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의 리더십과 고구려의 멸망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입력 : 2018.06.28 10:30
편집자주신뢰는 사회적 자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프란시스 후쿠야마 2017년 5월 출범한 신 정부의 가장 시급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될 것이다. 신뢰는 모든 리더십의 근간이다. 신뢰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지금, 우리는 지나온 역사를 통해 리더십과 신뢰의 문제를 돌아보고자 한다. 한국사에서 가장 신뢰도 높았던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고, 1차 연도 기획이 끝난 후에 신라, 고려, 조선의 리더십과 신뢰 문제를 다루기로 한다.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고려 중모왕(추모왕)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에 1000년 동안 다스리려고 했다. 모부인(유화부인)이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하다. 단지 700년 치세라면 적당하다”고 하였다. - <일본서기>

고구려는 오랜 세월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해온 나라다. 중원의 농경제국, 초원의 유목제국들이 단명한 것과 달리 고구려는 대단한 장수를 누렸다. 고구려가 존재할 당시 중원에서는 무려 35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모든 국가들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 고구려도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멸망 직전까지 전성기를 누렸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당나라의 대군을 거듭 격파하는 위력을 과시하던 나라였다. 그 때문인지 유독 고구려 멸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논란의 중심에는 늘 연개소문이 있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연개소문을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를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로 평가했다. 그의 리더십은 어떠했고, 무엇이 문제였을까? 

연개소문과 영류왕
642년 음력 9월 연개소문은 180여 명의 대신들과 더불어 영류왕마저 시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는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아닌 자가 최고 권력자가 된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시작된 것이다.

612년 고-수 전쟁에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고건무는 618년 이복형인 영양왕의 뒤를 이어 영류왕이 된다. 

하지만 그는 대외정책에 있어서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하는 정책을 펼친다. 수나라와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긍정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거듭된 당과의 외교 관계에서 일방적인 양보를 거듭하게 되자, 고구려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그는 631년 고구려가 수나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물인 경관을 당나라 사신이 와서 허물어 버리도록 놔두었다. 또한 640년 당나라에 태자를 사신으로 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고구려인들에게 외교적 굴욕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641년 당나라 사신이 고구려에 와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내부 정보를 수집해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는 의지를 노골화하는 와중에도 영류왕은 외교적 해결만을 고집했다. 반대로 대당 강경책을 내세운 연개소문 일파를 제거하려고도 했다. 결국 영류왕의 대외정책에 대한 내부의 불만이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626년 영류왕은 당의 요구에 의해 신라 정벌을 중지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643~644년 당나라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라를 공격해 고-수 전쟁 당시 신라에 빼앗긴 500리 땅을 회복하고자 했다. 643년부터 연개소문은 당나라에서 온 사신을 냉대했고, 심지어 사신을 굴에 가두는 등 당나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당나라 사신을 엎드려 기어가게 하여 보장왕에게 절하도록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고구려의 자존심을 되살리려는 행동이었다. 돌궐, 수나라 등을 거듭 격파하며 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했던 고구려인의 자존심에 부응하는 그의 정책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가 있었다.

