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화가의 조건은 질과 양” 피카소와 이중섭 차이는 작품수, 다작도 중요

[인물포커스] 한중국제영화제 초대지정작가 강종열 화백

박광수 기자입력 : 2017.07.08 15:14
우리나라 서남해안 근처에서 주로 서식하는 동백나무. ‘동백꽃(자포니카)’이란 이름 외에 ‘산다화(山茶花)’ ‘탐춘화(探春花)’라고도 불리는 이 꽃은 주위의 다른 꽃들이 모든 활동을 멈추고 겨울잠에 여념이 없는 초겨울부터 조금씩 꽃봉오리를 밀어내 2~4월에야 만개하는 ‘봄의 전령사’다.

강종열 화백의 ‘자포니카’ 동백은 붉은 꽃잎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하여 옛 사람들은 남자에게 농락당하고 버려진 아름다운 여인과 비교하기도 했다. 따라서 동백꽃의 꽃말은 ‘이루지 못한 사랑’과 ‘오직 당신에게만’이다.

화가 강종열이 동백꽃에 관심을 가진 것도 꽃말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고향인 전남 여수 작업실에서 동티모르를 다녀온 후 처음 마주한 꽃도 동백꽃이다. 떨어진 꽃인데도 추하다는 느낌보다 아름답고 신선하며 당당한 자태를 발견한 강 화백은 동백꽃에 집착했다.

지금까지 그려온 모든 화풍을 우선 접어두고 동백꽃에만 심취한지 10여년. 여수 바닷가 화실에서 동백꽃을 자신의 새로운 회화세계의 지평을 넓히다 보니 동백화가로서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그도 한때는 대한민국 미술계에 한 획을 긋겠다는 신념으로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작품에 천착(穿鑿)하던 시기가 있다. 당시 그에게 미술계는 ‘혁신’ ‘파격’ ‘도전’ 등 다양한 수식어로 칭송했다. 그의 생각이 180도 뒤바뀌게 된 것은 필리핀 초대전에서다. 매일 만찬을 즐길 정도로 필리핀 정부는 그를 예우했고, 그도 이런 상황을 즐겼다.

하지만 부패한 정부로부터 외면 받고 있었던 빈민층은 그가 호사를 누리던 그 시간에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살아 나가고 있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속물 근성을 한탄했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빈민가에 숨어든 그는 필리핀의 허상을 유엔(UN)이나 유니세프 등에 알리기 위해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현실들을 화폭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살인, 방화 등 불안한 치안과 폭력이 난무하는 거리도 그의 활동을 막지는 못했다. 목숨을 담보로 그려낸 그림들은 지금도 필리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증거물이 되고 있다.


-집안 자체가 예체능 집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소개를 해준다면
“가족 DNA 자체가 예체능으로 뭉쳐 있는 집안이다. 형님(강종래) 화백은 ‘제19회 대한민국 무궁화 대상’을 수상한 한국화 화가이며, 동생(강종철)은 아름다운 집을 짓고 있는 건축가다. 여동생(강종순)은 한복 디자이너이며, 막내 동생(강복순) 역시 도예 작가로 활동 중이다.”

-언제부터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게 되었는지
“어렸을 때부터다. 형님이 화가로 일찌감치 들어섰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나까지 화가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류하면 할수록 오히려 작품에 대한 욕구만 커져갔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의 지속적인 권유로 미대 입시를 준비했다. 한국의 명문대인 H대와 S대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두 번의 실패는 고교시절 전국미술대회에서 큰 상을 휩쓸다시피 한 나의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줬다.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라도 하려는 듯, 국내 미술대학의 진학을 접고 곧바로 유렵 현지 미술관 및 작가탐방의 길에 올랐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연구 섭렵하고, 당시 서양미술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귀국했다. 당시 한국은 서양미술에 대한 자료가 전무한 상태였다. 나의 자료는 각 대학이나 지역 미술인 후배들에게 공유되며 서양미술을 탐구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이후 누구의 도움도 없이‘국전(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도전해 보란 듯이 연속 3회 입·특선 했다. 이때부터 전국에 있는 화랑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국전 도전을 접고 개성 있는 표현주의적인 작품에 몰입하게 됐다.”

