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일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이름 없는 ‘만주의 별들’을 기억하자!

“순국선열 추념관 건립과 합당한 예우, 친일 잔재 꼭 청산을”

머니투데이 더리더 정민규 기자 입력 : 2019.04.15 18:30

[특집]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올해는 3.1절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정부와 지자체, 학계,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일제 치하 36년간 치열했던 항일투쟁의 역사를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식민지 극복, 산업화, 민주화를 향해 달려온 우리 현대사는 이제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시대 정신에 부응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 통한의 역사를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새 시대를 열었던 독립 투쟁사의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매우 활발하며 많은 공감대를 얻고 있다. 아울러 좌우 연합체로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성은 갈등 극복과 사회 통합을 위해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는 평가다. 머니투데이 더리더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기해년 새해를 맞아 3회에 걸쳐 임시정부와 3.1운동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독립 운동사를 재조명함으로써 그간 부족했던 우리의 역사 인식을 성찰해보고자 한다. 그 세 번째로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을 만났다. [편집자 주]


▲추모제에서 배향 중인 이동일 회장 (제일 우측 끝)

우리는 대한의 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살을 에는 칼바람에 맞서며 조선의 청년들은 울부짖었다. 극한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오직 조국의 광복을 생각하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지만 가장 찬란한 별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 부대의 이야기다. 북간도, 만주, 연해주의 얼어붙은 골짜기마다 울려 퍼졌을 독립군들의 ‘압록강행진곡’은 비장함을 넘어 숙연함이 느껴진다. 


항일무장독립투쟁은 조선이 패망한 후 정식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결성된 의병이 주도했다. 이런 조건에서 짧은 시간에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에는 애초에 그 한계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단순히 성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무장 독립 투쟁사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열했고, 끝까지 신념을 지킨 대표적인 독립 투쟁임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한편, 효과적인 단일대오를 결성하지 못하고 분열한 측면도 분명히 있다. 그 이유를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그에 따른 사상과 정치 이념의 차이가 무장 독립 부대에서도 발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독립군 부대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 투쟁이 전개되며 일시적으로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끈질기게 투혼을 발휘했고, 1930년대 전반기 한중 연합 작전으로까지 이어진다. 잔혹하고 간교한 일제의 탄압과 밀정을 피하기 위해, 무장 독립 투쟁은 다양한 소수 게릴라 형태로 비밀리에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무려 100여 개에 이르는 항일 무장 독립 투쟁 단체가 결성됐다. 무장 독립 부대원들은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하고 자신의 신원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웠고, 지조를 지켰으며, 간절히 조국의 광복을 바랐던 그들을 기억하고 보상하기 어려운 가슴 아픈 이유이다.
다음은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회장님과 회장님의 선대, 집안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먼저 저의 증조부 이중언 선생은 1850년 2월 12일 안동시 예안면 하계리에서 퇴계 이황 선생의 12대 후손으로 태어나셨다. 조부로부터 학문과 인격을 연마하고 1879년(고종16년)에 문과급제를 하시고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지내신 분이다. 1879년 김홍집이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는 길에 청나라 공사관 황준헌이 지은 <조선책략>(방러를 위한 친중, 결일, 연미)을 가져왔다. 고종황제가 이를 전국 유생들의 교양도서로 배포하자 증조부는 이에 반대하는 영남 만인소(유생 1만 명의 상소문)에 앞장섰다. 이는 후일 명성황후 시해(1895) 사건으로 봉기한 을미의병의 정신적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께서는 당시 집안의 어른(족숙)인 향산 이만도 선생이 예안의병을 일으키자 전방장으로 참여해 상주 태봉(일본군 병참기지 점령)전투에 앞장섰다.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의병 해산 명령이 있자 향산 이만도 선생은 청량산에 은거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정순국의 결단을 내렸다.
이때 동은 이중언 증조부께서도 뜻을 함께하려 하였으나 향산의 만류로 참았고, 향산이 순국한 지 24일 후 27일간 단식 끝에 자정순국했다.

하계마을은 퇴계 이황의 4대손 동암 희철 선조가 입향한 마을로 15명의 문과급제와 16명의 독립훈장 유공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얼마 전에 열린 뮤지컬 <락! 나라를 아느냐?>는 향산 이만도와 그의 며느리 김락의 독립 투쟁사를 조명한 것이다. 김락의 남편 이중업은 향산의 장자로 심산 김창숙과 함께 파리 장서운동에 앞장서신 분이다.
이 사건은 1919년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기회를 놓친 유림(儒林)계에서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김창숙은 137인이 서명한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향하였고, 국내에서는 서명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전개되었다.
김락은 백하 김대락의 따님이며, 증조부 이중언의 따님은 만주 지역 망명을 위해 사전 답사한 김대락의 조카 김만식의 처이다.

