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실패한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 입력 : 2019.08.16 10:48

조선 역사에서 가장 비난을 많이 받는 임금은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을 버리고 몰래 도망쳤던 선조(재위:1567~1608)와 인조(재위:1623~1649)다. 이들은 국가적 위기에서 올바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왕위 유지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자식을 견제하거나 죽이는 못난 짓을 한 것도 비난받는 이유가 된다. 반면 두 임금 사이에 나라를 다스렸던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임시 조정인 분조(分朝)를 이끌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독려하는 공을 세운 인물이다. 선조와 인조가 사대주의에 빠져 대책 없는 외교정책을 펼친 것과 달리 광해군은 실리외교,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한 조선의 자주성을 높이려고 노력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여 민생 안정에도 노력한 임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정변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조선에서 광해군은 실패한 지도자였다. 광해군의 리더십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경희궁 흥화문–조선후기 창덕궁과 더불어 왕의 주요 생활공간이었던 경희궁은 광해군이 처음 건설했다. 하지만 경희궁은 너무나 많이 파괴되어, 현재는 궁궐의 흔적조차 희미하게 남아 있다. 심지어 정문인 흥화문은 본래 위치가 아닌 엉뚱한 곳에 서 있다.
전란을 수습한 광해군
1575년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난 광해군 이혼(李琿)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자신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대신, 분조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때 선조는 자질에 문제가 있는 장남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왕세자로 삼아 분조를 책임지게 했다. 17세에 불과한 광해군은 의병 모집을 진두지휘하며 직접 종군하여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민심을 수습했다.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대비되면서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국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훈련도감을 창설하고, 화약무기인 총을 쏘는 포수(砲手)를 육성하는 등 무기 체계도 개선했지만, 조선의 국방력은 여전히 허약했다. 1608년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전란의 상처 회복을 급선무로 삼았다. 그래서 토지조사 사업을 통해 토지를 전쟁 전 상태로 복구하는 데 주력하고, 농민의 세금부담을 덜어주고자 경기도 일대에 처음으로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대동법 시행은 양반 지주들의 부담을 늘리고, 서민의 부담을 줄이는 제도이지만, 대부분이 지주였던 관료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경기도 일대에만 실시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한 경제정책이었다. 광해군은 은광 개발을 허락하고, 화폐를 주조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추진했다.


광해군은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집필하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란과 기근으로 인해 질병이 만연하던 시기에 인명손실을 줄이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광해군은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조선 초기에 간행된 서적을 다시 편찬하고,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재건하는 등 전후 문화 복구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동국신속삼강행실도>는 조선 초기에 발간되었던 <삼강행실도>에 임진왜란 기간 중 충성과 절의를 지킨 사람들의 일화를 대거 수록하여, 유교적 질서를 재확립하고자 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한 광해군묘. 그는 왕이 아닌 군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릉이 아닌 묘로 격하된 상태다. 그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되지 못했다.
실리외교를 추구한 광해군
리더로서 광해군의 역할은 외교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임진왜란으로 조선과 명나라가 약화된 틈을 타서, 여진족이 급격히 성장했다. 16세기 말 여진족은 동해 3부, 장백 3부, 건주 5부, 해서 4부로 나눠져 있었다. 분리된 여진은 조선에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1583년 건주여진 출신 누르하치(1559~1626)가 거병하여 건주 5부를 통합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593년에는 해서여진을 비롯한 9개부의 연합 공격을 물린 후, 장백 3부, 동해 3부 등을 모두 통합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명나라의 간섭이 줄어든 틈을 타서 빠르게 성장한 누르하치는 1616년 국호를 후금으로 정하고 칸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1618년에는 오랜 원수였던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명나라는 누르하치에 대항하고 있던 해서여진의 여허부와 더불어 후금을 공격할 것을 결정하고, 조선에도 출병할 것을 요청했다.


조선 사대부들은 임진왜란 당시 멸망할 위기에 있던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갚기 위해서라도 출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광해군은 전쟁에 직접 종군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파악했다. 명나라는 오랫동안 초강대국이었지만, 쇠망기의 여러 문제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반면 후금은 떠오르고 있는 신흥 강국이었다. 광해군은 조선이 전란의 후유증으로 군사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새로운 전쟁에 휩싸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실익이 없는 전쟁에 파견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압력과, 조선 내부의 여론 때문에 파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때 광해군의 선택은 전쟁에 참전은 하지만, 후금의 원한을 사지 않도록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을 따로 불러 전쟁 상황을 보아 후금에 투항해도 좋다는 밀지를 내렸다. 강홍립은 명의 원군으로 참전하다가 곧 후금군에 투항해, 후금과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광해군의 밀지를 전했다. 광해군의 예상대로 누르하치는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대파했다. 이어서 여허부마저 병합하여 만주족 통합을 완료하고, 강국으로 등장했다. 조선이 후금과 친교하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누르하치는 명나라와 전투에만 집중한다. 광해군 시기 조선과 후금은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탁월한 국제 감각이 조선에 평화를 가져온 것이다.