연개소문의 아싸비야
이슬람 역사학자 이븐 칼둔(1332~1382)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집단 연대의식’을 의미하는 ‘아싸비야(asabiya)’라는 개념을 제시했었다. 그는 아싸비야를 왕조를 탄생시키고 유지하는 힘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아싸비야가 증가할 수도 있지만 쇠퇴할 수도 있고, 이에 따라 왕조의 운명이 변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아싸비야 개념을 연개소문 정권에 대입해본다면, 연개소문에게는 권력 유지를 위해 당나라에 강경 대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축출한 영류왕의 정책과 반대되는 정책을 앞세워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했다.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요령성 해성시에 위치한 영성자산성. 이 주변에서 고구려군과 당나라군은 큰 전투를 벌였다. 현재 영성자산성은 한국인이 답사하기 어려운 지역이 돼있다. /사진=김용만 제공
645년 침략야욕에 불탄 당나라와 이에 맞서려는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 당나라는 요동성, 백암성 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위협했다. 하지만 곧 고구려의 반격이 시작되어 당나라의 주력군을 요동성과 안시성 사이에서 수개월간 포위했다. 퇴각하게 된 당나라 군대를 늪지대인 요택이란 함정으로 몰아넣어 당태종의 목숨마저 위태롭게 만들었다. 명백한 고구려의 승리와 당나라의 패전이었다. 널리 알려진 안시성 전투의 승리는 전쟁의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군을 전체적으로 지휘하여 당군을 격퇴한 것은 연개소문이었다. 중국의 대표 병법서 가운데 하나인 <이위공문대(李衞公問對)>에는 연개소문이 병법에 능한 사람으로 등장하며, 중국의 경극인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에는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목숨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적장으로 등장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며 천책상장(天策上將)이란 칭호를 받았던 당태종이 가장 두려워한 인물이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고-당 전쟁의 승리로 인해 고구려 사람들로부터 더욱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집권 과정에서의 문제도 전쟁 승리로 모두 희석될 수 있었다. 

건안성 성벽 - 645년 고-당 전쟁에서 당나라 육군과 수군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낸 건안성. 지방장관인 욕살이 주둔한 건안성은 둘레 5㎞가 넘는 큰 성이다. 사진에 보이는 산들의 능선을 따라 성벽이 연결되어 있다. 요령성 개주시에 있다. /사진=김용만 제공
642년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이 20년 넘게 그가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외부 요인에는 당나라와의 계속된 전쟁이 있었다. 647~648년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는 649년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태종의 죽음으로 이 계획은 무산된다. 하지만 650년대에도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는 등 적대관계가 지속되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침략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649년부터 수천 척의 전함을 만들어 고구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660년 당나라는 1900척과 13만 대군을 보내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661년 가을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주력군 수십만을 바다 건너 평양으로 보낸 당나라의 공세에 고구려는 수개월간 수도가 포위되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겨울이었다. 당나라의 포위는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662년 2월 연개소문은 평양 부근 사수에서 방효태가 이끄는 옥저도행군을 전멸시켜 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당나라군은 또다시 패전하여 서둘러 퇴각하고 말았다. 사수대첩의 승리는 연개소문의 또 하나의 업적이었다. 

연개소문의 죽음과 아싸비야의 붕괴
연개소문은 집권 초기 최고관직인 대대로는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2위인 막리지 자리에 만족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자신을 따르는 집단의 아싸비야에서 기인했음을 알고 있기에 권력과 영광을 즉시 독점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대막리지가 되어 실질적으로 권력을 독점했다. 1차 고-당 전쟁의 승리로 권력이 공고해지자,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가능하게 해준 아싸비야를 공유하는 집단들을 차츰 배제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661년 연개소문은 28세의 장남 남생을 막리지 겸 삼군대장군에 임명했다. 이때 23세의 막내 남산도 귀족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5위 관등인 위두대형에 임명했다. 차남인 남건 역시 이때 3위 또는 4위의 관등을 임명받았을 것이다. 그는 남생, 남건, 남산 3형제에게 권력을 세습시켰던 것이다. 2차 고-당 전쟁의 승리로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체격이 걸출하며 기품을 갖춘 그는 냉정하고 치밀하면서도 과감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 전쟁 영웅이기도 한 그의 위상은 왕을 능가했다. 하지만 모든 권력은 정점에 돌입할 때 문제가 생긴다. 

고구려와 경쟁하던 당나라, 신라가 왕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권력구조를 갖고 있었던 것과 달리, 고구려는 신하가 최고 권력을 가졌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연개소문이 강력한 리더십과 전쟁에서 승리한 업적을 바탕으로 백성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20년 넘게 유지될 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후계자들이 그만큼 강력한 리더십과 신뢰를 얻은 지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왕위 계승이었다면, 후계자가 다소 부족해도 갖추어진 통치 질서에 의해 권력이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불안정한 권력구조 아래에서는 후계자가 전임자에 비해 무능할 경우 이를 보완해줄 질서체계가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붕괴될 수 있다. 

