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입력 : 2019.04.16 09:22

이도(李祹, 1397~1450)는 조선 3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 조선 4대 세종대왕이 된 분이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임금,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 그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노비제도, 명나라와 사대관계, 서얼제도, 광업과 상업정책에 있어서 그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고 지적되기도 한다. 몇 가지 비판받을 점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는 ‘한글 창제’라는 업적 하나만으로도 한국사에서 길이 기억되고도 남을 위대한 임금임에는 분명하다.


태종이 그를 선택한 이유
1398년 10월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복동생인 방석과 방번,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을 살해하고, 조선을 건국한 아버지 이성계마저 몰아냈다. 2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고 3대 태종(1401~1418)이 된 그는 자신의 측근마저 숙청하며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하지만 유교가 권장하는 장자 계승에서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종은 자신의 자식만큼은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어가기를 희망했다.


태종은 장남인 이제(1394~1462)를 11살이 되던 1404년에 세자로 책봉했었다. 그러나 태종은 1418년 14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던 세자 이제를 제치고, 3남인 이도를 세자로 책봉했다. 그리고 2개월 후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무리수를 두어가며 후계자를 바꾼 태종은 상왕이 되어서 여전히 군권을 장악하며 계속해서 통치력을 발휘했다. 태종은 세종에게 임금 수업을 시키는 한편,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인 심온을 반역죄로 죽이는 등 세종이 왕권을 행사하는데 방해요소들을 제거해주었다. 형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살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아버지의 낙점에 의해 왕위에 오른 세종은 자신이 왕의 재목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불철주야 일에 매달려야 했다.


태종이 굳이 세자 교체를 단행한 것은 장남인 양녕대군 이제와 달리, 3남 충녕대군 이도에게는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도가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제의 약점으로 지적된 성실함을 이도는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이 된 이도는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성실한 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진정 학문을 좋아했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끝없이 고민했으며, 무엇보다 강력한 실천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준비된 지도자였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사진=김용만 제공
백성이 하려고 하는 일을 어지러워지지 않기 위해 임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임금이란 자리는 백성을 위한 자리임으로 백성이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다 받아야 한다.”- (세종실록 13년(1431) 6월 20일) 관리와 백성의 관계를 부자관계라고 여겨, 아랫사람이 감히 윗사람에게 호소하는 것 자체를 불경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신하에게 세종이 한 말이다. 백성들에 의해 왕이 추대됐다는 그의 정치관은 당시에는 대단히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1430년은 세종은 호조 관리가 논밭을 확인하고 세금을 거두는 방식을 개선하여 전답 1결마다 10두를 거두는 ‘공법’이라는 토지세법에 추진하면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5개월 동안 17만 명이 참여한 최초의 여론조사에서 찬성 9만 8000명, 반대 7만 4000명이란 결과를 얻고 법제정 여부를 가늠했다. 이후에도 세종은 수차례 개정과정을 거쳤고 시범실시에 토론을 거쳐 무려 13년 만에 세법개정을 공포하고 시행했다. 제왕의 권위가 하늘이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이처럼 백성의 목소리를 귀담아듣고 신중한 논의과정을 거쳐 세법을 시행했다. 자신의 책무를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세종은 높은 지위에 올랐으니 마음껏 권세를 누려보자는 다른 지도자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고려 말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곤란했다. 권문세가의 대토지 겸병으로 많은 이들이 땅을 잃었고, 왜구의 침탈로 인해 순식간에 생활의 터전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조선은 외교적 노력은 물론, 1419년에는 군대를 동원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토벌하기도 했다. 조선은 백성을 위한 정치, 즉 민본정치를 표방한 나라였다. 하지만 진정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 임금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달랐다.


세종은 백성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하다고 여기고, 의녀제도를 전국으로 확산하고, 의학서적을 편찬하고, 국산 약재를 개발하는 등 의료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가장 취약한 처지에 있는 병자나 죄수들을 위해 한여름에 궁궐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활인원에 보내 열병 환자를 치료하게 했다. 또 당시 높은 유아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제생원의 개선을 명했다. 세종은 제생원 옆에 집 3칸을 짓고, 버려진 아이들을 구호하여 키우게 했다. 정식 보육원을 창설한 셈이다. 또 버린 아이를 기르려는 사람이 있으며 뜻대로 기를 수 있게 했다. 아울러 여자노비들이 출산 중에 사망하는 일을 막기 위해, 출산휴가 제도를 대폭 개선해, 종래 7일이던 여자 관노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크게 늘렸다. 또한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는 복무를 면제시켜주었다. 아울러 남편 노비에게도 산모 간호 휴가를 주었다. 시대를 앞선 출산 전후 휴가 제도를 도입한 세종은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는 사람이 없게 과도한 형벌을 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곤란해질 때 가장 적극적으로 구휼정책을 실시했다. 세종은 기민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락하고, 어디에서 기민들이 왔는지를 묻지 않게 했다. 기민이 발생해도 관리가 이를 숨겨 제때에 구휼하지 못하는 폐단을 막으려는 조치였다. 세종은 기민을 구제하는 일을 수령의 근무평점에 크게 반영하게 했다.

율곡 이이는 세종시대에 백성의 살림이 나아지고, 인구가 많아졌다고 평가한 바 있다. 세종의 노력이 효과적이었다고 후대인들도 평가했던 것이다.

