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이 비극이 되지 않으려면

[안민호의 여론객설(輿論客說)]

숙명여대 안민호 교수 입력 : 2019.05.09 15:05

소제양난(笑啼兩難),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바로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수처법과 연동형비례대표제 선거법 개정안의 패스트트랙 지정을 두고 국회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여야(與野) 간 물리적 충돌을 막겠다고 도입한 패스트트랙 때문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고, 민주주의를 더 잘하기 위해서라고 하며 민주주의적 절차를 훼손하는 말이 안 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을 탄핵하고 촛불 혁명을 완성했다는 대한민국 제20대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교도소에 있는 전임 대통령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비극(悲劇)을 희극(喜劇)으로, 희극을 비극으로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우리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종류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새삼스럽지는 않다. 그래도 한동안 뜸하다가 오랜만에 재현되는 동물적 난장판이다 보니 당혹스러운 마음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법무부장관을 지낸 강금실 씨의 말마따나 지금 벌어지는 정치적 상황은 보이는 그대로“코미디야 코미디”다.

일의 시작은 작년 말,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의 목숨을 건 단식이었다. 실제로 그는 국회 로텐더홀에서 혼자 덩그러니 의자에 앉아 자신 한 몸을 바치겠다는 말도 했다. 비장해 보였고, 선거법 개정을 위한 여야 합의가 가능할지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기대도 생겨났다. 그리고 역시나, 공수처법과 새로운 선거제도가 연결되고 패스트트랙이란 새로운 변수가 개입하면서 거대 양당을 준엄하게 꾸짖던 손 대표는 자신의 정당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우리 정치를 코미디로 보이게 하는 주인공이 되어버렸다.

속이려는 자와 속아주는 자
코미디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물이 등장한다. 하나는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능력이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과장하고 자랑하는 허풍선이고, 다른 하나는 알면서도 모르는것처럼, 짐짓 약하고 순진한 체하는 꾀돌이다. 문학 비평 용어를 빌리면 전자가 알라존(Alazon), 후자가 에이런(Eiron)이다. 이들은 원래 그리스 연극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물 유형들인데 에이런은 겉으로 말해지는 것과 감추어진 실제 사이의 괴리를 의미하는 아이러니(irony)의 어원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건, 모자란 사기꾼이건 간에 알라존은 속이려는 자다. 반대로 현명하거나 약삭빠른 에이런은 속아주는 척하는 자다. 만화영화 <톰과 제리>의 톰이 알라존이고 제리가 에이런이다. 알라존과 에이런 모두 기만적이지만 항상 승리는 에이런의 몫이다.

그래야 재미가 있고 얘기가 된다. 강한 척, 잘난 척하는 자가 도리어 약하고 순진해 보이는 자에게 속아 넘어가는 반전에 관객들은 즐거워한다. 에이런은 관객과 직접 소통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존재기도 하다. 관객은 이런 에이런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관객도 알고 에이런도 아는 것을 알라존만 모르는 데서 아이러니가 만들어지고 코미디가 되는 것이다.

연극은 계속된다
아직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회의 수많은 알라존과 에이런들이 만들어내는 한 편의 드라마는 내년 4월 총선까지 1년 정도 더 계속될 것이다. 누가 알라존이고 누가 에이런인지는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판가름 나겠지만 대한민국 정치의 관객이면서 동시에 주인공인 일반 시민들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마냥 한 편의 소극(笑劇)으로 보고 지나가기에는 가슴이 쓰린 것도 사실이다.

이런 난장판의 중심에 바른미래당이 있다는 것도 코미디라면 코미디인데 그만큼 착잡한 마음을 더한다. 대한민국 정치를 새롭게 바꾸겠다던 게 바른미래당 아니었던가.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중 누가 승자가 될지는 불분명하지만 현시점에서 분명한 것은 바른미래당의 철저한 실패고 패배다. 그나마 의미 있는 패배도 아니고 한낱 웃음거리로의 몰락이다. 바른미래당 자체가 하나의 허풍선이고 알라존이 되어버렸다. 올드보이 손학규 대표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나라 새 정치의 기수로 기대되던 이들도 함께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이대로는 더 이상 존재 이유를 찾기 어렵게 되어버린 바른미래당이다.

“가장 선한 이들이 모든 신념을 잃어버린 반면, 가장 악한 이들은 격정적 열렬함으로 가득 차 있네.” 현대사회의 속물적 속성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소개할 때 내가 수업에서 즐겨 인용하는 윌리엄 예이츠의 시구(The second coming, 1919)다. 백 년 전 아일랜드 시인의 문학적 표현이기는 하지만 속물적이고 기만적인 이들의 격정적 열렬함은 우리 정치를 꽤 잘 설명하는 특성이다. TV를 통해 생생히 전달된 이번 패스트트랙 소동에서도 우리는 그런 소인배들의 격정과 열렬함을 너무나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희극적 정치가 초래하는 비극적 현실
문제는 현실정치에서 소인배들의 속물적 열렬함과 선한 이들의 신념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라존과 에이런 같은 유형의 본질이 바로 겉과 속이 다른 기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주 선한 이들의 신념을 악인의 열렬함으로 또 반대로 속물들의 격정을 선한 신념으로 잘못 판단하게 되는 우(愚)를 범하는데, 바로 이것이 희극적 정치가 초래하는 비극적 현실, 즉 선한 이들이 신념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인배들이 더 열정적으로 되는 이유가 된다.

누구는 헌법수호를 말하고, 누구는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을 말한다. 누구는 독재반대를 외치고 다른 누구는 법치주의를 주장한다. 겉으로는 모두 훌륭한 말이다. 모두 선한 이들의 신념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사생결단으로 싸운다. 분명 누군가는 가짜다. 어쩌면 모두 가짜인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비추는 걸 눈치 못 채고 시시덕거리는 걸 보면 정말 사생결단인 것 같지도 않다. 언론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는 바로 알라존의 그것이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방법
어렵지만 그래도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자신의 말과 논리, 행동에 어떤 책임을 지는가를 보면 그가 가진 것이 선한 신념인지, 속물의 열렬함인지 알 수 있다. 소인배는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모두가 남 탓이다.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라고 불리는 것도 바로 이런 자발적 책임과 관련된 것이다. 대화법에서 항상 에이런의 역할을 담당했던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리를 따르기 위해 악법도 법이란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신다.

우리 정치를 이렇게 웃음거리로 만들어놓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은 없다. 앞으로 누가 스스로 이 소동에 대해 책임지는 행동을 하는지 두고 볼 일이다. 책임지려는 이들이 진짜고 남에게 전가하는 이들이 가짜다. 그것을 가려내는 마지막 단계가 내년 총선이다. 정치인들이 속이려는 배우 알라존이라면 관객인 유권자는 속아주는 척하는 에이런이다. 속아주는 척하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진짜를 가려내는 반전으로 희극은 완성된다. 그런 반전 없이 진짜로 속을 때, 희극은 비극이 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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