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관음증을 어떻게?

[李達坤(이달곤)의 思政慢文(사정만문)]

가천대학교 이달곤 교수입력 : 2018.05.02 09:20
1980년대 민주화를 기점으로 보면, 한국의 정치민주화는 한 세대를 지나고 있다. 서구의 정치발전론자 중에는 ‘후진국 민주화는 경제의 효율성을 해치고 뒤이은 사회질서 혼란으로 중진국 진입도 어렵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점이 많다. 민주화 진행 과정에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하는 등 단계적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중간에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무너진 적도 있었고, 사회 갈등이 우심해지고 정쟁이 일상화하는 등의 취약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구 5000만, 국민소득 3만 달러대로 진입하고 있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셈이다.

정치민주화 가로막은 담벼락
정치는 단절 없는 선거 민주화를 이루었고, SNS의 발달로 소통과 직접참여의 폭이 그 언제보다도 확장됐다. 하지만 시민 모두가 우리 정치가 큰 문제라고 한다. 정치인과 국회에 대한 평가는 바닥이다. 그럼에도 경제와 사회문제가 정치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정치의 무엇이 과연 문제인가. 문제의 본질을 ‘알아야 면장(面墻)을 할 수 있다’. 담벼락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떡하니 막고 서 있는데, 그 담벼락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비난만 하는 셈이다. 담벼락이 높아도 돌아가는 길을 찾으면 살 수 있다.

정치는 언론과 같이한다. 파당화되고 진영화된 SNS와 언론영상매체는 여기(沴氣)된 상태에서 실시간 공격 대상을 찾는다. 시민들은 일상의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대화방 소음으로 본업이 혼란스럽다. 종편 논객들의 ‘언저리 들쑤시기’는 도를 넘은 지 오래다. 정쟁이 강산의 구석구석을 일류(溢流)한다. 언론사는 언론인을 부린다. ‘기자란 무엇입니까’를 화두로 자성하는 기자들도 찾기 어렵다. 상업성, 특종, 검색어 장사들로 정통언론의 자리는 좁아졌다. 언론이 정치권의 싸움을 증폭시키고, 정파 진영의 포진 방향을 재배열(realignment)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수준은 나라의 수준이다. 그 성숙 없이는 정치민주화도 경제민주화도 어렵다. 하나 시민사회가 너무도 진영화됐다. 시나 군단위의 지역기반조직(community-based organization)은 또 다르게 정치화됐다. 지방자치단체장의 눈에 거슬렸다간 살 수 없는 담벼락에 맞닥뜨리게 된다. 보조금 몇 푼 받고 사무실 하나 얻어 쓸 요량이면 단체장의 정치활동에 요령 있게 나서야 한다. 전국적인 비정부기구(NGOs)들은 어떤가. 좌파, 우파로 나누어지지 않은 조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애국지사적 풍모를 보이던 분들이 있었건만, 근자의 시민단체는 정당 예비기구가 돼버렸다. 어떤 비정부 시민단체는 아예 정부가 돼버렸다는 평이 있다. 시민활동이라는 미명 아래 사익과 욕망의 야수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야만성이 횡일(橫溢)하고 있다
한국과 같이 갈등이 비등한 분단 중간국이 명실상부한 8000만의 선진국이 되려면 성숙한 시민사회가 전제조건이다. 국가와 기업, 이 두 영역만으로는 안정된 나라를 만들 수 없다. 시민사회가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는 조종간을 잡아야 한다. 우리 민주화 30년은 정치권력과 경제기업권력이 난무하는 야수적(野獸的) 불완전 변태(incomplete metamorphosis)로 특징지을 수 있다. 시민사회의 견제력이 변질됐다. 누구와 ‘이념을 같이한다’ ‘철학을 같이한다’는 식자들 때문이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라는 3대 축의 정립은 요원해지고 있다. 시민사회의 맹아가 정치 과잉이라는 담벼락에 압사당했다. 

미투(metoo)와 성접대 사건이 대낮에 세상의 호기심에 불을 지른다. 재벌의 갑질이 도를 넘었다. 관음증이 도진다. 전직 대통령들은 모두 죄인이 됐고, 무슨 킹과 기사단이 선거판을 헤집은 모양이다. 경찰 지도부가 사과를 하고, 사법기구들도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피의사실공표죄(형법제126조, 형사소송법 제198조)를 망각한 지 오래됐다. 불러서 취조하는 족족 다 공개된다. 재판에 가기도 전에 중죄인이 된다. 종편이 흥분하면 수사와 재판은 논객들의 몫이 된다. 정부 인사가 시작되면 야만성은 여지없이 발동된다. 뭔가 일 좀 한 사람은 죄다 혐의자가 된다. 희열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살아남은 자 과연 찔리는 데 없을까. 공격하는 자는 또 어쩌고. 좀 더 야수적이고 기묘한 변탈 정보를 취득하지 못한 자는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는 세상. ‘맹한 사람’이 아닌, 뭔가 따라가는 탐구자가 돼야 살아남는 세상. 그래서 관음증은 더욱 진해질 수밖에 없다. 