▲세종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천문기기인 혼천의와 해시계/사진=김용만 제공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기 위한 노력
구휼정책 등을 제대로 실시하려면, 국가 재정이 넉넉해야 한다. 세종은 거듭된 기민 구제로 악화된 국가 재정을 만회하기 위해, 왕실의 재산부터 축소시켰다. 요즘으로 보자면 대주주의 배당금과 보수를 줄이고, 기업 재정을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왕실 재산의 헌납이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무엇보다 국가 전체의 경제력이 높아져야 한다. 세종은 간척지와 황무지 개간을 적극 권장하고 세제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초목이 우거진 늪이 많이 개간되었고, 특히 함경도 지역에 개간지가 늘어 인구도 증가했다.


아울러 세종은 1429년 <농사직설> 편찬을 명해 농서를 발간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등 농법 개량에도 적극적이었다. 세종은 낮은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논 농사법을 발전시키고, 모내기법 등을 보급했다. 또 검은 기장 등 다수확 품종을 개발해 보급하고, 지역에 따라 양잠이나 목화 같은 메마른 밭작물을 보급하는 한편, 구황식물로 무를 적극 재배하게 했다. 그 결과 조선의 농지 면적은 약 3배 이상 크게 증대되었고, 단위면적당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 또한 세종은 장수한 노인들을 크게 대우해주었는데, 농업국가에서는 노인의 지혜와 경험이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의 이러한 업적은 요즘 기업에 비유하자면, 기술개발을 적극 지원하고 경험 많은 기술자를 우대하며, 생산성과 생산량 모두를 크게 증가시킨 탁월한 경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세종은 복지, 환경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426년 2월 도성 안에 대형 화재가 난 것을 계기로, 세종은 화재에 약한 초가를 개량하여 기와집으로 바꾸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기와 굽는 가마를 3곳에 추가로 만들고, 가난한 집에는 값을 받지 않고, 재력이 부족한 자는 반값에, 재력이 있는 자는 제값에 기와를 차등 있게 분배했다.

공부하는 리더
세종은 심허증, 관절염, 이질 등 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지나칠 정도로 공부에 전념하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젊어서 매우 비만했다고 하는데, 공부 탓에 운동에 소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각종 직무로 바쁜 와중에도 학술자문기관인 집현전에 나가 조선 최고의 학자들과 더불어 연구하고 토론했다. 임금이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만큼, 그의 신하들도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했다.


세종은 이순지, 장영실, 이천 등 과학자로 하여금 물시계인 자격루, 해시계인 앙부일귀를 비롯해 측우기, 혼천의 등 많은 과학기자재를 만들게 했다. 특히 이때 만들어진 혼천의는 아라비아 역법을 받아 중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달랐다. 1444년 간행된 <칠정산외편>은 아라비아의 역법을 연구하여 해설한 책으로, 1년의 길이를 정확하게 계산한 책이다. 역법 계산에는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인 태양년을 기준으로 해야 농업에서 실용성이 있기 때문이다. 세종은 박연을 통해 우리 음악을 정리하게 하고, 정초로 하여금 <농사직설>을 만들게 하고, 맹사성으로 하여금 <팔도지리지>를 만들게 했다. 농업 발전과 직결되는 과학기술, 조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조선의 문화의 폭을 넓혀주는 많은 성과가 세종 시기에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성과들을 끌어낸 것은 결국 지도자의 리더십이 절대적이었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처럼 신하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이 조화되는 정치를 한 임금이었다. 그는 수직적인 권위 대신에 수평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세종은 전문 연구자를 능가하는 풍부하고 깊은 학식을 갖고 있었음에도 넓은 포용력으로 신하들과 소통했다. 세종 시기에 많은 인재가 나온 것은, 세종 스스로 인재를 아끼고, 인재를 열심히 키웠기 때문이다. 세종은 출신이나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래 관노였던 장영실을 발탁한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많은 장점을 가진 리더였다.

▲세종대왕이 백성들과 소통을 위해 만든 훈민정음/사진=김용만 제공
한글을 창제한 이유
세종은 단군사당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시조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올리게 했다. 세종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명나라가 구축한 세계질서에 순응했지만, 그 질서 속에서도 조선을 중심으로 대마도, 여진족이 참여하는 독립된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최윤덕과 김종서 등을 보내 4군 6진을 개척하여, 조선의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세종은 조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1443년 <훈민정음> 창제 반포다. 전 세계 수많은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며, 가장 우수한 글자로 평가받은 한글 창제의 주역은 단연코 세종이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과의 소통이었다. 1459년에 간행된 <훈민정음>해례본 첫머리에는 ‘나랏말ㅆ미’로 시작되는 세종의 ‘어제문’이 실려 있다. 백성을 사랑하는 세종의 마음이 표현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세종 스스로가 백성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지배층의 글자인 한자가 갖는 특권을 침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백성들과 적극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백성을 가르칠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성도 지배층과 대등한 인격체로 인정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세종이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을 한글로 풀어서 발간하려고 한 까닭은 백성들도 윤리를 알고,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백성들을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다.

소통하는 지도자,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
세종은 엄청난 독서량과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수많은 업적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그것이 단지 그의 천재성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세종은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임금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탁월함은 타고난 재능보다 엄청난 노력에 있었다고 하겠다.
후손들에게도 엄청난 문화유산을 물려준 세종은 군림하는 통치자가 아니라, 소통하는 지도자, 연구하는 지도자, 무엇보다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였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4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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