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요동방어망의 원천 신뢰…세계제국을 격퇴한 고구려의 요동방어망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입력 : 2018.04.10 17:31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연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절벽 위에 쌓은 장하 성산산성 성벽 - 험준한 절벽 위에 성벽을 쌓은 고구려인의 노력이 대단함을 보게 된다. /사진=김용만 제공
고구려가 세계 제국인 돌궐, 수, 당을 연거푸 격퇴한 것은 한국사에 오랜 자랑거리로 남아있다. 551년 초원의 지배자로 떠오른 돌궐이 백암성과 신성을 공격해오자, 고구려는 이를 격퇴했다. 612년 113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략한 수양제는 요동성 한 곳조차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수양제는 요동지역 성들을 하나하나 격파하는 것을 포기하고, 별동대 30만5000을 동원해 고구려 수도 평양을 향해 곧장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살수대첩의 참패로 돌아왔다. 613년 수양제는 다시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온갖 공성무기를 동원해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고구려 공격의 실패로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다. 

644년 11월 당 태종 이세민은 30여 년 전 고구려를 공격할 때 참전했던 정원숙을 불러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방책을 물었다. 그런데 그는 “요동까지는 길이 멀어 군량 수송이 곤란하며, 고구려인들은 성을 지키는 전술이 뛰어나므로, 공격하여도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이세민은 지금 당나라의 국력은 전 왕조인 수나라와는 비교가 안 된다면서,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645년 이세민은 직접 대군을 인솔해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나라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 중심부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백암성마저 함락시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나라군은 고구려 중심부로 공격해오지 못했다. 후방에 위치한 오골성에서 백암성을 향해 원군을 보내며 그들의 진로를 막았기 때문이다. 정원숙의 말처럼 고구려의 요동방어망을 뚫을 수가 없었다. 

당나라군은 요동성으로 되돌아갔다가, 남쪽으로 안시성을 공략했지만 이마저도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당 태종은 안시성 남쪽의 건안성부터 공격하자고 주장했지만, 안시성을 두고 건안성을 공격할 경우 식량 보급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해 이 작전을 포기했다. 또 안시성을 놔두고 곧장 천산산맥을 넘어 고구려 중심부에 있는 오골성을 공격하고 이어서 평양을 공격하자는 작전도 나왔지만, 건안성과 신성 등에 고구려군 10만을 뒤에 두고 진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다.
결국 당 태종은 주필산이라는 야산에서 3개월 넘게 주둔하며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뚫으려고 애썼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안시성 공격마저 실패하고 겨울이 닥쳐오자 어쩔 수 없이 당군은 죽음의 땅인 요택을 통해 퇴각하다가 엄청난 패배를 당한다. 퇴각하던 이세민은 목숨조차 위태로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646년 당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고구려는 산에 의거해서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갑자기 공격해서 함락시킬 수가 없으니, 자주 소규모 군대를 보내 소란을 피워 고구려 사람들을 농사짓지 못하게 만들고, 전쟁에 대비하게 하여 피곤하게 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요동방어망을 우회하여, 요동반도 남부와 고구려의 속민인 거란 공략 등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켜 고구려의 힘을 빠지게 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647년부터 수천 척의 배를 만들어 황해를 건너 고구려 수도를 직접 공략하려고 준비했다. 661년 당군은 수십만 대군을 함선에 실어 황해를 건너 평양을 공격했고, 일부 군사만 요동으로 보내 고구려 요동방어군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662년 2월 요동에서 적을 막아낸 고구려군이 반격에 나서자, 평양 주변에 모인 당군은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고 만다. 그러자 당 고종은 663년 8월 배 만드는 일조차 포기하며 고구려 정벌 중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처럼 강력한 요동방어망이 존재하는 한, 세계적인 강대국의 엄청난 대군이라고 하더라도 고구려를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었다. 

