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 정조의 리더십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입력 : 2019.09.17 09:36

정조(재위 : 1776~1800)는 세종과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임금으로 꼽힌다. 세종과 가장 많이 비교되는 개혁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알아보자.


다수파의 반대를 뚫고 왕위에 오른 정조
정조는 즉위하면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1762년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의 결과였다. 당시 10세였던 정조는 이 일을 평생 잊지 않았다. 정조가 즉위할 당시 사도세자를 반대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노론은 정조가 즉위하면 아버지에 대한 보복을 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의 즉위를 반대했었다. 심지어 그들은 여러 차례 정조를 시해하려고도 했었다. 영화 <역린> 으로 잘 알려진 정유역변이 대표적인 사례다. 1777년 7월 28일 밤 경희궁 존현각에서 공부를 하던 정조를 시해하기 위해 전흥문과 강용휘 두 자객이 궁궐 담을 넘어 들어왔다. 존현각 주변에서 발각되었지만, 자객들은 잡지 못했다. 그러자 정조는 거처를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그런데 8월 11일 전흥문 등이 다시 정조를 살해하기 위해 창덕궁 담장을 넘다가 체포되었다. 사건의 배후는 노론의 명문가 홍계희 가문의 홍상범 등이었다. 정조는 “두렵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로 세손 시절부터 시해의 위협에 시달렸다.


1504년 연산군은 친어머니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을 처단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정조는 연산군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에게 섣부른 복수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정조는 그들을 포용하고, 이끌어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정조는 우리나라 예약문물은 모두 세종 때 만들어졌다면서, 세종의 길을 가고자 했다. 그래서 집현전을 본떠 규장각을 세웠다. 정조는 세종만큼 총명했다. 게다가 비만하고 문약했던 세종과 달리 문무를 겸비하여 용기와 인내심도 갖추고 있었다. 세종과 다른 환경에서 정치를 해야 했던 정조는 세종과 차별화된 리더십을 발휘했다.

▲정조의 릉인 건릉. 정조는 수원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을 만들었고, 그의 무덤 곁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고 묻혔다./사진=김용만 소장 제공
이끌어가는 리더십
세종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태종의 후원하에 왕위에 올라 왕조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를 마련한 수성의 군주였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처럼 신하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수직적인 권위 대신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세종은 어전회의인 경연을 월 6.7회 총 1898회 개최해 국정 토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는 신하들의 말을 최대한 경청했고, 신하들에게 과제를 던져주고 기다렸다. 세종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신하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정치 상황은 세종 시대와 달랐다. 권력을 장악한 성리학 이념에 철저한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공론을 임금의 정치적 권위보다 우위에 놓고 군주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임금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서인은 정변을 일으켜 인조를 왕위에 올렸고, 노론은 노골적으로 경종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강력한 신권에 맞서 임금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가려면 신하들보다 더 높은 도덕적 수양과 학문적 능력을 갖추어야만 했다. 임금이 신하들의 스승인 군사(君師)가 되고 성군(聖君)이 되어야만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다.


영조는 유교경전에 당위적인 지향점으로 제시된 이상적인 군주라고 스스로 자임한 사람이었다. 왕권 강화에 노력했던 영조는 아들과 세손에게도 학문을 권장하여 신하들 위에 올라선 임금이 되기를 요구했다. 총명했던 정조는 스스로 학문적 지도자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했고, 군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고위문신, 규장각 초계문신, 성균관 유생, 지방 유생 등을 직접 가르치곤 했다. 또 150여 종 4권에 이르는 방대한 문헌을 편찬했다.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군주가 되기 위해 정조는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는 높은 도덕성을 자기기준으로 제시하고 이에 부합하기 위해 밤늦도록 공부와 자기 성찰을 한 호학의 군주였다. 조선 최초로 안경을 쓴 임금이 정조였다. 정조는 병든 조선을 치유하기 위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노론 벽파를 중심으로 한 다수의 사대부들은 선왕이 만들고 지켜온 제도를 함부로 뜯어고칠 수 없으며, 제도를 지키는 것보다 제도를 고치는 폐단이 크다면서 왕의 개혁정책을 반대하기도 했다. 정조는 개혁의 폐해가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상 유지 폐해가 훨씬 심각하다고 반박했다. 잘못된 법을 고치고 좋은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 역시 조정의 법이라고 주장하며 개혁을 밀고 나갔다.