향산 이만도 선생과 증조부 동은 이중언의 자정순국이 알려지자 영남좌도에서는 반일감정이 증폭되어 계몽운동(협동학교, 교육협회 등)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를 통해 혁신 유림으로 거듭났고 만주로 망명한 후 무장 투쟁(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에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분들이 바로 석주 이상룡, 일송 김동삼, 백하 김대락 등이다.

일제는 두 분의 자정순국이 있자 하계마을 전체를 철통같이 감시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조부는 집안에 알리지도 않고 몰래 충청도로 야반도주하여, 저는 고향도 모른 채 자라게 되었다. 제가 어릴 적에 조부님과 선고께서 일찍 작고하셔서 조상의 내력도 잘 알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그후 직업군인의 길을 걸었고, 파월장교를 거쳐 육본에서 예편 후 중소건설회사 부회장으로 근무하면서 선대의 내력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선조들의 위선사업과 (사)순국선열유족회 이사, 부회장직을 40년간 맡아오다가 금년 3월에 본회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순국선열의 의미와 범위를 설명해달라
순국선열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항쟁을 하시다가 그로 인해 광복 이전에 목숨을 바치신 분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1960년 보사부 순국선열 요 선정회의록에 의거 ①전사 ②형사 ③절사(자결) ④피살 ⑤옥사 ⑥옥 병사 6개항에 포함되는 분을 말한다.

이는 다시 의사와 열사로 나누어지는데 열사는 비폭력으로 투쟁하신 분(유관순, 남자현 등)이며 의사는 무력으로 투쟁하신 분(안중근, 윤봉길 등)을 말한다. 그리고 독립 항쟁을 하신 분들 중에서 목숨을 바친 분을 순국선열이라고 하고 목숨을 잃지 않은 분을 애국지사라 한다. (독립유공예우에 관한 법률 제4조)

독립운동가는 독립 항쟁을 하신 모든 분을 말한다. 그중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는 그 공로로 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로서 국가가 공인하는 자를 의미한다.

유족회의 명칭과 창립에 대해 소개 부탁드린다
정식 명칭은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이며 광복 후 국내 최초(1959)로 보건사회부에 등록된 단체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포고령에 의거 모든 사회단체가 강제 해산당한 후 1965년 2월 27일 광복회 설립 시 통합 운영되어왔다. 그 후 광복회가 설립 목적인 순국선열 유지 계승 사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오히려 차별이 심화되었다고 본다. 애국지사가 대부분(90%)인 광복회가 회장을 선거로 선출하여 순국선열유족은 차별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1981년 6월 25일 (사)순국선열유족회 복원 설립 허가를 받아 운영했다. 그 후 정부부처 통폐합에 따라 2001년 9월 26일 행정안전부 등록 제1호로 이관 등재되어 (사)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정관상 회원은 순국선열 후손 중 국가의 보호(보상금)를 받는 후손과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후손들을 합하여 수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다수 후손은 살아 있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은 국가가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후손들에(대부분 순국선열 후손임) 대하여 한 번도 실태 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족회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국가유공자 단체설립법상 공법 단체로 지정된 9개 단체는 기본 운영 지원비를 받고 있다. 그러나 순국선열유족회는 순국선열 위패를 모시고 있음에도 법적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법 단체가 아니어서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직 자긍심 하나만으로 어느 단체보다 효율적인 사업을 진행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유족회 활동의 대표적인 것은 추모제이다. 이미 1919년 11월 21일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시작한 것으로 매년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하여 추모행사를 하고 있다. 광복 후 6.25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추모제는 순국선열유족회, 광복회 등 민간단체에서 주관해왔다.
그 후 1997년 5월 9일 ‘순국선열의 날’ 정부기념일 제정(대통령령 제153 639-32-2호)에 의거해 오전 10시에 정부기념식이 있다. 오후 2시에는 이곳 서대문 독립관(순국선열현충사)에서 해마다 본회 주관으로 별도로 추모제를 봉행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 정신을 기리고 독립 항쟁사를 발굴하여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월간 순국>지를 1988년 창간하여 현재 지령 제338호에 이르고 있다.
또한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나라 사랑 정신 고취를 위한 ‘역사 체험 올레길 프로그램’을 만들어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초•중등학생 1만2000여 명에 대한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순국선열 유족들의 삶과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보나
역사는 승리한 자가 만들어간다는 설이 있듯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 돌아온 자에 의해 보훈 관련 법률과 혜택이 정해졌다. 그러다 보니 순국선열은 국가보훈 혜택에서 거의 사각지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약 15만 순국선열 중 서훈을 받은 분이 3500여 명(2%)이며 그중 국가로부터 보호(보상금)를 받는 후손은 겨우 783명(0.5%)에 불과하다.
그 원인은 보상금 지급의 기준을 대수(본인, 아들, 손자 등)로 정했기 때문이다.
즉, 순국선열은 본인 사망으로 아들과 손자까지 2대 보상, 애국지사는 본인 생존으로 본인과 아들까지 2대 보상이었다.