뛰어난 고구려 성의 축성법

절벽 위에 쌓은 장하 성산산성 성벽 - 험준한 절벽 위에 성벽을 쌓은 고구려인의 노력이 대단함을 보게 된다. /사진=김용만 제공
필자는 매년 답사단을 인솔하고 고구려 성을 답사하러 간다. 고구려인들이 돌과 흙으로 쌓은 성들은 비록 오랜 세월 탓에 많이 파괴됐어도 곳곳에서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1500년 전 고구려 사람들이 견고하게 쌓은 성들을 보면 그들의 놀라운 축성술과 노력에 매번 경탄하게 된다.

고구려인들은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에 성가퀴와 돌출한 치(雉)를 설치하고, 해자와 마른해자(湟)로 성벽을 보호했다. 성문을 옹성 구조로 만들어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게 했다. 또 성돌을 육합쌓기와 들여쌓기, 쐐기형 돌과 마름모꼴 돌을 이용해 서로 맞물려 쌓아 쉽게 허물어지지 않게 했다. 이 밖에도 여러 공법을 이용해 방어력 높은 성들을 만들었다.

요동지역의 성들은 규모도 커서, 큰 성은 둘레 5~7㎞에 달하며, 어지간한 성들도 2㎞ 남짓하다. 조선에 비해 인구가 적었던 고구려는 둘레 15㎞인 오골성, 23㎞에 달하는 평양의 장안성을 비롯해 많은 성을 쌓았다.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는 2㎞ 넘는 삼국시대 성들은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과 남한산성, 북한산성 정도를 제외하면 큰 성을 쌓지 못했다. 

고구려의 축성술이 뛰어난 것은 강한 적들과 전쟁을 많이 치른 탓에 크고 튼튼한 성을 쌓아야 할 필요성이 컸기 때문이다. 생존과 안전을 위해 성 쌓기에 노력하다 보니, 축성술도 따라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높이 들어 올려 성을 쌓았고, 돌을 깎고 다듬는 기술 또한 뛰어났다.

고구려 성들의 협력
당나라의 위협이 커지기 시작한 631년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천리장성에 대해 일부 연구자들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연결된 성으로 보기도 하지만, 요동일대에서 천리에 걸쳐 연결된 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만리장성은 적을 방어할 때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장성은 한 곳만 뚫려도 방어성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은 농경민과 유목민,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위한 경계의 역할과 적들에게 위엄을 과시하는 효과만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시하기 위하여 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하여 성을 쌓았다. 고구려는 성을 연결하여 장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천리에 걸쳐 전략적 요지에 중요한 성들을 보축하는 등 그물과도 같은 방어망을 구축한 것이다. 

작은 성들은 물론 아무리 거대한 성이라도 성 하나로는 거대한 적을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요동성, 신성, 건안성, 안시성, 비사성, 백암성을 비롯해 후방의 오골성과 국내성까지 수많은 성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백암성 전경 - 고구려 성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후손들이 많이 찾는 백암성은 돌궐, 수, 당 등 거대 적들과 싸운 역사의 현장이었다. /사진=김용만 제공
645년 요동성이 공격당하자 신성에서 원군을 보내왔고, 백암성이 공격당하자 오골성에서 군대를 지원했다. 647년 당나라 군이 적리성을 공격하자 고구려는 곧장 증원군 1만을 보내 당군을 몰아냈다. 648년에는 당군이 박작성을 공격해오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3만 군대가 출동해 당군을 몰아냈다. 

고구려가 성들 사이의 협력이 원활했던 이유는 기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병이 부족하면, 각 성 사이에 협동 작전이 어렵다. 기병이 없는 성의 군사들은 성을 우회하여 통과하는 적의 기병대를 추격할 수 없다. 따라서 보병 중심의 군대는 효과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기가 어렵다. 고구려는 각 성마다 기병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으로 무장한 돌궐군은 물론, 수, 당의 군대들도 하나의 성이라도 무시하고 통과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요동방어망은 적들이 공략하기가 아주 어려웠던 것이다. 