▲경희궁 숭정전의 칠조룡-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에는 발톱이 7개인 용조각이 천장에 있다. 조선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광해군의 의지의 산물이다.
하늘 제사를 지내고자 한 광해군
1616년 여름 광해군은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날마다 상소를 올려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했다. 황제국인 명나라만 하늘 제사를 올리고, 제후국인 조선은 예에 어긋나니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하들의 논리는 유교를 받아들인 후 사대주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국시대는 물론, 고려, 그리고 조선 초 세조 임금 등이 하늘 제사를 올렸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세조의 예를 들어 하늘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한 것은 조선의 국가적 위상을 올리고자 함이었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칸(황제)을 자칭한 것에 자극받은 영향도 컸다.


광해군은 1620년에 완공된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천장에 발톱이 7개인 칠조룡을 만들도록 했다. 제후국에서는 4조룡, 황제국은 5조룡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칠조룡을 만들도록 한 것은, 조선 왕의 권위를 드높이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광해군은 격변하는 시대에서 조선의 왕으로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광해군의 발목을 잡은 선조의 콤플렉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다. 명나라의 압박과 횡포, 후금의 성장과 같은 외부적 요인도 있었지만, 내부적 요인이 더 문제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선조가 문제였다. 선조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왕비의 자식이 아닌, 방계에서 왕위에 오른 임금이었다. 혈통에 하자가 있던 그는 왕비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그는 후궁의 자식인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며 백성들의 인기를 얻자, 질투하기 시작했다.


선조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계속 미루었고, 55세 나이에 뒤늦게 19세에 어린 신부와 재혼하여 1606년 영창대군을 얻었다. 그는 3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그는 1608년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고 말았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자들이 생겨나게 만들었다. 광해군은 아버지가 남긴 불화의 씨앗 때문에, 결국 1613년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을 왕으로 삼으려는 소북파를 축출하고, 다음해에는 영창대군을 죽였고,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켰다. 광해군은 당장 왕위를 넘볼 세력을 제거하였지만, 도리어 반대파를 결집시키고 말았다.

신하들과 마찰을 극복하지 못한 광해군
선조는 방계 출신이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림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쳐 신하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광해군은 왕위에 오를 때부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력히 존재했기 때문에, 자신을 지지하는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그의 정책은 신하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로부터 받는 질투와 의구심을 지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었다. 그는 왕위에 올라서도 왕위를 넘볼 자들이 없을까 늘 의심했다. 그 결과 그는 다양한 신하들을 거느리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국가의 존립이 걸린 중대 외교 문제에 있어서, 신하들의 반대 입장을 무마시키지 못했다. 광해군이 명, 후금 사이에서 행한 실리적인 외교정책은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서인들은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크게 비난했다. 서인들은 명나라를 망할 뻔한 조선을 다시 살게 해주었으니 크게 감사해야 할 나라라는 인식을 넘어, 명나라를 조선의 부모의 나라라고 규정했다. 광해군이 단지 명나라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충효의 의리마저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결국 1623년 이귀, 김류 등 서인세력은 정변을 일으켰다. 약 1,400명 군사가 한양도성의 북서문인 창의문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와 곧바로 창덕궁으로 들어와 광해군을 붙잡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 소수의 병력만으로도 정변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도성과 궐내에서 서인세력에 호응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창의문–한양도성의 북소문인 창의문은 광해군을 몰아내는 반정군이 들어온 성문이다. 창의문 문루에는 반정공신의 명단이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왜 광해군의 리더십은 왜 실패했을까?
광해군은 뛰어난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잘 이끌었고, 전후 복구 사업에도 열심이었다. 무엇보다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통해 조선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준 임금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축옥사와 실리외교로 인해 유교 윤리에 어긋난 인물로 비난받아 폐위되고 말았다.


17세기 초 명-청 교체기라는 국제적 격변기에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조선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세력들은 정변의 명분 때문에, 이후 외교정책에 있어서 고집스럽게 명나라에 충성하고 청나라에 대항하는 정책을 고집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조선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50만이 넘는 백성들이 아무 죄도 없이 청나라에 끌려가야만 했다. 정변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보다, 훨씬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러한 결과 때문에 광해군을 재평가하자는 사람들도 많다. 광해군 정권의 취약성과 계축옥사는 아버지 선조가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많다. 또한 성리학자들의 융통성 없는 명분론이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방해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광해군은 좋은 리더는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을 폭넓게 포용하지 못했다. 이이첨 등 소수에게 의지하는 용인술로 인해, 반대파 신하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지 못했다. 국가적 위기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국내의 단결과 단합이다. 물론 전란의 위기 앞에서도, 자신들의 권력욕과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한 신하들의 문제도 컸다.

 
광해군은 자신의 발목을 잡은 문제들을 당장 눈에 보이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소수에만 의지해 해결하려고 했다. 광해군은 포용력이 있는 리더가 되지 못했고, 자신을 얽매였던 왕통의 취약점에 너무 얽매였다. 이 점이 광해군을 실패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탁월한 리더는 내부의 분쟁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여 힘을 모으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자신들을 지지하는 특정 세력에게만 맞는 입장을 고수하거나, 당파가 다르다고 상대의 잘못만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실패한 역사가 오늘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8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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