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 어떻게 경선 치렀을까?

홍세미 기자입력 : 2017.01.10 10:17

‘조기 대선’정국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전무후무한 ‘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에서는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시켰다. 박 대통령은 이날 7시부터 직무 정지 상태다. 빨라진 대선 시계에 대응하는 차기 대선 주자들에게 ‘경선’은 어떻게 구성될까. 역대 대통령은 어떤 경선방식으로 선출됐고,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더리더가 살펴봤다.

14대-김영삼 전 대통령(YS)
‘자유경선제’의 의미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에 확보하자 위기감을 느꼈다. 1992년에 있을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정권 재창출을 하기 위해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1990년 1월 22일 3당합당을 주도한다. 제2야당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가 대표인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이었던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이 합쳐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정권 이후 ‘최초’로 경선을 통한 후보자 선출이었다. 경선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선출로 이뤄졌다. 민자당 대의원 인원은 총 7천여명이었다. 무기명 직접투표로, 1인 1표 행사할 수 있었다. 경선 룰은 다음과 같다.


1. 전당대회에서 재적 대의원 과반수 득표한 자가 선출,
2. 1차 투표에서 과반수 얻은 출마자 없으면 2차 투표 실시,
3. 2차 득표에서도 과반수득표자 나오지 않으면 2차 투표의 최고 득표자와 차점자 대상으로 결선투표 실시, ‘다수득표자’ 확정이다.


무려 세 당이 합쳐졌다. 한 당에서 한 명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과정도 만만찮은 과정이다. 또 처음으로 시행되는 ‘대통령 후보자 경선’이었다. ‘경선’에 대한 룰도 정확하지 않을뿐더러 투표하는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았다.


‘자유경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누구라도 경선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경선의 의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의중’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3당 합당 당시 대의원은 5천5백80명이었다. 계파별로는 민자당 65%, 민주당 24%, 공화당11%였다. 유리한 당은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민자당이다. YS는 민주당 소속이다. YS는 민주화 운동으로 대중적 인기는 있었으나 후보자는 대의원이 선출했다. 당시 24%로 승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민자당의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박태준 전 최고위원이었다. 박 전 최고위원은 민자당 관리자였다. 그러나 박 전 최고위원이 불출마 선언했다. 박 전 최고위원을 대신해 민정계에서 이종찬 전 의원이 출마했다. 결국 6천6백60명 참여한 1992년 5월 20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66.3%(4,418표), 이종찬 33.2%(2,214표) 기권222표·무효28표로 YS가 최종 선출됐다.


결국 YS는 민정계가 과반이 넘는 당에서 60%이상의 득표를 보여 최종 선출됐다. 당에서 24%의 계파를 가지고 있었던 YS가 전당대회에서 선출됐다.


15대-김대중 전 대통령(DJ)
‘국민참여 경선제’ 태동

1992년 대선에서 패배한 DJ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사실상 정계에 복귀했다. 민주당이 수도권을 장악하는 등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자 DJ는 차기 대선 주자로 다시 우뚝 섰다.


1995년7월18일 공식적으로 정계 복귀를 선언한 DJ는 민주당 탈당파들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7년 대선을 1년 앞두고 치러진 경선에서 DJ의 상대는 정대철 전 의원과 김상현 지도위의장이었다. 이들은 당내에서 ‘비주류’였다. 이들은 최초로 ‘국민 경선제’를 제안했다. 국민들이 직접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방식이다. 김상현 지도위의장은 대의원 수를 10배 이상 늘려 ‘미국식 예비선거’를 치르는 것을 요구했다.


김 의장은 3월 당무회의에서 전당대회에서 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것을 골자로 한 당규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박지원 당시 기조실장은 “국민경선제는 통합선거법에 어긋나고 금권, 타락선거와 정보기관의 공작 가능성이 있고 최소한 60~70억 원의 거액이 들며 경선 과정에서의 부담으로 대선에서 불리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국민 경선제는 ‘공천 줄세우기’, ‘돈 경선’ 등 부정부패를 없애는 민주적인 제도로 꼽혔다. 국민들이 직접 대선 주자를 뽑자는 의도다. 당 지도부의 거절로 결국 1997년5월19일 열린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DJ는 전체 투표수 4천1백57표 중 3천2백23표를 얻어 77.5%의 압도적인 득표를 보이며 후보로 선출됐다.


16대-노무현 전 대통령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참여 경선제’

DJ의 레임덕으로 위태로워진 민주당은 ‘특단의 조치’를 내세우게 된다. 민주당은 ‘민주당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위원장 조세형)’을 꾸리고 우리나라 정치 현실에 맞는 ‘경선 룰’을 구상했다. 1만 명 안팎의 대의원만 참여하는 체육관 선거에서 탈피하고 2002년 월드컵에 자칫 묻힐 수 있는 대통령 경선을 ‘국민적인 잔치’로 승화시킨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이에 일반 국민도 소정의 절차를 거치면 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뽑는데 표를 던질 수 있는 국민 참여 경선제를 도입키로 결정했다.


국민경선이 도입되기 전 ‘부동의 1위’는 이인제 전 의원이었다. 국민일보에서는 ‘이인제의 독추 제체로 민주당 대선 경선 재미가 반감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정도로 이 전 의원의 기세는 등등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미만이었다. 이 전 의원을 비롯, 정동영 의원과 한화갑 현 비서실장이 후보로 출마했다. 국민경선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곳은 제주다. 이곳에서 한화갑 후보가 뜻밖의 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예상 밖 1위에 모두 당황했다.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이 전 의원은 2위를, 노 전 대통령은 3위를 차지했다.