최강 요동방어망이 가능했던 이유 - 신뢰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했다. 청나라는 명장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우회해 통과하는 등,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여러 성을 피해 곧장 남쪽으로 내달렸다.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12월 15일에는 남한산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지도부는 외부 보급이 끊겨 굶주렸지만, 조선 깊숙이 쳐들어온 청나라는 보급로 걱정 없이 풍족한 가운데 조선의 항복을 기다렸다.

고구려 시대였다면, 결코 벌어지지 않을 상황이 일어났던 것이다. 고구려와 조선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기병이 부족한 조선은 서북지역 방어망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을 겪으면서 조선은 각 지역의 군대가 관할 지역을 함부로 벗어나지 못하게 제약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 지역 군대가 협력하여 효과적인 방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당시 조선과 고구려의 신뢰의 차이였다. 당시 조선의 지도층은 하층민들로부터 완전히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그러므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결국 버티지 못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초래한 것이다. 

반면에 고구려인들은 모두가 전쟁에서 우리 편이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 적과 만나는 최전선 초소에서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후방에서 확실하게 구원군을 보내준다는 확신이 있기에 용감하게 적과 싸웠다. 서로를 지켜준다는 신뢰가 없다면 군사들은 전쟁이 나면 도망가기 급급할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요동방어망이 강력했던 것은, 성들 사이에 튼튼한 신뢰라는 줄로 그물처럼 방어망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성을 길게 연결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신뢰로 연결된 장성이 훨씬 더 견고했던 것이다. 

봉황성(오골성) 위에서 본 요동일대 - 봉성시에 위치한 봉황산에는 고구려 5부 장군인 욕살이 상주하는 둘레 15㎞의 오골성이 있다. 이곳은 요동 지역의 여러 성을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김용만 제공
신뢰가 무너지면 성들도 무너진다
고구려 최고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죽은 후, 장남인 남생은 동생들과 권력다툼을 벌였다. 내란으로 확대됐다가 상황이 불리해진 남생은 668년 여름 당나라에 투항했다. 그리고 당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고구려를 공격하는 선봉에 나섰다. 남생의 투항 덕분에 당나라는 포기했던 고구려 정벌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668년 당나라 고종은 원정군을 고구려에 보낸 후, 가언충이란 자에게 이번에는 정말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언충은 “지난날 이세민이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은, 고구려에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생 형제가 집안싸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인도해 주고 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667년 9월 고구려 요동방어망의 핵심인 신성이 당나라군에 함락됐다. 신성은 645년 당나라 대군에게 큰 패배를 안긴 곳이었다. 돌궐, 수, 당 등이 한 번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신성이 함락된 것은 사부구란 자가 배신하여, 몇몇 사람들과 함께 성주를 결박하고 성문을 열고 당나라에 항복했기 때문이었다. 신성이 함락되자 주변 16개 성이 모두 함락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가 수십 년에 걸쳐 쌓은 최고의 방어력을 가진 장안성도 668년 9월 26일 승려 신성 등이 몰래 성문을 열고 당군을 성안에 들어오게 하자, 함락되고 말았다. 

신뢰했던 이들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 남생, 사부구, 신성과 같은 이들 때문에 막강한 고구려의 철옹성들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윗사람부터 배신하게 되면, 아랫사람들도 줄줄이 따라서 배신을 하기 마련이다. 고구려 멸망 당시 당나라에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던 것은 위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강대국 고구려를 지탱한 힘 신뢰
고구려 사람들은 곳곳에 정성 들여 성을 쌓았다. 그들이 힘든 축성 작업을 했던 것은 고구려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성을 튼튼히 쌓고 최강의 무기들로 성을 지키려고 해도, 신뢰라는 성이 먼저 무너지면 함락될 수밖에 없다. 고구려가 강력한 요동방어성을 구축하고 거대 제국들과의 전쟁에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신뢰라는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신뢰가 무너지고, 내분이 생기고, 나라가 분열되면 결코 강대국이 될 수 없다. 국가만이 아니라, 사회, 기업,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당나라 가언충의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김용만 소장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imgo626@mt.co.kr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