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함과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 입력 : 2019.06.19 15:58
토정 이지함(1517~1578)은 독특한 행동을 많이 해 기인(奇人)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시대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그는 백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유학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권도(權道) 즉 상황에 따라 목표한 바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펼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영국의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저술한 것처럼, 이지함도 나라가 부유해지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제시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관직에 있었던 기간은 대단히 짧지만, 백성들을 위해 일하고, 백성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은 목민관이었다. 그의 행적과 사상을 통해 지도자의 리더십을 생각해보자.

이지함이 살았던 시대환경
이지함은 고려 말의 유학자인 이색의 7대손으로, 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로 1517년 충청도 보령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던 해 조선에서는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한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해 도학(道學)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성리학 원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조광조는 현실보다는 이상을 실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의 무리들은 민본정치를 겉으로 내세웠지만, 민본보다 중요한 것은 사림파의 정치적 지분의 확대였다. 사림파의 등장으로 기존의 훈구파와 정치적 갈등이 심해지기도 했다. 사림파의 리더 조광조는 송나라에서 신법(新法)을 시행했던 왕안석(1021~1086)을 이렇게 비판했다. “왕안석 같은 자는 학술이 정밀치 못하여 제왕의 대도를 알지 못하고 도리어 부국강병의 패술(霸術)을 본받고자 하였으니, 공부하는 자가 단순히 부국강병으로 계책을 삼는다면 이것을 어찌 유자(儒子)라 할 수 있겠는가?” 조광조 등 사림파는 백성들에게 필요한 경제정책을 도외시했다. 이황, 기대승, 이이 등 걸출한 성리학자가 연이어 등장하여 이기론(理氣論)을 비롯해 성리학 연구를 심화시켰지만, 동시에 현실과 차츰 괴리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빠져들고 있던 것이 당시 시대 상황이었다. 상업을 발전시키고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이익을 탐하게 하여 풍속을 어지럽히는 폐단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여겨, 시장을 열지 못하게 하자는 상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다. 양반 지배층과 백성의 간극은 크게 벌어져, 양인에서 노비로 신분이 떨어지는 자들은 늘어가고, 백성의 삶이 크게 악화되던 시대였다.

▲이지함 표준 영정 : 충남 보령시에 있는 화암서원에서는 이지함의 표준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사진=김용만 제공
백성들의 삶과 마주한 이지함

이지함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와 노장사상에도 이해가 깊었던 서경덕(1489~1546)에게 다방면에 걸친 학문을 배웠고, 조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조식, 이이와도 친분이 깊었다. 이지함은 관직에 뜻을 두고 과거를 보려고 하였으나, 1547년 자신의 절친한 벗인 안명세가 을사사화의 여파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관직에 오를 것을 포기하고 과거를 보지 않는다. 게다가 1549년 장인인 이정랑이 충청도를 거점으로 한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는 일이 생겼다. 그러자 이지함의 처가는 풍비박산이 나고, 이지함도 연좌법에 걸려 천민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지함은 처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기를 잡고 소금을 만들어 팔았다. 또한 그는 고향인 보령현에 위치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가 가을에 수확해 바가지로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년 만에 수천 섬의 양곡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양곡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했다. 그는 조상의 묘가 바닷가에 있어 조수에 쓸릴 염려가 있게 되자, 제방을 쌓는 큰 공사를 벌였다. 막대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그는 물고기와 소금을 파는 상인들에 끼여 온갖 장사를 했다. 또 흉년을 만나면 구호곡을 마련하고자 가끔 큰 장사를 벌여 이득을 얻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개간사업도 하여 수천 석의 곡식을 장만했지만, 이것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단순한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치기도 하며, 자급자족의 능력을 키울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이지함은 다른 양반들과 달리, 직접 경제활동을 하여 돈을 벌었고, 백성들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준 인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빈한한 삶을 살았다.