15만 순국선열 중 10만여 명(67%)이 3.1운동(1919) 이전에 순국하였으며, 48년이 지나 제대로 보상금을 지급할 당시(1967)에는 이미 증손대에 이르러 보훈 혜택에서 처음부터 제외되었던 것이다.
당초 입법 취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은 누구나 2대까지 보상하겠다는 좋은 취지였으나 현실적인 문제가 있으면 개정해야 함에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본인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 사망자의 아들, 손자들은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광복된 조국에 돌아온 일부 후손들마저 2대가 넘어버려 국가보훈 혜택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공법 단체인 광복회 회원 자격이 보상금을 받는 자로 되어 있어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2012년 7월 1일)이 될 때까지 47년간 광복회 회원 자격도 없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은 국가가 존속하는 한 국가가 무한 책임을 져야 함에도 일찍부터 독립 투쟁을 한, 죄 아닌 죄로 시효가 소멸되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2012년 7월 1일)으로 인해 한 번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해방 전 사망자는 대수가 지나도 한 명에 한하여 ‘손자’로 본다. 다만, ‘최연장자를 우선하되 직계비속 전원합의에 의한다(대통령령)’는 규정에 따라 사실상 0.5세대만 혜택을 보게 되었다.
게다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상하다 보니 행방불명자에 대한 호적 정리(전원 합의)를 할 수 없어 보상금 신청 자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실태다. 그 결과, 당초 750여 명으로 예상했으나 7년이 지난 지금까지 겨우 70여 명(10%)만 신청한 상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분은 당초 취지대로 누구나 서훈을 받은 이로부터 2대 보상을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해방 전 사망자에 대해서는 ‘그 후손들의 전원합의’를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바꾸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다. 이렇게 해야만 국가가 그 책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국선열이라고 무조건 더 많은 혜택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순국선열 추모제 제단 전경

정부의 보훈정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본부터 잘못 만들어진 상태여서 그 문제점을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큰 틀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겠다. 우리나라의 궁극적 목적은 세계 속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국민통합이 되어야 하고 그 바탕 위에 평화적 통일을 이룩한 뒤 민족통합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이념을 떠나 민족을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독립 항쟁의 정신을 숭고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신 ‘순국 정신’을 우리 국민들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한다.

첫째, 그 구심점으로 반드시 순국선열 추념관 건립이 필요하다.
세계의 모든 국가는 순국선열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 우선적으로 영웅시한다. 이를 위해 순국선열추념관 등을 건립하여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전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은 15만여 명의 순국선열 중 국립현충원에 유해가 봉안된 분이 겨우 426위(0.3%)이므로 ‘순국선열 추념관 건립’이 더욱 시급하다. 천안의 독립기념관보다 먼저 건립되어야 할 사안임에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은 심히 부끄럽고 죄송할 따름이다.


