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민주사회인가

[박상철의 정치클리닉]

경기대학교 박상철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입력 : 2019.09.02 09:47

월간지 <더리더>의 창간과 함께 5년 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한국정치의 클리닉과 갈 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칼럼을 집필해 왔다. 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정치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칼럼에서 무수히 그 대안들을 제시해왔으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보다 더 무심히 변화가 없었고, 한국정치는 오히려 퇴보ㆍ퇴행ㆍ퇴영되어만 가고 있다. 이제 말과 글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기에 잠시 한국정치클리닉의 칼럼과 집필을 중단하면서, ‘마지막 칼럼’으로 한국정치와 우리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마감하고자 한다. ‘한국은 민주사회인가.’ 진지하고 어려운 문제이지만 같이 고민했으면 한다.


토론이 있는 사회

지금 한국은 민주시민이 주도하고 있는 민주사회인가. ‘2016 광화문 촛불시위’와 ‘2017 탄핵’이 상징적이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겉모양새와 절차는 민주국가로 손색이 없지만, 보수·진보 서로간의 토론과 소통이 거의 없어 민주질서의 힘이 약하고 불안한 사회다.


민주시민사회를 인류사회 고도의 완성단계로 보는 것 중 가장 절실한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사는 교육이 되어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어느 과장하기 좋아하는 교수 왈, 독일은 민주시민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예산 편성에 있어서 도로보수비용보다 민주시민교육에 더 쏟아 붓는다고 한다. 과장은 분명하지만 민주시민사회 공동체 유지를 위한 민주시민교육의 중요성 역설만큼은 실감이 난다.


누가 주도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는 규정되어진다. 원시사회는 원시인이 주도했을 것이고 야만사회는 야만족, 독재국가는 독재자가 주도한다. 인류사회 진화의 최종(最終)을 민주시민사회라고 할 때, 민주시민이 이끄는 사회를 우리는 선진국가요 민주시민사회라고 명명한다. 대다수의 국민대중이 참여한 광화문 촛불집회가 강한 민주주의 국가 완성에 기여했다고 하여 우리 사회가 민주시민사회의 진입에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사회의 아픔이자 취약점 중 하나가 보수와 진보가 적대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적대적 균열구조는 천문학적 사회경제갈등비용을 허공 속에 뿌려대고 있고, 국가는 저발전의 늪 속에서 한발짝도 못나가고 있다. 정상적인 발전궤도로의 진입을 위한 필수조건은 보수ㆍ진보가 상호보완적 관계에 설 때에 그것을 민주사회로의 진입이라 할진대, 비로소 한국의 제2 비약적 발전이 가능한 시점이기도 하다.


서로간의 토론과 소통이 없는 민주사회는 일사불란한 독재보다 못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ㆍ일본ㆍ북한 등 다른 동북아 국가들과 달리 여ㆍ야 정권교체형 민주체제를 가진 유일한 국가로서, 토론과 소통, 협치와 공생의 사회운영방식을 갖추는 순간 엄청난 국가적 에너지와 민족적 에네르기를 갖게 될 것이다. 2002 월드컵 때 모두가 체험한바 있다.


‘토론이 있는 사회’는 진정한 민주사회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생산적 토론은 세상을 제대로 보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민주한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권리와 의무 배양을 위하여 각자에게 탈3차원적 장애와 탈한계적ㆍ탈고정적ㆍ탈허구적 사고를 권한다.