이지함에게는 ‘마포 강변에 지은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을 가진 토정(土亭)이란 호와 수선(水仙)이란 호가 있다. 그는 마포에 흙집을 짓고 살기도 했지만, ‘물의 신선’이라 불릴 정도로 자주 배를 타 전국의 바닷가를 돌아다녔다. 또 배를 직접 몰기도 했는데 조류와 풍랑 등을 정확히 예측해 안전하게 제주도에 3번이나 다녀오는 등 바다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짚신에 죽립 차림으로 섬과 해안가를 왕래하며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마주했다. 그는 자신이 백성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방안을 모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지함은 당대의 명사들은 물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사귀었다. 그의 제자 가운데는 노비출신인 서기 등이 있었고, 역시 천민출신이지만 당시 최고의 이론가로 소문난 송익필과도 특별한 친분을 맺었다. 이항복이 그에게 숨은 인재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하자, 이지함은 어업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상도(商道)를 지킨 사람을 자신이 존경하는 첫 번째 인물로 꼽고,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까지 물어보고자 했다고 하였다. 어민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자 했던 이지함은 경전이 아닌, 실생활에서 정치의 도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가 두 번째 인물로 꼽은 인물은 60살이 넘어 자신에게 배울 것을 청한 서치무다. 이지함의 제자이기도 한 서치무는 겨우 글자나 아는 인물이었지만, 60이 넘어 공부를 시작해 1년 동안 그에게 배우면서 매양 게을리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지함은 학문적 식견이 없던 서치무를 제자도 맞아들여 가르치고, 그를 칭송한 것은 보통의 백성들도 노력가면 충분히 최고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백성들을 존경하고, 그들로부터 배우고자 한 이지함은 참된 지식인이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도(道)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지함은 젊은 시절 친구와 처가의 불행으로 인해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지만, 결코 관직에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벼슬과 권력을 욕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지함이 쓴 글을 후손이 모아 만든 <토정유고>에 실린 <과욕설(寡慾說)>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도(道)로 나가는 중요한 길”임을 설명하고 있다. <대인설(大人說)>에는 그가 추구한 가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에게는 네 가지 바람이 있다. 안으로는 신령스럽고, 강하고, 밖으로는 부유해지고, 귀해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면서 능히 신령스럽고, 다투지 않으면서 능히 강하며, 욕심을 내지 않으면서 능히 부하고, 벼슬하지 않으면서 능히 귀한 것은 오직 대인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노자, 장자의 역설적 비유법을 이용해 대인의 삶을 말하고 있다. 이지함은 모든 세속적 욕구를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가치에 도달할 수 있음을 하였다. <피지음설(避知音說)>에서는 교유관계를 맺어 정실로 얽히는 것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오직 믿을 것은 산수와 자연임을 강조했다.

처사의 삶을 지향하는 그의 인생관이 글들 속에서 드러난다.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처사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품과 학식이 널리 소문이 났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이름 높은 조헌 등이 찾아서 그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1570년 그는 선조의 사면 조치에 의해 양반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당시 조선에서는 초야에 묻혀 있는 유능한 선비를 등용하는 유일(遺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1573년 이지함의 높은 언행이 조정에 알려져, 유일로 천거되어 종 6품직의 벼슬에 올라 포천현감에 임명되었다. 이지함은 자신이 공부한 나라를 다스리는 도를 실천하고자 현감에 부임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저서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작품일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이지함의 여러 능력이 예언가로 신비화되었고, 백성들 사이에 지명도가 높고 의지하고 싶은 인물로 남은 그의 호를 누군가가 책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빌려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사진=김용만 제공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하라

