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를 꿈꾼 ‘조선그림 수집가

[차홍규 교수가 만난사람]류성백 총경리, “남북 작가 교류전 등 통해 통일의 발판이 되기를 기대”

차홍규 교수입력 : 2017.08.04 09:52

▲류성백 총경리
중국인 중 북한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알려진 중국 단둥의 진성회사 류성백 총경리. 그의 아버지는 동경제대를 나온 중국의 한족이고, 어머니가 북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족이 아닌 한족이지만, 누구 못지않게 북한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어려운 가운데도 북한의 그림 수집에 열정을 갖고 수많은 그림을 보유하고 있다. 국회에서 열린 남북 작가 교류전의 남한 작가로 참여하며, 류 총경리와 둘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술자리를 가지면서 그의 제2 고향 북한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작품에 대한 열정, 성실한 인간됨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류 총경리가 한국에 가져온 북한 작가의 작품만도 80점으로 적지 않은 양이지만 그 규모와 작품의 우수성에 대하여 같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로서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중국에는 훨씬 많은 수천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 자칫 거드름을 피울만하지만, 그는 겸손한 태도와 세련된 매너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필자가 알고 있는 여러 중국 미술인들과도 서로 연결이 되어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남자들의 호탕함 속에 류 총경리와 중국 사업처인 단둥에서 재회를 약속하며 한국에서의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짧은 전시 기간이었지만 매일 만나며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먼저 본인 소개를 부탁한다
▶중국 장춘에서 출생하여 4살 때 가족들과 함께 조선 황해도 연안군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980년에 다시 자강도 만포시로 이사하였고, 1984년에 평안남도 숙천으로 거주를 옮겨 유년기를 보냈고, 1989년에 평양 경공업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졸업 후 여러 일을 하다 1994년에 중국으로 귀국하여 랴오닝 성 단둥에서 지금까지 사업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다.


(주: 평양 경공업 대학은 1959년 9월 1일 김책 공업대학의 섬유공학부와 함흥 화학공업대학의 식료공학부가 분리, 설립된 평양의 명문대학으로 북한에 공로가 많은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이름을 따 ‘한덕수 경공업 대학’이라고도 한다. 식료공학부(식료공학과, 발효공학과), 방직공학부(방직공학과, 피복공학과, 방직완성공학과), 일용화학공학부(일용화학공학과, 도자기공학과), 종이학부(종이공학과, 공업경영학과), 기계공학부(기계공학과, 컴퓨터조종학과, 정보공학과) 등의 학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여러 연구소 및 박사원이 부설되어 있으며, 수업 연한은 4.5년으로 졸업생에게는 관련 기술 분야의 기사 자격증이 수여된다.


교육 과정의 목표는 “주체의 혁명적 세계관”을 갖추고, 기초과학 지식과 해당 공학 분야의 폭넓은 전공지식을 소유하고 과학 이론적 자질과 실천 능력을 갖춘 공학 기사를 양성하는 것이다. 영역별 교육 과정 이수시간 비중은 정치사상 교과 25∼30%, 체육과 외국어 등 일반교양 교과 10%, 일반기초 교과 40%, 전공 기초와 전공 교과 20∼25%로 우리와 비교할 때 일반기초 교과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조선향토대백과』1, 『조선대백과사전』2 등 참조)

-어릴 적 꿈은
나는 어릴적 미술가의 꿈이 너무도 컸다. 그래서 어릴 적에 일요일이나 쉬는 날이면 화판을 들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 혹은 산과 들로 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리고 싶은 풍경과 배경들을 그리곤 했다. 어떤 때는 아침에 나와 점심도 거르고 해가 저물어 서야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세계적 미술 대가로 자라고 싶다는 꿈을 꾸었지만 여건이 안 되어 하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그 꿈을 간직한 채 지금도 한으로 남아있다.

-어떻게 북한 그림을 구입하게 되었나
간절한 소망이 좌절되었지만, 어릴 적 꿈이 아직도 몸속에 살아 움직여 미술 작품을 사들이게 된 원동력이 된 것 같다. 더 이야기하자면 대학 졸업하고 중국 단둥에서 사업 시작할 때가 1994년이었다. 처음에야 어렵게 빈손으로 중국에 왔기에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힘들어서 그림 구입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지만 어릴 적 소망이라는 것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어느 날 조선의 무역 일꾼과 함께 화가 한 분이 단둥에 온 것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그림에 대한 오랜 향수로 인해 무모했지만 어렵게 첫 그림을 사게 되었다.
그 후 조선과 무역업을 하면서 돈만 모으면 화가를 직접 만나고, 평양에 있는 만수대 창작사에도 찾아가는 등 여러 방면으로 그림 수집에 노력하며 구입하게 되었다.

