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신적 뿌리는 5·18정신"

진상조사위원회에서 그날의 진실을 규명해야 할 것

머니투데이 더리더 임고은 기자입력 : 2018.05.09 11:16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누구는 말한다, ‘5·18 광주는 진주조개다’고. 왜 그럴까. 진주조개처럼 ‘저항’과 ‘아픔’을 통해 ‘민주’라는 영롱한 빛깔의 진주를 생산하는 까닭이다.

광주에 가면 기억의 진주를 보관하는 ‘보석함’이 있다. 기억은 짧고 기록은 긴 것. 그곳은 1980년대 5월이란 기억을 아주 길게 보관하는 곳이다. 공식 명칭은 ‘광주광역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다. 5·18기록물이 2011년 5월2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고 기록관은 2015년 5월13일 문을 열었다.


당시 운동 현장을 취재한 4년차 신입 기자는 지금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관장이 됐다. 직접 총을 들고 뛴 시민군으로서, 펜을 들고 취재한 기자로서 ‘그날의 광주’를 알리는 나의갑 관장의 모습을 담기 위해 <더리더>는 지난달 16일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을 찾았다.


-기록관이 시내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지금은 ‘기록관’ 문패를 달고 있지만, 당시는 그게 아니었다. ‘광주가톨릭센터’였다. 가톨릭센터에다 1980년 5·18을 갖다 대면 아주 특별한 공간이 된다.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청이 들어 있던 센터는 단순한 사목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제1 항쟁의 거리로 꼽히는 금남로 한복판에 센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센터의 번지수가 ‘금남로3가’ 아닌가.
센터의 공적 가운데 하나는 시위대의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거다. 금남로1가와 맞닿아 있는 전남도청 앞 광장에 저지선을 쳐두고 있던 공수부대가 맹렬하게 추격해올 때마다 아우성을 치며 센터 안으로 몰려가 계단을 타고 피신했다. 센터가 아니었으면 더 많은 시민들이 다쳤을 거다. 나 또한 센터에 빚진 사람이다. 공수부대가 건물 안에까지 쫓아와 진압봉으로 두들겨 팬 적도 많았던 피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자리가 5·18 시민군 ‘피신처’로서 특별함을 갖는 자리인가
“센터가 전남도청, 전남도경, 전일빌딩, 광주YWCA와 함께 5·18 5대 사적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지는 건 ‘피신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중심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있다. 센터 6층 집무실 창문을 통해 공수부대의 야만적 폭력을 내려다본 대주교는 5월19일 급거 상경했다.
광주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김수환 추기경을 만난 것이다. 추기경은 서둘러 글라이스틴 미국대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났다. 대주교는 광주로 돌아와 전남북계엄분소장(윤흥정, 5월22일 소준열로 교체)과 장형태 전남도지사에게 전화해 군 진입을 막으려 노력했고,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군인들의 만행을 명령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5월27일 새벽, 5·18 광주가 무너지자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사제들과 함께 ‘광주사태의 진상’이란 성명을 냈다. 그때 신부 여덟 명이 광주보안대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센터는 기억이다. 5·18을 관통한 많은 광주시민들의 기억장치에 센터가 커다랗게 입력돼 있다. 그러니까 ‘핏빛 어린 기억’에다 ‘아픈 기록들’을 접목해 놓은 것이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다


-무엇을, 얼마나 보관하고 있나
“광주시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국내외에서 체계적으로 수집한 5·18기록물 5만1387점을 보관하고 있다.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시설과 장비를 ‘최첨단’으로 갖춘 건 물론이다.
1층에서 3층까지는 상설전시실이고, 4층에는 5·18 관련 서적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구비한 자료실이 있다. 5층에는 네 개의 수장고가 있다. 1수장고는 미국 국무부 등의 기밀문서와 5·18사건 검찰 수사기록, 김대중 내란음모재판 자료 등을 보관하는 곳이고, 2수장고는 5·18 당시 생산된 성명서와 선언문, 취재수첩과 일기, 진료기록부 등을 저장한다. 2수장고 내 모든 자료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원본들이다. 5·18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와 시민군 교련복 등 유품은 3수장고에 들어가 있고, 사진기자 필름이나 사진자료, 영상물 등은 영점수장고를 사용한다.
6층에는 ‘진실의 눈’이란 특별전시실도 있다.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이다. 하나도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개하고 있다.”