-당시 ‘국전’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나
“대한민국 미술계는 ‘국전’으로 시작해 ‘국전’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국전’의 위상은 드높았고, 수상 작가들에게만 많은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국전’으로 인해 대한민국 미술계가 더 이상 새로운 젊은 스타나 개성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지 못하고, 오히려 저해하는 행사로 전략하게 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새로운 시도에 목말라 했던 구상계열의 개성파 작가들과 젊은층의 미술인들은 획일적인 ‘국전’의 방향과 심사 방식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선과 색’이라는 모임을 주도했다. 어떤 사람들이 참여한 모임인가
“‘국전’의 방향과 심사 방식에 불만을 가진 외국 유학파 최쌍중 작가가 중심이 되어 인맥과 학맥을 타파한 개성 있는 작가 17명이 참여해 만든 조직이다. 당시 미술계에선 관전을 의식하지 않은 유학파와 국내의 개성 있는 작가들이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우리는 앞으로 차별화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만 살아남을 것임을 예견하고 기존 화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대한민국에서 화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대한민국 화가처럼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난 선배들의 가난과 절제되지 않은 작가 생활로 인한 과정 중에서 가정의 해체와 그로 인해 홀로 지내는 미술인 선배들을 많이 목격했다. 나 역시 젊은 시절 좋은 작품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은 크나큰 중압감에 억눌린 도전이었다.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위해 일찌감치 고향인 여수에서 화실을 운영했다. 그리고 ‘화가는 작품 수로 말한다’라는 지론을 앞세워 양질의 작품을 많이 그려내기 위해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금의 결과물들은 당시의 노력과 고뇌들의 산물들이다.”


-‘화가가 작품수로 평가 받는다’라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다. 좀 더 설명해 준다면
“프로 화가라면 질 좋은 작품 수도 많아야 한다는 뜻이다. 피카소는 살아생전 어마어마한 작품량을 남기고 타계했다. 전 세계 유명 화랑에 피카소 그림이 대부분 걸려 있을 정도다. 그렇지만 지금도 피카소 그림을 소장하지 못한 유명 화랑이나 그림 애호가들도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피카소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갤러리가 몇 곳이나 있을 것인가, 박수근 화백이나 이중섭 화백처럼 우리나라 유명 화가들은 작품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한 실력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유명 화랑이나 컬렉터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글로벌 시대에는 더욱더 양질의 작품이 많아 전 세계의 유명 화랑이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어야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예술의 전당’ 1층을 통째로 빌려 전시회를 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전시회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1996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일주일 동안 ‘예술의 전당’1층을 대관해 전시회를 치러냈다. 돈이 많아서도, 든든한 후원 조직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나에게 돈은 소중한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더 소중한 일이었다. 저렴한 전셋집에 살면서 일주일 총 전시비용을 전셋집의 두 배가 넘는 돈을 쏟아 붓는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미쳤다며 손가락질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미친 도전을 미술계에서는 작가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도전이라고 생각했는지 많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지금도 난 내가 무엇을 하고 있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또다시 그와 같은 도전의 기회가 온다면 아낌없이 나를 던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필리핀 초대전 이후 인권 화가로 활동하셨다. 특히 동티모르 작품들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어떤 계기로 인권 화가가 되었는지
“필리핀 내부 사정을 잘 모르고 부패한 정치인들과 함께 호화생활을 즐겼다는 죄책감이 나를 변화시켰다. 1990년대 필리핀은 우리나라 1960년대와 비슷했다. 수도 마닐라를 조금만 벗어나도 거리에는 노숙자들과 밥 한 끼 먹지 못해 굶주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관료들은 매일 호화 파티를 즐기며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이런 현실을 직접 목격한 이후, 부패 관료들과 함께 향응을 매일 즐긴다는 게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민가를 찾아가 생생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남기기 위해 매일 그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현실을 작품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인권 화가로서의 활동은 동티모르에서도 계속됐다. 인도네시아로부터 1998년 독립한 동티모르는 2000년에도 잔혹한 학살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그린 그림이 동티모르의 역사라는 생각으로 동티모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의 상흔과 해체된 가족들의 아픔을 화폭에 담아냈다. 지금도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동티모르 빈민들의 생활이 떠올라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 정도다.”