-조선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게 된 과정은
이렇게 수년이 지나면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도와주시는 분들이 좋은 작품이 생기면 먼저 나에게 가져 왔고, 많은 금전을 들여 사야 하기에 어려웠지만, 어릴 적 꿈과 제2 고향에 대한 향수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다하지 않고 구입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렇게 한, 두 점 수집하다 보니 어느덧 23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중국인 중에서 기장 많은 조선 작품을 소장한 사람이 되었다.

▲류성백 총경리
-북한 그림 수집 중 재미난 일화가 많았을 텐데
조선 그림 수집 중에 재미도 많았지만 어려울 때도 사실 참 많았다. 수집 중 내 마음을 설레게 한 일이 있다면 ‘조선력대 미술가 편람’(조선의 미술 력사 5세기부터 1990년대까지 조선 최고 미술가들이 서술되어 있는 책으로 저자는 조선미술 평론가 리재현이다.


이 책을 서술 하는 기간이 무려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속에 수록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내 앞에서 구입하라고 가져 왔을 때 그때마다 나는 몹시 흥분하곤 하였다.


하지만 흥분도 한순간 그 작품을 사려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하니까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움이 따르고, 여러 생각을 해야 했지만 그때마다 어릴 적 꿈이 용기를 주고 결단을 내리게 한 것 같다.

 
한번은 유고작인 고 함창연 화가의 작품을 가지고 찾아온 분이 있었다. 그 분도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로 당시 나에게 그분의 작품이 몇 점 밖에 되지 않아서 많은 욕심이 생겼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때는 회사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마음과는 달리 어쩔 수 없이 작품 구입을 포기하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는 너무도 마음이 허전하고 머릿속에는 온통 함창연 작가의 작품이 머리에 맴 돌아 밤에 도저히 잠을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전화부터 걸고는 작품의 주인에게 그림을 사려 하니 아침 첫 시간에 가져오라고 하여 끝내 사고야 말았다.


말이야 쉽지만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지난 20여 년간 그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기쁠 때보다 힘이 들고 어려울 때가 더 많았었지만 어릴 적 나의 소망의 일부분을 이룬다는 생각에 후회보다는 기쁨이라 생각한다.

-북한 그림 말고도 조선 도자기 작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데
조선의 도자기로 말하면 우아하고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특히 조선 만수대 창작사 청자기 창작단에서 창작된 작품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매년 중국 경덕진에서 열리는 국제 도자기 박람회서는 미술품을 애호하는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인 행사로 그곳을 즐겨 찾는다.
그에 못지않게 조선 만수대 창작사에서 창작되는 조선 청자기는 수준이 상당히 높아 몹시 좋아한다. 그래서 북조선에 갈 때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청자기 수집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특히 만수대 도자기 창작단의 신현수 단장을 비롯하여 우철룡, 우복단, 임경익 등의 작가들 작품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작품이다. 이분들은 조선 청자 맥을 이어온 우리나라의 귀중한 보배 작가라 생각한다.

-어떻게 한국에서 전시하게 되었나
회사를 운영하면서도 평양을 오가며 오랫동안 모아온 작품들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때로는 중국의 북경, 상해, 광주, 내몽골 등과 그 외에도 여러 도시를 돌며 전시를 해왔다.


그러던 중에 상해 전시장에서 관람객으로 찾아온 한국인 최상균 교수를 우연히 알게 되어 뜻깊은 인연이 되었다. 최 교수가 나에게 이렇게 많고도 좋은 작품들을 한국에서도 전시하여 한국 국민에게도 북의 작품들을 선보이자고 제안하였다. 그때 최상균 교수의 제안에 동감하고, 같은 민족인 조선의 미술 작품들을 한국인들에게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님의 피를 받아 중국인이지만 일찍부터 조선의 문화를 사랑하였다. 원래 하나의 민족, 하나의 나라였던 조선은 외세에 의하여 북과 남으로 갈리어 어느덧 7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조선 민족은 예로부터 예술적으로 뛰어난 민족이다. 그동안 북에서는 몰골 기법을 비롯한 다양한 화법들에 바탕을 둔 조선화를 비롯한 고려청자의 전통을 되살리는 등 미술 분야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미술을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이번에 북과 남의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역사적인 통일 염원(백두에서 한라까지) 전시를 통하여 그동안 끊어졌던 조선 민족의 미술사를 연결하고 나아가 분단을 뛰어넘는 민간 차원의 예술 교류를 하게 되었다.


