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성공과 실패의 리더십

[한국사에서 읽는 리더십과 신뢰]

우리역사문화연구소 김용만 소장 입력 : 2019.11.20 10:31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개혁가였다. 실추된 조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조선의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흥선대원군. 그는 집권 후 많은 개혁정책을 시행했지만, 한번 권력을 잃은 이후에는 재집권 야욕에만 앞서, 조선의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래서 그는 실패한 정치가로 남고 말았다. 그의 리더십의 성공요소와 실패요소를 알아본다.


자신을 감추며 때를 기다린 흥선대원군

풍운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사도세자의 손자인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던 시기 조선은 안동김씨, 풍양조씨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득세하던 시기였다. 세도가들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을 잡았지만, 곧 그들이 종친 가운데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운 자를 택해 왕위로 올리며 권력을 계속 장악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총명한 종친들은 모반죄로 누명을 씌워 제거했다. 13살 때 강화도로 유배되어, 농부로 살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한 이원범은 안동김씨들에 의해 선택되어 철종이 된다. 철종 재위(1849~1863)시기 정치적 실권은 안동김씨에 있었다. 종친들은 모함을 받아 귀양이나 살해되지 않을까를 염려해야 할 정도로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살림도 넉넉하지 못했던 그는 세도가들의 잔칫집에 돌아다니며 음식과 술을 얻어먹었다. 상갓집 개, 파락호라는 놀림을 받았다고 야사에 전할 만큼, 그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행동했다. 또 시전거리 등을 돌아다니며 천하장안(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이라 불리는 4명의 무뢰배와 어울려 다니며 남몰래 파락호처럼 생활했다. 이런 행동 때문에 그는 안동김씨의 견제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야심을 숨기던 그는 종친이란 신분을 이용해 궁궐을 드나들며 왕실에서 자신을 도울 자를 찾았다. 그는 왕실의 최고 어른인 효명세자(익종)비인 조대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863년 철종이 자식이 없이 갑자기 승하하자 기회가 찾아왔다. 안동김씨들이 다음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와 적대관계였던 조대비는 왕위계승자로 그의 둘째아들 명복을 지명했다. 조대비와 이하응이 비밀리에 다음 왕위에 대한 사전 약속을 이행한 것이었다. 1852년생인 이명복이 고종이 되었지만, 12살의 어린이에 불과했으므로 권력은 그에게로 돌아갔다.

▲1864년에 건립된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운현궁 노안당. 운현궁은 조선 말기 정치의 중심지였다./사진=김용만 제공
과감한 개혁을 시도하다

그는 권력을 잡기 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했다. 자신의 심복 천하장안을 이용해 민가의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의 딸, 친척인 궁녀와 상궁 등을 통해 궁내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서민생활의 어려움을 몸소 겪었고, 극심한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주의적인 사고방식과 개혁의지를 키우고 있었다. 그는 정조와 남인계통의 실학자를 본받아 부국강병을 꿈꾸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들을 기용해 무기 제조 등의 실용 지식을 습득하려고도 했었다. 그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그럼으로써 새로워진다’는 반본(反本)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를 만난 서양인들은 그가 유난히도 빛나는 명민한 눈을 가졌다고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털을 가진 노인이 되었어도 그는 꼿꼿하고 다부진 몸을 하고, 위엄을 갖고 있었으며, 원기왕성하게 행동했다고 했다. 이런 평가에 걸맞게 그는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집권 초기부터 강력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 조선은 세도 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세도 정치는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정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의 하나다. 1800년 정조가 죽은 이후부터 김조순, 조만영, 김문근 등 왕의 외척이 된 자들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세도정치가 60년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중앙 권력이 몇몇 벌열 가문에 집중되면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은 세도가에 뇌물을 바쳐 청탁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뇌물을 주고 관리가 된 자들은 불법적인 횡령과 가렴주구를 하며 백성들의 삶의 어렵게 했다.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을 통칭하는 삼정이 크게 문란해졌다.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민란은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삼정 문란에 따른 세금 수탈문제가 가장 중요한 민란의 원인이었다. 