-보관 자료 중 특히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이 있다면
“헬기 사격 총탄 흔적이 또렷이 박혀 있는 전일빌딩 10층의 천장텍스, 1982년 김종률 작곡가가 직접 쓴 ‘님을 위한 행진곡’ 악보, 광주시와 동구청에서 각각 작성한 ‘5·18사태일지’, 계엄군 군용트럭의 바퀴 자국이 선명한 태극기, 희생자들의 몸속에서 꺼낸 총알, 전남도청의 ‘시민군 상황실’에서 도청 공문 발송인(印)을 찍고 일련번호를 적어 기자들에게 나눠준 ‘보도’ 완장, 도청 인근 아주머니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건넨 양은 함지박 등 희귀한 것들이 많다. 사본이지만, 박정희 사망 이후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면서 만든 ‘제5공화국 전사(前史)’도 있다. 왜 이 책이 군사기밀보호법에 묶여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외국 것들도 꽤 된다. 광주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안경과 여권 등도 수집했다. 5·18 당시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하다 동빙고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의 ‘광주비망록’ 등 유품은 모으고 있는 중이다. 수집이 끝나면 ‘힌츠페터 코너’와 ‘안병하 코너’를 만들어 전시할 계획이다.”


-5·18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까닭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장인 로슬린 러셀 박사가 그 이유를 간명하게 공표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으로 시작했다가 무질서한 난동으로 변질되곤 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치안력 절대 부재의 상황에서도 약탈·방화·매점매석 없이 심지어 은행까지 무사했다. 주먹밥을 나누며, 헌혈을 자청하고, 시민 스스로 공동체 유지와 질서를 지켰던 유례없이 높은 시민의식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5·18 광주에 찬사를 보냈다. 그 ‘시민의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5·18정신’이고, ‘광주정신’이 아닌가.”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많은 민주화운동 가운데 5·18이 갖는 특별함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문재인 대통령이 상쾌하게 정리했다. 지난해 5·18 37주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은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다. (중략)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받았다. 그러나 서슬 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갔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됐다’고 말했다.
5·18은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토대가 되어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으로 꽃피웠다. 5·18을 ‘실패한 성공’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광주의 피 흘림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압축성장’시켰고 그 과실은 온 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됐다.”


-5·18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어떻게 달라져왔나
“5·18 당시 광주는 독 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바퀴 달린 발’(고속버스, 시외버스, 기차)은 광주에 일절 들어오지 못했다. 계엄군의 광주 외곽 봉쇄, 시외전화 차단, 철통같은 언론 통제로 광주 밖 사람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통 알 수 없었다. 신문과 방송은 또 어땠나. 광주를 ‘폭동의 도시’로 몰아갔다.
언론에 채워진 ‘5·18 족쇄’가 느슨해진 건 1988년 4월이었다. 그전엔 어떤 펜도 5·18 곁에 다가서지 못했다. 그랬으니 ‘5·18=폭동’이란 그림이 국민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박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988년 11월부터 진행된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를 통해 5·18 실상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국민의 시선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5·18은 지금도 일부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한겨레 신문(2017년 8월17일자) 한 기사의 제목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힌츠페터·김사복은 북한 간첩…택시운전사 흥행에 가짜뉴스 극성’ ‘5·18은 북한군 폭동’. 이런 게 카카오톡방·SNS에 떠돈다는 것 아닌가.”
-5·18을 둘러싸고 정치적 좌·우 논란이 있는 것은 진실 규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방증한다.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이다.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기구가 구성돼 38년 동안 꼭꼭 숨어 있던 진실을 발굴해내고, 그에 따른 ‘국가보고서’를 작성해 국민 앞에 소상하게 발표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5·18 광주민주화항쟁 시민군이 북한 특수군이었다’고 주장하는 지만원 같은 세력이 힘을 못 쓰게 될 거다.”