둘째, 순국선열에 대한 합당한 국가적 예우의 재정립을 원한다.
추념관 건립과 아울러 보훈기본법 제18조에 의거, 희생과 공헌에 합당한 예우(보상금법 등)가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친일잔재 청산을 통해 최소한의 정의와 상식이라도 확립해야 한다.
친일파를 지금 처단(형벌)하거나 그 후손들이 죄가 있다고 공격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죄과와 명단만이라도 확실하게 밝혀 그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국민들에게 죄송한 마음이라도 갖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도리를 다하도록 하자는 뜻이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관련 유족회 활동은
3.1운동은 200만 우리 민족이 거국적으로 평화적 독립 투쟁을 한 쾌거이다. 그 영향으로 임시정부수립과 무장 투쟁의 확산이 가능했다. 따라서 100주년을 맞아 범국가적 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독립 항쟁에 있어 가장 선도적으로 희생이 많았던 간도와 만주, 연해주 지역의 항일 무장 투쟁 선구자들이 3.1운동과 임시정부에 가려 잊혀지고 있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
그래서 저희들이라도 관심을 갖고 이를 바로잡고자 ‘무장 항쟁 100주년 만주벌의 별이 되어’라는 주제로 금년 광복절을 맞아 서대문형무소 박물관, 국회, 정부청사 등에 전시하고자 한다.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시각에 대해서 어떤 의견이신지
광복이 사실상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고는 대단히 위험한 사고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1만세 항쟁은 중국의 5.4운동, 동남아시아, 인도 그리고 이집트 독립운동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한인애국단 윤봉길 의사의 의열 투쟁에 대해 중국 장개석 주석은 “중국인 10만 명이 하지 못하는 것을 조선인 한 사람이 쾌거를 이룩하였다”고 감탄했다. 안중근 의사의 독립 정신은 적국인 일본인마저도 그 위국 충절을 찬양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대한국인의 자주 독립 정신이 세계 만방에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전후 처리 과정에서 조선의 자주 독립이 승인된 것이다. 당시 인도의 간디 수상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매우 부러워했다.

반민족 친일파 청산 실패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이 친일파를 등용한 것이 잘못된 시작이었다. 또한, 남•북 분단과 6.25전쟁을 겪으며 자신들을 투철한 반공주의자로 위장한 친일파들의 야비한 술책에 당한 것이 가장 통탄스럽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역사의 아픔이며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지금이라도 미래를 위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게 명확한 청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국선열 추모제에서 조총을 하는 의장대

건국절 논란이 여전하다. 어떤 생각인지
건국에 대한 개념적 인정은 국민, 영토, 주권의 3요소가 이루어졌을 때로 본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다. 세계사적으로 살펴보면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3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은 채 건국되었고, 건국절이 없는 나라도 다수 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하자는 것은 매우 편협한 발상이다. 비록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외형적 세 요소는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으나, 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독립 투쟁의 역사를 간과하는 측면이 크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다. 이미 그 당시 정식 국호도 대한민국이었고, 일본제국이 차지한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5000년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위대한 한민족의 뿌리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도 분명히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위대한 대한민국’이 우리의 최종 목표이면 국민 통합을 저해하는 건국절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
건국절 자체가 없는 나라도 많고, 국가적 특수성에 따라 상징적인 날로 정한 나라도 많다.
굳이 정해야만 한다면 개천절(10월 3일)로 통합하면 된다고 본다.

김원봉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관련 논란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의 평가는
김원봉 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서훈과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이 부분은 우리 국민 모두가 역사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20세기 초기에는 서양을 비롯한 세계 강대국의 제국주의자들이 약소 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개척하던 때이다.
1905년 7월 일본의 관방장관 가스라와 미국의 국방장관 윌리엄 태프트의 협약에 의해 미국은 조선을 일본에게 양도하다시피 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동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했고 대한제국은 외형만 남은 채 사실상 망국일이 되었다. 연이어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로 우리의 독립투사들은 국내 항일 투쟁(의병)이 불가능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끊임없는 독립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 서양의 모든 나라가 일본편에 섰고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조국 독립의 지름길은 어떤 세력이건 힘을 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회주의 독립 항쟁이 나타나게 된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즉, 당시 사회주의가 오늘의 김일성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었다면 아마 그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주의 독립항쟁을 한 모든 분들에게도 반드시 서훈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오늘의 잣대로만 폄하하는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된다. 다만 북한 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한 자는 예외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올바른 역사 교육의 방향은 무엇인지
첫째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면 과거의 불행과 실패가 되풀이된다.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뿐 아니라 후세에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조국과 민족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실천한 순국 정신이 국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릴 때 진정한 국민 통합과 평화적 남북통일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국민들께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권력을 위한 이해관계를 떠나 무엇이 진정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것인지 지혜롭게 살펴야 한다.
또한 역사와 미래를 위해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반드시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순국 정신의 기치 아래 국민대통합의 길을 걸어주실 것을 당부하고 싶다.


[편집자 주] 인터뷰 내용은 이동일 회장의 주장으로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밝힙니다.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직업 군인, 파월 장교, 육본에서 예편
중소건설회사 부회장
(사)순국선열유족회 이사, 부회장, 현재 회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jmg1905@mt.co.kr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