1863년 권력을 쥔 그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안동김씨 권세가들을 대거 정계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등용하고, 탐관오리 척결에 나섰다. 특히 붕당 간 갈등을 초래하고, 지방 토호들의 거점이 되어 백성 위에 군림하여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한 서원을 47개 중요 서원만은 남기고 모두 철폐했다.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된 관청은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군사와 관련된 중요 업무를 의논해 결정하던 임시 회의기구이지만, 조선 후기는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 관청이 되었다. 비변사에서 대신들이 회의를 통해 정책을 결정하면 왕은 그 결정에 대부분 따라야 했다. 그는 권력 체제의 핵심인 중앙 정치기구를 개혁하기 위해 비변사를 폐지하고, 조선 초기 정치기구인 의정부와 육조, 삼군부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신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양인들만 납부하던 군포를 호포제로 바꿔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게 했다. 또한 양반, 토호들이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하던 면세전을 철저히 조세해 징수했고, 법적 근거도 없이 거두는 온갖 잡세를 폐지했으며, 진상제도의 폐지, 은광산 개발 허용, 백성을 괴롭힌 환곡제도를 폐지하고 사창(社倉)제도를 시행해 지방 관리의 부정을 막는 등 대대적인 경제, 재정 개혁을 단행했다. 또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해 법질서를 다시 확립하는 개혁정치를 강행했다. 대원군은 이런 과감한 정책에 양반들은 반발했지만, 백성들은 환호했다.

▲나이 든 흥선대원군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인다./사진=김용만 제공
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경복궁 중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복궁 중건이었다. 그가 경복궁 중건 계획을 시행하자, 1865년 4월 좌의정 김병학은 “옛 궁전을 중건하는 것은 나라의 운수를 새롭게 만드는 계기”라며 찬성했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이후 숙종, 영종, 헌종 등이 중건을 계획했지만 실행되지 못하고 270년 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원군은 조선 태조가 건설한 정궁을 새로 지음으로써 국가의 위신을 높이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했다. 경복궁 중건은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건국 당시로 돌아가려는 정책 목표의 기념비이기도 했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그의 서원 철폐, 당파 초월한 인재 등용, 사창 설치, 호포 균등 부과 등은 칭찬했지만, 경복궁 중건 사업에 대해서는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시 피폐해 있던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경복궁 중건은 무리한 사업이었다. 경희궁의 건물을 뜯어서 경복궁 전각 건설에 사용하기도 했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소모되었다. 재정 조달이 어려워지자, 그는 ‘원하는 사람만 낸다’는 원납전(願納錢)을 강제 징수했고, 당백전(當百錢)을 강제로 유통시켜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했다. 약 3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68년 6월 중건 공사가 완료되어 고종과 함께 창덕궁을 나와 경복궁으로 이어할 수 있었다. 경복궁은 조선 건축, 공예, 미술의 결정체로, 오늘날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중건 당시에는 많은 사람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새 궁전을 얻었지만, 그 대신 백성들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외세 대비에 쓰여야 할 국력을 궁궐 공사에 쏟아부은 탓에, 국가에 심각한 경제적,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그가 궁궐 건설에 집착한 것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 회복에 너무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척왜양이 정책

아무리 개혁정치를 한다고 해도, 그의 생각의 바탕에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있었다. 그는 우월한 정신문명을 가진 동양이 서양의 물질문명에 물들어서는 안 되고, 단지 그들의 기술만 잘 이용하면 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입장에 세상을 바라보았다. 새로 국경을 맞대게 된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그는 1864년 리델 등 프랑스 신부와 접촉했지만, 그들로부터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1866년 병인박해를 일으켜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도를 학살했다. 그러자 프랑스가 천주교도 학살을 구실로 강화로 침공을 시도했다. 또한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 셔면호 사건을 구실로 개국을 강요하는 신미양요를 일으켰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비록 프랑스군과 미국군이 그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했지만, 그렇다고 조선이 승리한 전쟁은 결코 아니었다. 프랑스군이나 미군의 피해에 비해 조선의 피해가 월등했다. 특히 1871년 광성보전투는 미군의 압도적 대포와, 칼의 위력 앞에 어재연 장군 등 조선군 수백 명이 순국했다.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가 겨우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 것에 만족했다. 