정조는 어전회의를 시종 주도하면서 강한 신하들의 과도한 발언권을 견제하고, 신하들을 앞에서 끄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말을 아꼈던 세종과 달리, 정조는 국정의 목표(의리)를 설정해놓고 신하들에게 그 길에 동참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거나 위협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엄준한 도덕적 태도와 합리적인 정치 논리를 견지하면서 신하들과 적극적인 소통과 화합을 실천하는 면모도 보였다. 학문적 권위를 확보한 정조는 신하들의 붕당정치론을 비판하고, 오직 임금만이 정책의 올바른 판단을 하고 신하들은 밑에서 돕는다는 황극군주론을 주창했다.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 자임하며 진리의 심판자로 나서 반대하는 신하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정조는 직접 신하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공부할 것을 권장했다. 그 결과 정약용, 박제가 등이 학문적 결실을 맺었고, 청나라에서 들어온 다양한 신지식과 정보가 정조의 날카로운 질문과 해석 등이 곁들인 학문 토론으로 이어져 조선 후기 문예부흥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


▲창덕궁 존덕정에 걸린 만천명월주인옹자서.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 자임한 정조가 1798년 이 글을 직접 써서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존덕정에 내걸었다. /사진=김용만 소장 제공
백성들의 지지를 얻은 소통의 리더십
정조는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에 자주 행차했다. 궁궐 안에서는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조는 재위 24년간 66회 능행을 비롯해 100회가 넘는 잦은 궁궐 밖 행차를 통해 적극적으로 백성들과 접촉했다. 이때 격쟁과 상언이 활성화되었다. 격쟁은 일반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왕에게 아뢸 수 있는 시간이었다. 1791년 1월 18일 흑산도민 김이수는 사도세자 묘소를 참배하고 창덕궁으로 돌아가고자 한강을 건너 숭례문으로 향하는 정조의 행차를 가로막았다. 꽹과리 소리와 함께 구경 대열에서 뛰쳐나온 김이수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을 했던 것이다. 그는 흑산도에서 멸종된 닥나무에 대한 세금을 철회해달라고 호소했다. 흑산도 주민들은 1772년과 1783년 나주 관아에 이 문제의 해결을 거듭 요청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김이수는 전라감영을 찾아가 호소했지만, 오래된 세금 규정을 바꿀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 그러자 김이수는 바다 건너 먼길을 걸어 정조에게 직접 호소했던 것이다. 정조는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고, 조정에서 공식 논의로 올려 해법을 찾게 했다. 3개월간의 현장조사와 토론 끝에 흑산도 닥나무 세금은 잘못된 세금이라고 결정하고 철폐했다. 비록 세금 수입이 줄어도 백성에게 이익이 된다면 고쳐야 한다는 정조의 손상익하(損上益下)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정조는 상인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1791년 정조는 신해통공을 실시한다.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한 정책으로 독점 상인의 폐해를 줄이고, 상업 발전을 꾀한 정책이었다. 조선후기 인구가 증가하면서 종루 일대의 시전 거리 외에도 칠패와 이현시장, 전국에 큰 규모의 15대 장시가 발전하는 등 상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정조는 도시빈민층과 영세상인, 소생산자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실시해 상업발전을 촉진시켰다.


조선은 양반들의 나라였다. “소민(小民, 백성)의 마음을 잃을지언정 양반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조선의 정책 기조였다. 그러나 정조는 양반도 소민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지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소민을 국가의 근본으로 간주했다. 사대부가 아닌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여긴 그의 정치인식은 조선 역사에 커다란 진전이었다.

탕평의 리더십
정조는 당파적 이해를 넘어 여러 진영을 고루 헤아리고 초당파적인 인재를 등용하는 인사정책을 펼쳤다. 조선후기에는 조선 전체 인구의 3%가 모여 사는 한성부에서 과거 합격자의 1/3가량이 배출되고, 3정승 6판서 고위관직의 80% 이상이 한성부 출신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는 물론 영호남 출신들도 관직 진출에 심한 제한을 받고, 이른바 경화(京華) 사족의 인재 독점이 차츰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정조는 인재 편중을 막고, 지방 인재가 조정에 널리 등용될 수 있도록, 지방 인재를 발굴하는 빈흥과(賓興科)를 도입해 실시했다. 직접 지방 유생들과 접촉을 넓혀가며 현지 정세와 여론을 적극 파악하기도 했다.