2차 고-당 전쟁에서 패배한 당나라는 이후에도 철륵, 백제 부흥군과 싸우느라 크게 지쳐 있었다. 663년 8월 당 고종은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고구려 공격을 위해 준비한 선박 건조를 멈추게 했다. 수백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수나라가 39년 만에 멸망했던 것처럼, 엄청난 병력과 물자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실패한 당나라도 이때 위기였다. 물론 전쟁터가 된 고구려의 피해도 엄청났다. 고구려와 당나라 모두 오랜 전쟁에 지쳐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663~665년 무렵에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만약 연개소문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한참 뒤로 연기되었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사망은 고구려 역사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그를 정점으로 하는 아싸비야가 붕괴됐기 때문이다.

남생은 661년 2차 고-당 전쟁 당시 압록강 전투에서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했다. 게다가 동생들과 나이나 지위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3형제에게는 각기 자신들만의 지지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지지자들은 각기 형제 사이의 반목을 이용했다. <일본서기>에는 연개소문의 유언이 실려 있다.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같이 화합해 작위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말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유언과 달리 그가 죽자 남생과 남건-남산 두 파로 나뉘어 권력다툼이 시작됐다. 형제 간의 다툼이 내란으로 번졌다. 그리고 권력다툼에 패한 남생은 적국인 당나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리고 연개소문 정권의 한 축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했다. 고구려를 지탱하던 연개소문 정권의 아싸비야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됐던 것이다. 

남생 묘지명 - 연개소문의 못난 아들 남생의 묘지명. 그의 배신은 고구려 멸망을 불러왔다. /사진=김용만 제공
신뢰의 붕괴, 고구려의 멸망
남생의 투항을 계기로 사그라지던 당나라의 침략 의지에 다시 불이 붙었다. 당나라는 남생을 통해 고구려 내부 정보를 입수하고, 667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총공격에 나섰다. 1차 고-당 전쟁에서 고구려에 승리를 안겨준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신성이 내부 이탈자에 의해 성주가 결박당하고 성문이 열리는 바람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뿐만 아니라 연개소문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자들, 남생을 지지했던 자들을 중심으로 당나라에 투항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고구려의 멸망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시작됐다.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남건-남산 형제가 중심이 되어 침략군과 맞섰지만, 이때 고구려는 빈틈이 없던 과거의 고구려가 아니었다. 668년 9월 평양성 성문이 내부 배신자에 의해 열렸다. 그렇게 고구려는 멸망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 고구려를 대제국으로 발전시킨 광개토태왕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들이다. 그들이 아싸비야를 고조시킬 수 있었던 것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그 성과물을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전쟁에 승리하여 고구려인의 자긍심을 높이기는 했지만, 그 전쟁이 방어전이었기 때문에 전리품을 얻거나 고구려의 경제를 성장시키기보다는 고구려 경제를 약화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권력에서 제거된 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겉으로는 강력해 보이는 아싸비야도 내부에서는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소지가 컸다. 연개소문이 유언으로 자식들의 단합을 기대한 것은 너무 뒤늦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위대한 장군이었고,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권력을 독점하고 분란의 소지를 갖고 있던 자식들에게 권력을 세습함으로써 그의 사후 불과 수년 만에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니 그의 리더십은 평가 절하될 수밖에 없다.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병(兵), 식(食), 신(信) 가운데 병과 식은 버릴 수 있어도, 신뢰를 버리면 다시 일어설 수 없다고 했다. 형제를 믿지 못하는 리더, 배신하는 지도자, 집단의 미래를 믿지 못하는 구성원, 그렇게 집단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다. 고구려는 강력한 신뢰를 바탕으로 제국으로 성장하여 오랜 수명을 누린 나라였다. 하지만 신뢰를 잃어버리자, 고구려도 결국 모래성처럼 붕괴되고 말았다.

김용만 소장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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