그는 외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인 강화도에 병력을 추가 배치하고, 곳곳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며 서양오랑캐를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8년 반쯤 서양화된 일본과의 교류도 단절하면서, 과거의 조선에만 매달려 있었다. 시대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가 조선이었고, 그 자신이었음을 그 당시 흥선대원군을 알지 못했다.

그의 실각과 헛된 욕망

대원군이라는 위치는 참으로 애매한 자리였다. 그가 권력을 잡은 지 10년이 지난 1873년 고종이 벌써 22살이 되었다. 고종이 친정을 해야 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는 외척 발호를 걱정해 며느리를 선정할 때 많이 고심했지만, 결과는 며느리 민씨왕후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최대 정적이 되고 말았다. 그가 10년간 휘두른 권력을 내놓지 않자, 고종 내외는 최익현을 비롯한 반 흥선대원군 세력을 부추겨, 그의 실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고 퇴진을 주장하게 했다. 1873년 고종은 기습적으로 친정을 선포하고, 그를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하게 했다. 

강제로 물러난 탓에, 그는 수시로 재집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것이 결국 며느리 민씨왕후와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가 실각한 후, 조선에는 민씨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다시 부활했다. 그리고 그의 개혁이 하나 둘 뒤집어졌다. 1876년 강제 개항과 더불어 들어온 외세 앞에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들 고종을 폐립하고 다른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를 하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1882년 임오군란 때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청나라의 힘을 빌린 민씨일가의 역습으로 1500명이 청나라 군대에게 붙잡혀 청나라에 납치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1894년에는 동학세력과 연계해 권력을 다시 갖고자 했고, 1895년에는 일본과 연결해 재집권을 노리는 등,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개혁정치가의 공적을 스스로 깎아내렸다. 실각 후 20년 넘게 지속된 그의 재집권 야망은 조선 정치에 짐이 되었고, 혼란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1871년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은 미군의 극동함대의 우세한 무기 앞에 일방적인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조선은 적의 퇴각을 승리로 간주해, 이 전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사진=김용만 제공
흥선대원군이 실패한 지도자가 된 까닭

그가 권력을 잡을 당시, 세도정치의 60년 적폐로 인한 조선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게다가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까지 당시 대내외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이런 환경에서 그는 조선의 마지막 개혁정치가로, 집권 초기 열정적으로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실패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실각한 후에 보여준 노회한 정객의 헛된 야망으로 인한 폐해도 문제였지만, 집권 시기에도 그가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강력한 카리스마로 빠르고 강력하게 개혁정책을 시도했지만,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새로운 적을 양산했다. 그는 시전거리의 무뢰배, 궁안의 상궁과 궁녀, 경아전 등 소외받은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장악하고, 그들이 가진 힘은 그가 개혁해야 할 상대에 비해서는 너무나 미약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백성들의 지지가 중요했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인해 민심을 잃어버린 것은 너무도 커다란 실책이었다. 경복궁 중건은 그의 몰락을 가져온 시대착오적인 정책이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새로운 지지 세력을 얻지도 못한 가운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늘어가자 결국 그는 실각할 수밖에 없었다.

신뢰를 잃은 지도자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흥선대원군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아들과 며느리로부터도 신뢰를 얻지 못했고, 그들에게 권력을 잃고 말았다. 자신이 대원군이라는 애매한 정치적 위상을 가졌다면, 10년쯤 이후에는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겨줄 계획을 세우고, 후계자를 키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책이 지속될 수 없었고, 그는 불명예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과거에만 너무 집착해,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했던 것은 그에게 남는 가장 큰 아쉬움이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모두 전투에서 모두 패했음에도 이를 승리로 착각해 근본적인 조선군의 개혁이나, 무기 개발에 착수하지 못한 것은 그가 가진 성리학 중심의 세계관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성공한 개혁정치가로 남고자 했다면, 새로운 변화를 적극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는 도리어 과거 회귀적인 개혁에 머물렀다. 자신과 조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는 실패한 지도자로 남았다. 오늘의 우리를 만드는 중요 사건을 일으킨 인물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실패가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역사가 가장 실패한 역사라고 한다. 실패한 지도자 대원군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우물 안 개구리를 넘어 세계의 변화와 호흡하며, 보다 좋은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육성하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semi4094@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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