이지함은 포천현감에 부임했을 때 베옷과 짚신과 베로 만든 삿갓을 쓰고 관청에 올랐다. 또한 식사 또한 성찬을 거부하고, 백성들이 먹는 잡곡밥 한 그릇과 나물국 한 대접만을 먹을 뿐이었다. 그는 특권 의식을 내세우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어려움을 함께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포천현은 전국에서 가장 곤궁한 지역이었다. 양민은 적고, 노비가 많으며, 토지도 척박해 풍년이 들어도 백성들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곳이었다. 이지함은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산에 묻혀 있는 은을 제련하거나 옥을 캐내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구워 이것으로 양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과 광공업 등을 말업(末業)이라고 천시했던 조선에서, 이지함은 백성들의 삶의 근본인 농업이 부족하다면, 말업인 상공업이 보완해서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땅과 바다는 재물의 창고로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섬과 바다의 가치를 누구보다 높게 평가했던 이지함은 정부에 전라도 망경현의 빈섬과 황해도 풍천부의 초도정(椒島井)을 포천현에 소속을 변경시켜달라고 요청했다. 포천현에 곡식이 부족하니, 이 지역에서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우면 수년 내에 수천 석의 곡식을 얻을 수 있어 빈곤을 탈피할 수 있다고 했다. 포천현의 빈곤 문제가 해결되면 타 지역도 이처럼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타 지역까지 경제적 범위를 확대해 빈곤문제를 해결하려는 획기적인 개혁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지함은 전라도민의 가난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유구국은 물론 서양 상선과도 교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실학자인 박제가의 해외통상 주장보다 200년 이상 앞선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은광 개발을 철저히 억제하고 있었고, 외국과의 교역은 물론, 국내 상업마저 억제하고, 오직 농업만을 중시하는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시대를 앞서간 그의 생각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현실에 벽에 부딪혀 실망한 그는 결국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말았다.

포천현감에서 물러난 그에게 다시금 목민관으로 일할 기회가 왔다. 1578년 4월 아산현감 윤춘수가 백성을 구하지 않고 탐욕을 부려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지자, 그해 5월 윤춘수의 후임으로 이지함이 아산현감에 부임하게 되었다. 아산현에는 굶주린 백성, 병약자들이 너무 많았다. 이지함은 서둘러 걸인청(乞人廳)을 세우고 걸인과 노약자 구호에 나섰다. 이지함은 모여든 걸인들에게 그저 먹을 것을 나눠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맞는 수공업을 가르쳤다. 그는 짚신이라도 삼게 하여 걸인의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주었다.
 
이지함은 이때 군역 문제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군인의 정원 감소와 대신 복무하는 대역제를 폐지할 것을 건의했다. 군역 문제는 당시 백성들의 삶을 괴롭히는 가장 큰 문제였다. 이지함은 또한 과다한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땅과 집을 팔고 외지로 떠나는 백성들이 없도록 세금을 줄여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지함의 상소문에는 “국가가 백성을 위해 해준 게 없으니 백성 또한 나라를 위해 죽을 자가 없을 것”이라는 글이 담겨 있다. 백성을 부림을 받는 개돼지가 아니라, 국가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대접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다. 그런데 상소문을 올린 지 얼마 안 되어 이지함이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그의 상소문은 묻히고 말았다.

▲이지함 동상 : 마포구 용강동 4거리 토정로에 위치한 이지함 동상/사진=김용만 제공
이지함에서 리더의 조건을 배운다

이지함은 짧은 기간 포천현감과 아산현감을 지냈을 뿐이지만, 후대까지 백성들이 의지하고 믿는 훌륭한 목민관으로 기억되었다.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경제적 지식을 바탕으로 비록 정부에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제안했을 뿐만 아니라, 목민관이 되어서는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백성들이 당장 필요하고 원한 것은 고매한 이념이나 명분이 아니라, 먹고 살아가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는 위정자들의 따뜻한 배려와 수고다. 이지함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무엇인지를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농업만이 아닌, 상업, 어업, 수공업, 광업 등에서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을 찾아내어 이를 몸소 실천하는 열린 사고를 가진 그는 유교 이념에 경도된 사대부 사회에서는 기인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후대에 그의 호를 빌려 제목을 붙인 책으로 여겨지는 <토정비결>이 등장한 것은, 그가 백성들의 사랑과 신뢰를 얻는 진정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실학의 선구자로서, 시대를 앞선 정책을 제시하고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양성을 인정하고 열린 생각을 갖고 무엇이든 열심히 배우려고 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을 삶의 근간으로 삼았기에, 재물과 규범에 구속받지 않았다.

아무리 고매한 명분과 이념을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백성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없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보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치를 하는 자들은 결코 후대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정치현실을 보면서 이지함과 같이 후대에도 길이 존경받을 만한 진정한 리더의 존재가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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