-외국 화가가 자신들의 아픔을 화폭에 담아냈다는 것에 대해 아직도 고마워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티모르와의 인연은 여전히 진행형인지
“나와 동티모르는 지금도 여전히 애잔한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다. 2005년 임진각에서 열린 세계평화축제 특별 초대 전시회에선 동티모르 사나나구스마오 대통령이 직접 오픈식에 참여해 주위를 놀라게 했던 기억도 있다. 개인전에 외국 정상이 오픈식에 직접 참석을 해준 것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7월 말경에도 동티모르를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최근 10년 동안은 동백꽃만 화폭에 담아낸 것으로 알고 있다. 동백꽃에 빠지게 된 사연이 궁금하다
“자신의 정체성과 지역성이 담긴 작품을 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작업실 동백나무 아래에 떨어진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본 순간 내가 그려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동백꽃은 엄동설한의 추운 겨울을 겪으면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가장 먼저 피워내는 멋진 꽃이다. 또한 아름다움이 절정에 다다르는 극적인 순간 자신의 모습을 송두리째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희망’과 ‘행운’을, 중국에선 ‘건강’과 ‘부’를 상징한다. 나에게 있어서 동백꽃은 ‘오직 너만을 위해서’다. 유독 한국에서만 동백꽃을 여성에 형상화해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묘사한다. 또한 내가 동백꽃에 반한 것은 한민족의 얼과 정신을 담고 있어 내가 살아온 모습과 진행형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34살에 ‘도록’을 발간해 당시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당시 화가들 사이엔 인생의 고희(古稀) 때나 정리해야하는 시기에‘도록’을 발행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이라도 필요하면 ‘도록’을 만들어 지금까지 내 작품들을 정리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명 화가들이 진품 위작 논란에 휩싸이는 것도 ‘도록’으로 미리 자신의 그림들을 정리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화가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 부담으로 ‘도록’을 발행하고 싶어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안다. 난 그것 역시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되돌아봐도 너무 잘 했다는 생각이다.”

-최근 ‘한중 국제영화제’ 초대 작가로 선정되셨다. 어떤 이유에서 선정됐다고 생각하는지
“국내외에서의 활동과 나의 작품의 열정들의 의해 탄생된 많은 질 높은 대작들이 영광스럽게도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사실 5명의 쟁쟁한 후보들이 각축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0여 년 동안 동백꽃 회화의 세계에 천착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행운이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린다. 후보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최종 심사에서 초대 작가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나의 열정적인 작품 활동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에 기쁨이 컸다. 초대 작가로 선정된 만큼 한중 국제영화제가 문화와 함께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고 시작한 만큼 한국, 중국을 넘어 세계인이 주목하는 영화제로 거듭나는데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다. 또한 내 작품들이 중국 전시 때에도 좋은 평가와 결과를 동시에 얻어 낼 수 있도록 더욱 노력과 열정을 아끼지 않겠다.”

강종열 화백
2015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
2014 여수국제아트페스티벌 조직위원장
2013 한국미술협회 장리석상 수상
2011 자랑스런 대한민국 미술인상
2010 오스갤러리 개인전
2009 한중대표작가 특별전
2008 BIF 부산국제아트페어
2007 대한무궁화중앙회 무궁화대상
2005 세계평화 축전, 동티모르 특별전
2004 필리핀 정부초정 5개 도시 전시회
1997 예술의전당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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