-올 2월 임시국회에서 ‘5·18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됐고 9월이면 ‘5·18진상조사위원회’가 뜨게 된다. 진상조사 주체인 진상조사위를 어떻게 구성해야 한다고 보나
“이전에는 광주시 5·18진실규명 자문관으로 활동했지만 기록관장으로 임명되면서 자문관직은 해촉됐다. 그렇지만 진상규명이란 짐이 떨어져 나간 건 아니다. ‘완벽한 조사’에 이르려면 무엇보다 진상조사위 ‘위원’(9명) 구성부터 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원들이 어떤 조사 태도와 가치시스템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진상조사의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위원장’은 더 잘 뽑아야 한다. 이건 2017년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위원 및 조사관들과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들의 ‘이구동성 주문’이기도 하다.
5·18진상규명특별법 ‘시행령’ 또한 잘 만들어야 한다. 이걸 잘못 만들면 헛발을 찰 수 있다. 현재 광주지역 한 변호사에게 맡겨 ‘시행령 정밀화’를 그리도록 하고 있다. 조사관(50명)의 경우 공모한다고 하는데, 이 또한 적임자가 선정될 수 있도록 광주 현지의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위원장이건 위원이건, 조사관도 마찬가지다. 과거 5·18을 수사 또는 조사해본 전력을 가진 인사라면 임무를 빠삭하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진상 조사를 위해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은
“기록관 학예연구사들과 함께 5·18진상조사위 위원 및 조사관들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핸드북’을 만들고 있다. 군 기록을 포함해 모든 자료를 뒤져가며 진상조사 목록별로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 국방부 5·18특조위가 뜨자 ‘헬기사격의 진실’이란 핸드북을 만들어 특조위에 내놓았는데, 특조위 쪽에서 ‘그게 없었으면 헬기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을 거라고 말하더라. 그리고 위원들과 조사관들이 ‘군문서 관리체계’를 알지 못하면 국방부나 육군본부, 기무사 쪽에 무엇무엇을 내놓으라고 주문하기 쉽지 않을 것이므로 그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5·18 진상규명, 완성품 조사에 이르려면’이란 주제로 포럼도 준비하고 있다. 발표자는 4명이고, 토론자도 4명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 전문에 5·18정신이 포함됐다. 야당의 반발도 있었는데 어떻게 보나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광주에 왔다가 헬기사격 탄흔이 있는 전일빌딩 10층을 둘러봤다. 그때 내가 안내하고 설명했다. 거기서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고 진상 규명도 하겠다’고 깜짝 공약을 내놓았다. 그리고 지난해 5월9일,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5·18 37주년 기념식에서 다시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다’고 확인해줬다.
다 알다시피, 전문에는 4·19혁명에 이어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 정신 계승을 담고 있다. 1987년 9차 개헌 이래 근 30년 동안 헌법이 바뀐 적이 없었다. 긴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도 많이 변했다. 헌법 개정은 왜 하는가. 국민의 뜻과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위한 것 아닌가.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는 정치, 그게 바른 정치인가 묻고 싶다.”


-5·18 당시 옛 전남일보(광주일보 전신) 취재기자였다. 그날의 광주는 어떤 모습이었나
“그때 4년차 기자였다. 300명도 안 되는 학생들이 전남대에 투입된 공수부대와 정문 앞에서 네 차례 공방전을 하다 금남로로 진출했다. 그게 5·18이 된 거다. ‘전남대 정문 앞’이 5·18 도화선이었다. 그 ‘도화선’을 취재한 기자는 전남일보 나의갑 외에는 없다.