 
정조는 특정 정파의 독단을 추종하지 않고, 의견의 완성과 의견의 겨룸을 적극 긍정하고 장려하는 태도를 취했다. 적당한 중도파 보다 확실한 자기 의견을 가진 붕당인사들을 선호했다. 정조는 각 붕당의 대결을 조장하여 쟁점을 드러내게 한 후 적당한 시점에서 적절한 의리(목표, 정의, 상식)를 제시해 신하들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정조는 각 붕당의 명분을 존중하고, 신하들과 합의한 의리를 바탕으로 최대한 이질적인 사람들을 많이 포용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고자 했다. 노론 벽파, 노론 시파, 소론, 남인 등 당파를 초월해 다양한 인재가 정조 시대에 등장해 문예 부흥에 나섰다. 또한 규장각 검서관으로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 등 서얼 등을 등용하는 등 유능한 인재를 널리 구했다.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건설한 수원화성은 다양한 시설물이 있지만, 어느 하나도 외형이 같은 것이 없을 정도로 건축학적으로 아름답다. 특히 방화수류정은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사진=김용만 소장 제공
계몽군주 정조의 변신과 한계
조선에서 희망의 불씨를 타오르게 했던 계몽군주 정조. 그는 49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온갖 논의가 있지만, 실체는 알기 어렵다. 비극적 어린 시절부터 험난한 인생을 겪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정조의 드라마틱한 삶은 1990년대 이후 정조에 대한 폭발적 관심을 불러왔다. 정조는 탁월한 천재들로 구성된 신하들의 스승으로 군림할 만큼 박식했고, 활쏘기에 능한 문무를 겸비한 대단한 능력자였다. 그는 신해통공으로 자유 상업을 권장하고, 백성을 위해 온갖 악습을 폐지했다. 1776년에는 규장각을 설립해 학문을 진흥시켰으며, 실학을 적극 장려했다. 또 1796년 수원화성을 축성하는 등 그의 업적은 실로 다양했다.


그럼에도 그는 성공한 임금이 되지 못했다. 그에게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정조가 1785년 국왕 호위 전담부대인 장용위를 창설하고, 1793년 장용영으로 확대 개편한 것은 강력한 힘을 가진 노론세력에게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가 승하한 후 2년 만에 장용영이 혁파된 것에서 보듯, 노론세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상적인 군주를 꿈꾸던 정조도 인간이었다. 정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조율하다가 점점 왕의 권위를 앞세워 자신이 시비판단을 규정하는 독재 권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신하들의 학문 수준을 폄하하고, 신하들을 호되게 공부시키는 정조의 태도는 차츰 신하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만천명월주인옹(삼라만상의 실체적 근원이란 의미)을 자처한 정조는 차츰 위압적이고 경색적인 불통 정치가로 변질되어갔다. 스스로를 성인으로 자처하며, 점점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이 잦아지는 폐단을 보였다. 반대파가 설득하는 것에 정조도 점점 지쳐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선 공론정치의 핵심인 청요직을 혁파하고, 경연제도를 폐기하였으며, 사간원 등 언관의 발언권을 제한했다. 또 조선 정치구조의 중요한 핵심인 이조전랑의 인사권은 무력화시키고, 자신이 통제 가능한 측근들을 대신에 임명해 그들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등, 국왕의 정치적 통제력을 견제하는 장치들을 하나하나 약화시켰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정조가 재위하던 시기에는 문제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가 죽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가 성취한 개혁이 전복되고, 외척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된 원인에는 소통의 리더 정조가 점점 불통의 리더가 되어 조선 공론정치의 틀을 약화시킨 탓도 크다.


시대를 개혁하려는 자들은 종종 자신의 가치만이 옳다고 믿고, 열심히 개혁을 시행한다. 하지만 목표만을 위해 과정을 무시하고, 개혁의 걸림돌인 상대를 제압하는 것에만 열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개혁되어야 할 대상자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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