단두는 되지만, 야만은 안돼
민주사회의 야만성은 정쟁의 시대에는 불가피한 것이리라. 그래야 세상이 바뀔 거니까. 하지만 죄는 처단하되 희열의 야만성은 통제돼야지. 루이 16세는 평민 사형수의 고통 시간을 줄이기 위해 조제프 기요탱에게 즉시 죽는 도구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그도 아내도 혁명의 피를 요구하는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에 의해 기요틴에 목이 잘렸다. 단두는 필요했을 것이다. 관음증을 자극하는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부르봉 왕조의 모든 것이 수채 구덩이에 처넣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퇴비 수레에 실려 시내를 끌려다니다 처형당했다. 처형장은 축제장이었다. 손을 흔들어서 환호하는 군중 속을 어린이들이 뛰놀았다. 떨어진 목이 치켜들어졌고, 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동이로 받는 앞자리에 그들의 자녀들을 앉혔다. 죄인은 죗값을 받게 해야지만, 콩코르드 광장의 야만성을 우리가 배울 이유는 없다.

기요틴으로 덕성의 공화국을 만들겠다는 로베스피에르의 무분별한 테러는 도덕적 충돌을 불러왔고, 곧 내분으로 이어졌다. 그도 앙투아네트가 잡혀간 방에 갇혀 있다, 자신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동지들에 의해 목이 잘렸다. 그는 ‘테러가 즉시적이며 확실한 정의’라고 했다. 테러라는 인간의 야만성에 호소한 것이다. 하지만 정적에 대한 가차 없는 살상은 공포와 혼란을 불러왔다. 그의 공포정치는 죄의 단죄라기보다는 죄인의 파멸에 모아졌다. 제도화와 문화 변화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테러는 왕정복고를 유발하였고 국익을 해쳤다. 오직 레닌만이 그를 칭찬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의 야비함과 야만성이다. 타락한 전제군주나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한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린 것은 새 역사를 쓴 것이 분명하다. 단두는 필요한 경우 적법절차를 밟아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야비한 육두망신이나 도를 넘는 야만성은 제어돼야 했다. 진정한 인간성의 고양과 공화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면 더욱 그랬어야 옳다. 

야만의 춤을 어떻게
1980년대 민주화와 함께 순이 자라기 시작했던 시민사회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정쟁의 희생물인가, 정쟁의 원천인가. 지식인 사회는 서로 다른 파와 말을 섞지 않은 지 제법 됐다. 한때는 적개심 없이 같이 놀았었다. 하지만 정권마다 인사코드가 진해지면서 편을 갈랐다. 선거 때 줄을 서고, 각기 단체를 따로 만들었다. 인터넷 댓글은 이제 내전 상태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의 시시비비를 제대로 파악하기란 연목구어다. 언론은 연예(演藝)나 만담(漫談)의 영역으로 곤두박질쳤다. 과잉 상업화는 입는 것, 먹는 것, 노는 것으로 텔레비전을 도배하고 있다. 청와대는 직접 청원으로 민주주의를 페인트칠하고 있다. 코미디언이 정책과 씨름하고, 정치인은 SNS에 몰입한다. 이 판에 대어(大魚)가 걸리면 이 사회의 모든 신경계가 일시에 흥분한다. 관음증이 슬며시 발동하고, 토론의 장에 야만성과 희열 욕구가 넘쳐난다. 야비함이 더 진할수록 상업성은 날개를 단다. 다음 사건이 터질 때까지 야만성의 춤(dance of barbarism)은 칼춤을 벌인다. 

유치(幼稚)와 성숙(成熟)을 나누는 기준을 찾아야 한다. 한국 정치민주화 과정의 폐쇄성과 적대감을 극복할 대안을 숙의해야 할 때다. 재벌이 만들어온 그들만의 문화를 바꾸는 열린 토론이 필요하고, 시민사회를 막고 있는 담벼락을 넘어설 문화와 제도의 이야기로 공론의 장이 채워져야 한다.

[이달곤 사정만문]은 이 교수가 ‘국민정치와 국가정책을 고민한다는 사정(思政)’이라는 이름으로 만필을 쓴 것임.

이달곤 교수
가천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정책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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