전남대 정문 앞에서 아주 중대한 일이 생겼다. 학생들이 공수부대에 쫓겨 정문 앞에서 500m가량 물러나 있을 때, 상고머리를 한 청년이 무리 곁으로 다가와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들었다. ‘오늘 아침 일찍 박관현(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5월14~16일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 총지휘자)이 연행되는 것을 봤다.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31사단 연병장에 쳐둔 철조망 안에 갇혀 있다’고 하더라. 나는 그걸 ‘5·18 유언비어 1호’로 단정하고 있다.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 수상한 청년은 보안대 사람일 수도 있고, 공수부대 심리전 요원일 수도 있다. 연 삼일간의 민족민주화성회 때 명연설로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박관현을 활용해 학생들이 봉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유언비어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런 판단은 5·18 기획설과 유언비어 생산자를 광주시민 쪽이 아니라 계엄군 쪽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5·18 조작 1호’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나왔다. ‘전두환 회고록’까지도 ‘학생들이 책가방에 돌멩이를 담아왔다’고 조작하고 있는데 절대 아니다. 내가 분명히 봤다. 당시 상가 건축 공사가 한창인 정문 쪽 길가에는 돌이나 벽돌들이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돌’이 아니라, 길가에서 주워온 거였다.
신군부 쪽은 악성 유언비어 때문에 5·18이 커졌다고 조작했다. 5·18은 ‘조작으로 시작해 조작으로 이어지는’ 거대하고도 치밀한 조작극이다. 5·18 기간에 이뤄진 조작과 5·18 이후의 조작으로 대별할 수 있다. 진상 규명 때 이 조작에다 돋보기를 갖다 대라는 주문을 해두고 싶다. 조작의 실체를 밝혀내야 5·18 광주의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5·18에 가해진 언론 탄압은 어땠나
“한국현대사를 통틀어 정치권력으로부터 그때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은 사건도, 또 장기 압박을 받은 사건도 없다. 당연히 언론도 그 기간 내내 5·18과 별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5·18 앞에 서면 언론은 죄인이다.
5·18 첫날인 18일은 일요일이어서 신문이 쉬는 날이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을 커버하는 신문은 전남일보와 전남매일신문이었고, 두 신문은 19·20일자 신문만 찍어내고 계엄 당국의 엄명에 따라 윤전기를 돌리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그대로 놔뒀다가는 신문이 ‘광주편’을 들 수도 있겠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일 거다.
19·20일자 신문을 들여다보면 광주에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너무도 태연했다. 단 한 줄도 5·18을 쓰지 못했다. 결국 계엄 당국의 나팔수 노릇만 했다. 참극의 실상이 빠진 껍데기 신문을 접하면서 두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은 저항의 길을 택했다. 전남일보의 경우 내가 주도해 21일자 신문을 ‘검열 받지 않은 신문’으로 제작해 조판까지 마쳤으나, 윤전기에 걸지는 못했다.


13일 동안 죽어 있던 두 신문이 문화공보부의 지시를 받고 속간된 건 6월2일이다. 그날 전남일보는 제작 거부를 했다. ‘신군부 쪽 비위 맞추는 신문 만들어 시민들한테 돌팔매질 당하느니 차라리 신군부에 매 맞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간부들끼리 신문을 제작해 윤전기를 돌리고 말았다.”


-미래세대에 5·18은 어떻게 기억되길 바라나
“대한민국 민주주의 정신의 뿌리로 5·18이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現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1949년 9월 7일, 광주 출생
전남일보 기자
광주일보 기자
1985년 제17회 한국기자상 수상
광주시 5·18사료편찬위윈
광주시 5·18관련여부심사위원
광주시 5·18진실규명 자문관
前 전남일보 편집국장
現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yuni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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