◇탈3차원적 장애인 : 탈토론장애

신체장애자를 제1차원적 장애인, 정신장애자를 제2차원적 장애인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제대로 보려는 양식과 양심을 못가진 자를 제3차원적 장애인(토론장애)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인간은 비록 신체와 정신적 장애는 불가피하게 겪게 될 수도 있지만,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자는 제3차원적 장애인에서 벗어난, 완전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이 동물ㆍ짐승과 다른 것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 양식(良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된다.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실종되면서 부질없는 이념과 허구, 심지어는 환상과 환각에 의해 우리 사회가 정치ㆍ사회 갈등으로 병들어가고 있다.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 이전,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천동설(天動說)이 상식이었다면, 과학적 집념은 객관적인 사실로서 지구가 돈다는 자전(自轉)의 사실을 밝혀냈다. 상식도 적지 않은 경우 과학적, 객관적이 아닐 수 있다는 좋은 방증이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만큼 사회현실도 과학적,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같은 사회적 사실과 팩트를 두고 다른 철학과 입장,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 논쟁이다. 북한문제ㆍ경제침체원인ㆍ사드문제ㆍ한일관계 등을 두고 싸움부터 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위한 토론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회적 합의는 개개인간의 철학과 입장이 부딪치면서 결론을 향해 갈 때, 사회적으로 가장 객관적인 답에 도달할 수 있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탈3차원적 장애인을 목표와 최고의 교양으로 삼아줄 때 한국사회는 한차원 높은 단계로 급상승하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할 경우, 남북관계와 북한현실을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할 때 크게 두 가지 어려움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북한사회 자체를 관찰하기가 어렵다는 점에 있다. 북한사회 구석구석을 조사ㆍ연구할 수만 있다면 북한사회 변동예측과 남북한 통일방법의 답을 찾기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더 심각한 두 번째의 어려움은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편향적 시각 및 이데올로기와 잘못 형성된 북한관(北韓觀)에 있다. 대북정책이 정치적인 남남갈등으로 이어질 때 보수ㆍ진보의 진영논리는 각자의 고집을 부리고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포기한다. 서로가 토론은커녕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여ㆍ야의 대북논리에서 무슨 답이 나오겠는가. 북한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눈이 삔 사람, 3차원적 장애인들 즉 토론장애인들이 많은 힘을 갖고 있는 한 대북문제는 한국사회가 풀 수 없는 난제가 되고 말 것이다. 비단 북한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사회를 정상화시키고 토론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완전한 사회과학도(社會科學徒), 탈3차원적 장애인이 되기 위해 각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탈한계적ㆍ탈고정적ㆍ탈허구적 사고, 토론의 시작

과거 대중교통 풍속도 중 하나, 큰소리로 “본 제품은 그 효능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고 외치며 여러 가지 상품들을 팔았다. ‘과학적’이란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과학이란 주관적으로가 아니라 누가 보아도 어느 곳에서도 객관적으로 맞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인 것은 자연과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에도 있다. ‘자연과학’이 자연현상을 객관적으로 연구ㆍ관찰ㆍ조사하는 것이라면,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물리학ㆍ화학ㆍ생물학 등과 같은 자연과학 부문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사회적 현상ㆍ세상사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알아야 그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다.
정치인과 학자, 언론인ㆍ방송인 등 많은 국민들이 북한문제ㆍ경제성장ㆍ복지ㆍ사드 문제ㆍ교육개혁ㆍ역사교과서 국정화ㆍ한일관계 등의 사회현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민주적으로 토론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탈바꿈되고 큰 도약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똑같은 사실ㆍ팩트를 보고도 철학과 입장, 즉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기에 객관적ㆍ과학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토론과정이 필수적이다.


민주사회를 인류사회 진화의 최종으로 보는 것은 서로의 실체와 서로 다른 입장을 인정하면서 토론하여 사회발전의 쟁점과 대안을 찾아가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사회에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구성원들이 많아질수록 고도의 민주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옹졸한 한계적 사고와 경직된 고정적 사고 그리고 사실과 동떨어진 허구적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탈한계적 사고 : 오만과 자만

첫째, ‘한계적 사고’는 지식의 단순한 축적이 ‘앎의 세계’에 도달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헌법ㆍ민법ㆍ형법 등 기본 3법 외에 상법ㆍ행정법 등을 암기하면 모르는 법이 점점 없어질까. 육법전서를 달달 외운다는 것이 곧 법학전문가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사고(legal mind)와 철학의 정립이 뒷받침되어 있지 않은 지식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알면 알수록 모르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지점을 “나의 앎은 내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에 해당된다고 본다. 눈에 보이는 세상사, 사회현상들이 전부 다가 아니다. 앞뒤, 위아래로 뒤집어보고 타인들과 대화와 토론 과정에서 깊이 우러나는 면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객관적 사고를 갖는데 도움이 된다. 탈한계적 사고를 위하여.