(주 : 몰골 기법(沒骨 技法)은 윤곽선 없이 색채나 수묵(水墨)을 사용하여 형태를 그리는 화법으로, 대상(物像)의 뼈(骨)가 윤곽에서 ‘빠져 있다(沒)’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각저총<角抵塚> 씨름도의 수목도를 비롯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지법(樹枝法 : 산수화에서 나무 표현은 매우 기본으로 나무의 뿌리에서부터 줄기, 가지, 잎 등을 표현하는 방법. 시대와 화파에 따라 특징을 달리하기 때문에 작품의 연대와 양식의 변천을 판별하는 데 좋은 기준이 된다. 이와 반대로 해조 묘법(蟹爪描法)은 죽은 고목 등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굵은 줄기 등만 표현한다)에서 몰골법의 초기적인 양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는 구륵법(윤곽을 선으로 묶고 그 안을 색으로 칠하는 화법)에 비하여 큰 세력을 누리지 못하다가, 조선 중기부터 구륵과 몰골의 절충 양식과 더불어 주류를 이루었다. 조속(趙涑)을 비롯한 조선 중기의 수묵사의화조화가(水墨寫意花鳥畫家)들과 조선 후기의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 말기의 홍세섭(洪世燮)•장승업(張承業) 등의 화조 화법에서 이 기법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참조)

▲류성백 총경리와 차홍규 교수
-남북 작가 교류전을 하였는데 전시 중 소감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과 같이 전시장에 찾아오신 관람객들의 눈에서 뜨거운 동포의 정이 온 전시장을 차고 남기는 것을 보았다. 하루빨리 통일되기를 기원하는 마음 등 그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은 자부심과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전시가 있다면 나는 아무런 보수를 바라지 않고 남북 교류전을 꾸준히 하려고 한다. 통일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서 모든 것이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조그만 노력이 민족의 단결에 조금이라도 이바지된다면 우리 어머니는 물론 나의 후손들에게도 큰 영광이라 생각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남북 작가들의 작품 성향이 그대로 나타나는데
이번에 전시된 한국 화가들의 작품들은 큰 감동이었다.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었다. 한국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내면세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차홍규 교수님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많은 추상적 작품들은 서방 예술의 영향이 진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와 달리 북의 그림은 극사실주의적인 표현으로 현실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특징으로 서로 간에 확실한 차이를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북경의 칭화 대학 미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필자의 생각으로 동구라파, 북한, 중국, 몽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예술의 특징은 구소련의 찬란했던 예술을 소련 유학파들이 그대로 승계받아 귀국 후 가르친 1세대들의 영향에 힘입어 기초가 단단하고 사실 묘사에 탁월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예술은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유럽의 영향을 받아 어떠한 틀에 구속받지 않는 작품을 하므로, 작가의 느낌을 솔직히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는 이분법보다 서로의 환경이나 여건, 시대를 반영하여 각자 발전한 것으로 서로 간의 작품의 특징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남북한 작가의 공동 전시를 중국에서 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는지
크게는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과 남쪽 화가들을 모시고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라까지 함께 오가며 마음껏 소통하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날을 함께 창조해나기를 기대한다. 작게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주된 사업장인 단둥에서 북과 남 화가의 합동 전시를 열고 싶다. 바라기는 북남이 하루 빨리 화합하여 서로가 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상호 이해하며 화합하여 긴장이 완화되고, 나아가서는 나 같은 미술 소장가의 미약한 힘이나마 통일의 발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예술인에게 한 말씀
예술인들이나 과학자들을 보면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인들은 인간 문명의 선봉자이며 창조자들이다. 그들의 창조적인 노력으로 인하여 오늘의 문명이 이룩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인류에 공헌한 엄청난 일에 비하면 그들에 대한 보답은 참으로 많이 미흡하다. 그래도 그들은 어려운 여건임에도 개의치 않고 인간 문명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오늘도 돌리고 있다. 나는 예술을 하는 그들에게 꼭하고 싶은 말은 ‘고맙습니다’이다, 예술인들이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우리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더 좋은 예술을 창조해 주시기를 바란다고 하고 싶다.

