우(현 네이멍자치구) 세력이 있었다. 장수태왕은 479년 유연과 더불어 지두우 분할 계획을 세우고 군대를 출정시켰다. 고구려군과 유연군이 출동하자 지두우는 남쪽으로 밀려 내려가고, 그 여파는 거란, 해 등 여러 유목 부족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만약 지두우가 북위와 연결하고, 지두우 동쪽에 있는 물길 등이 북위와 동맹을 맺게 되면 고구려 세력권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고, 고구려가 북위를 견제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장수태왕은 고구려 세력권 내부에 반란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지두우 정벌에 나섬으로써, 유연과 직접 국경을 맞대어 물길 등이 북위와 접촉할 통로를 막아 고구려 세력권을 확고하게 통제하는 정책을 실행한 것이다.

▲고비사막에 위치한 유목민의 성황당인 오보. 장수태왕 시기 고구려는 고비사막 일대까지 활동무대를 넓혔다.
제국 경영자의 리더십

장수태왕은 호칭 그대로 100세 가까이 장수하며 오랜 기간 고구려를 통치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그의 내치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백제가 북위에 보낸 외교문서에 그가 신하들을 마구 죽이고,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져 고구려가 멸망할 지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기록은 백제가 고구려를 비방한 글이라, 모두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물론 천도 과정에서 귀족들이 반발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리고 그의 성격상 이들을 강력하게 제압하면서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재위하던 시기 고구려는 경제, 문화, 사회 모든 면에서 크게 발전했고, 국력도 월등히 강해졌다.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는 고구려인에게도 존경과 신뢰를 받는 리더였을 것이다.

그의 업적 가운데 평양 천도만이 지나칠 정도로 부각되어, 그가 남진 정책을 수행하고, 북진을 포기해 고구려 발전을 위축시킨 임금이라고 잘못 알려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그 반대였다. 장수태왕은 만리장성 동쪽의 광활한 지역을 고구려 세력권으로 삼았고, 그 내부에 작은 세력(백제, 물길, 신라, 거란, 해, 실위, 부여 등)들이 외부 세력과 연결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압했고, 북위, 송 등이 고구려 세력권 내부 문제에 간섭하는 일은 단호하게 막아냈다. 504년 북위 효문제는 고구려가 해외를 마음대로 정벌해 교활한 오랑캐인 구이를 모두 정벌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고구려 세력권 안에 일을 간섭하지 못했다.

장수태왕은 고구려를 확고한 동아시아 4대 강국이자, 제국으로 만든 리더였다. 그는 과감하지만 결코 서둘지 않으며, 철저한 준비를 한 후 행동하고, 큰 안목에서 국제 정세를 좌지우지한 제국의 경영자였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다.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을 저술하여 고구려 역사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서 보여준 생활사 연구로,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지 않았을까를 화두로 삼아 역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 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고구려, 수, 당, 북방제국의 대립관계’ 등의 논문과 <고구려의 발견>,<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조선이 가지 않은 길> 등을 저술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mail protected]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