◇탈고정적 사고 : 집착과 아집

둘째, ‘고정적 사고’에서는 돌고 도는 변화무쌍한 세상사, 사회변동의 흐름을 볼 수 없다. 보수적 입장 또는 진보적 입장에 고정되어서 변화무쌍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주관적 판단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조용한 혁명』(The Silent Revolution)의 저자 잉글하트는 ’60ㆍ70년대 유럽 사회가 부익부 빈익빈ㆍ대량생산의 산업사회가 아니라, 삶의 질과 가치를 중시여기는 정보와 지식 등 기술이 중요시되는 탈산업사회가 되었다고 서베이를 통해서 입증했다. 산업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잘살아서 보수적이었던 사무직 화이트칼라가 반핵ㆍ녹색운동 등 자아가치 실현을 위한 변화주도세력, 좌파(Left)로 바뀌었다. 그 변화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변동이 아니라 소리없이 각 계층과 계급의 의식전환을 통하여 탈산업사회로 바뀌었다고 해서 ‘조용한 혁명’이라고 명명하였다. 인류역사에서 훌륭한 사회과학자ㆍ철학가ㆍ전문가일수록 특정 세계관에 집착하기보다는 변동하는 사회의 핵심사항을 본다. 탈고정적 사고를 위하여.

◇탈허구적 사고 : 가식과 허상

셋째, ‘탈허구적 사고’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가장 기초적 조건이다. 한국사회가 보수ㆍ진보 간의 적대적 대결을 해온 것 중에 가장 큰 원인은 거짓된 허구에 자신들의 세계관을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과학적 사회주의만이 객관성과 사실에 근거했고, 나머지 사상들은 허위의식에 불과하다고 광폭적으로 비판해 왔으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도 긴 역사 속에서 그 허구성이 발견되면서 비과학적 이데올로기로 치부되고 있다.


허구적 사고는 군사독재정권 시절 기승을 부렸다. 정권의 정통성을 한국사회에서 무리하게 찾다보니 역사적 사실들의 허구적 연결과 위장을 많이 동원하였다. 당시 산업화의 정통성을 단군신화에서 찾는 해프닝도 있었다. 역사적 사실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면서 산업화는 반공과 승공에서 비롯되고, 반공은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독립운동으로 연결시키며, 구한말 개혁사상과 실학사상에까지 역사적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그리고 단군신화까지도 연결하여 설파하는 어용전문역사학자들마저 등장하였다. 사회과학은 엄연한 사실과 실체에서 출발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허구적 사고에 빠져든 순간 가식과 허상을 과거역사에 강제이식, 임플란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허구적 사고는 한국역사와 사회과학에서 일소하여야할 최우선의 기초 작업이다.


허구적 사고는 과거 역사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사회문제에서도 큰 해악이 되고 있다. 당면한 하나의 현실문제를 들자면 남북통일문제가 대표적이다. 한국사회에서 왜 남북분단이 되고, 어떻게 통일하는게 옳다고 보느냐고 토론할 때 좌파ㆍ우파간 진영논리의 고정적 사고에서 비롯된 대립은 차라리 약과(藥果)다. 철학과 고집의 충돌은 언젠가 토론이 가능할 때 협의 내지 최소한 정ㆍ반ㆍ합(正反合)의 과정이 있을 수 있으나, 허구에 근거한 논리는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거짓의 사실에 근거하여 분단과 통일을 이야기할 때가 가장 큰 문제다. 어느 국가, 어떤 민족도 겪어보지 못하는 분단 및 전쟁의 아픔과 통일과제에서 허구적 사고는 정말 금물이다.


아주 오래된 프랜시스 베이컨의 『동굴의 우화』를 한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탈허구적 사고의 출발을 위하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9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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