정치권의 이목은 두 번째 경선 지역인 광주로 향했다. 광주는 DJ의 정치적 기반 기반이자 민주당의 텃밭이다.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민주당 대선 후보를 결정짓는다. 광주에서 노 전 대통령은 1위를 기록했다. 노 전 대통령은 595표를 얻어 이 전 의원(491표), 한 후보(280표)를 꺾고 1위로 등극했다. 여기서부터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예견돼 있었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상승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의 ‘양자대결’에서 노 전 대통령이 승리한다는 조사도 보도되며 ‘돌풍’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은 호남뿐만 아니라 영남권도 석권했다. 경선이 끝난 이후에는 전무후무한 ‘지지율 60%’를 달성했다. 광주에서 시작된 노풍(盧風)은 결국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17대-이명박 전 대통령(MB)
MB와 朴대통령, 운명 가른 ‘경선 룰 변경’

MB는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 버스체계 개편(환승체계 도입) 등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보다 10~20%정도 우위를 보였다. 박 대통령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면서 ‘천막 당사’등 위기에 빠진 한나라당을 구했다는 평을 받았다. 여론전에서는 MB가, 당원 민심에서는 박 대통령이 앞섰다. 한나라당의 17대 대선 경선 룰 비율은 대의원(20%)+당원(30%), 공모국민(30%)+여론조사(20%)으로 구성됐다. 즉 당원50%, 국민50% 비율이다. 당심과 민심을 1대1로 맞춘다는 의미다. MB와 박 대통령 모두 이 룰에는 이의가 없었다.


다만 MB는 국민 선거인단을 늘리자고 주장했다. 당초 한나라당 선거인단은 3~4만 명이었다. 전체 선거인단 규모를 전체 유권자의 1%인 40만 명 내외로 늘리자는 입장을 고수했다.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보이는 MB는 선거인단이 늘어날수록 자신에게는 유리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시기’를 8월 이후로 늦추자고 제안했다. 당초 합의된 경선 시기는 6월이었다. 당심은 잡았지만 민심은 잡지 못 한 박 대통령은 민심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더욱 필요했다.


계파 갈등이 치닫자 강재섭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중재안으로 ‘8월 경선, 선거인단 20만 명’을 제시했다. MB의 선거인단을 늘리자는 안과 박 대통령의 경선 일자를 뒤로 늦추자는 안을 조율한 것이다. 이 안에 대해 MB가 먼저 수용한 데 이어 박 대통령도 수용의사를 밝혔다.


결과는 MB의 승리였다. 선거인단 투표에서 MB가 64,216표(49.06%)를, 박 대통령은 64,648표(49.39%)를 얻어 비등비등했지만, 여론조사에서 MB가 16,868표(51.54%)를, 박 대통령이 13,986표(42.74%)를 얻었다.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점한 MB가 대통령까지 오를 수 있었다.


18대-박근혜 대통령
17대와 ‘같은 룰’

새누리당의 대선 경선 룰은 17대와 같이 ‘2:3:3:2’(대의원:책임당원:일반국민:여론조사)다. 그러나 이대로 흘러간다면 박 대통령의 선출이 당연했다. ‘비박(非朴)’계인 정몽준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이재오 전 의원은 ‘완전국민경선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정 전 의원과 이 전 의원은 대선 경선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박 대통령 ‘독주’로 막을 내렸다. 박 대통령은 선거인단 71,176표(86.15%), 여론조사 15,413표(74.73%)를 얻어 압도적으로 선출됐다.


미리보는 19대 대선 ‘경선’


더불어민주당은 9일 대선 경선룰을 마련할 당헌·당규강령정책위원회 구성을 마쳤다. 앞으로 경선룰은 뜨거운 감자가 될 예정이다. 원내에서 백재현 의원, 홍익표 의원, 한정애 의원, 안호영 의원, 신동근 의원, 박정 의원 등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외부인사로는 박상철 교수(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박희승 변호사(전 부장판사 안양지원장), 김유은 교수(한양대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장)가 임명돼 총 11명으로 구성됐다.


민주당 잠룡의 셈법은 복잡하다. 특히 선거인단 구성 비율과 결선투표제 도입 두고 수싸움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는 ‘완전국민경선제(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했다. 당원 가중치 없이 1인1표를 행사하고 결선투표제를 도입했다. 당시 모바일 신청자는 56만 명이었다. 정세균 후보, 김두관 후보, 손학규 후보, 문재인 후보가 출마해 문 후보가 누적득표 34만7183표(56.52%)를 얻으며 최종 선출됐다. 과반수를 넘겨 결선투표를 치르지 았다.

문 전 대표가 최종 후보가 될 수 있었던 ‘파워’는 모바일투표에서 나왔다. 모바일투표에서 문 전 대표가 6만4997표를 더 얻어 과반 이상 확보해 결선투표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게 중론이다. 문 전 대표는 당내 세력이 다른 주자보다 탄탄하다. 당원 비율이 높아야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이재명 성남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등 지자체장들은 당내 기반이 약해 국민 참여 비율이 높아야 유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에서는 최근 개혁파들이 탈당, 창당하며 분당을 겪었다. 가장 유력한 반기문 UN사무총장의 거취에 관심이 쏠린다. 반 총장의 발걸음이 새누리당이나 바른정당 중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경선 룰이 변할 수 있다. 최근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는 라디오 방송에서 경선 룰 조정을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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