-예술의 대중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예술은 예술이다. 예술에는 종교나 신앙과 국경이 없고 예술은 예술로서의 심오한 예술의 내면세계와 그 넋이 있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살아있는 예술이어야 대중들이 좋아하는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누구의 것만이 아닌 모든 인류의 것으로 생각한다. 예술을 종교적이나 그 무엇으로도 이용해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예술의 대중화를 위하여 보다 많은 예술인들이 마음 놓고 창작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또한 훌륭한 작품들을 발표 할 수 있는 공간이나 여건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귀국하여 보니, 예술인의 측면에서 보아 어떤 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창작 여건이 민주주의 국가들의 창작 여건보다 우수한 것이 많이 보여 이 점에 대하여는 보완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예로 우리의 주중 한국문화원은 예술과는 동떨어진 북경시 광화로에 위치하고 있어 구입 시 보다 땅값이 크게 올라 부동산 투자로는 참으로 잘한 일이나, 전시나 공연을 해도 주변이 문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관객이 없다. 반면, 북경의 북한 만수대 창작미술관의 경우는 -중앙미술학원을 나온 오랜 친구 길정태 씨가 관장으로 있는 북한의 만수대 미술관의 경우는- 북경의 세계적 예술구인 798에 위치하고 있어 많은 중국의 미술 애호가는 물론 세계적 미술 거상들이 자주 찾아 우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많은 작품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고, 앞으로 전시 계획은 
▶중국에서 조선의 작품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헤아려 보기가 어렵겠지만, 가장 좋은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면 외람되지만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많은 소중한 작품들을 보관하는 데에는, 도난 방지는 물론 항온, 항습 장치 등 여러 여건이 구비되어야 하지만 솔직히 아직은 여러 조건에 한계가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나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것은 아버지는 중국인이고 어머님은 조선 사람이지만 나는 북과 남 모두 사랑한다. 나의 소중한 작품들은 북에서 온 것으로 나의 생명과도 같이 소중하게 모은 것이지만 이번 전시를 하면서 남한의 관객들이 너무도 좋아하며 작품 감상을 하는 것을 보며, 나의 작품을 보다 좋은 곳에 사용하면 좋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즉 북의 작품을 보기 어려운 남한의 애호가들을 위하여 지방자치 단체나 미술관 등이 함께 힘을 합하여 내 소장 작품으로 북한 미술관을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주위에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

▲류성백 총경리와 차홍규 교수
-끝으로 한 말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작은 노력이 70년 동안 끊어진 북남 미술의 맥을 잇고 이로 인하여 민족 갈등을 해소하고, 민족 화합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도 이 성스러운 일을 계속 이어 나가겠다,
독자들에게 더하고 싶은 말은 나는 무슨 애국자가 되기 위해서나 누구를 대표해서 또는 어떤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 개인적으로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같이 동감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로 인하여 갈라진 70년의 문화를 서로 접하고 이해되는 계기를 제공하고 싶다. 끝으로 인터뷰를 주선하여 준 차홍규 교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필자 나이 또래들은 6•25전쟁 직후의 세대라 어린 시절 반공 교육을 참으로 열심히 받았다. 그러한 학습 효과로 북의 사람들은 얼굴이나 몸이 빨갛고 머리에 뿔도 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수하였다는 간첩이 귀순 강연을 하는 데 가보니 얼굴에 빨갛지 않았고, 뿔도 없어 의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10여 년 전 칭화대 재직 중 랴오닝 성 단둥에 출장 갔다가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자리가 없어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가 있는 식탁에 중국말로 합석의 양해를 구한 후 식사를 하는 중, 앞에 앉은 어린아이가 북한 말을 사용하기에 반가움에 “안녕? 아저씨 서울에서 왔어” 하자 갑자기 어린아이의 표정이 놀라며 어쩔 줄 모르게 크게 변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란 적이 있다.


류성백 총경리는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4살 때부터 북한에서 자랐고, 김책 공과대학에서 분리된 명문 평양 경공업대학을 나온 수재이다.


그에게 우리 대한민국은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러나 그는 오직 예술이라는 하나의 신념으로 자기 돈을 들여 작품을 중국에서 가져오고 전시하고 소장가로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더욱 그가 어렵게 모은 소중한 작품을 우리나라 미술 애호가를 위하여 여러 좋은 생각을 구상 중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아무리 바빠도 빠른 시일 내 시간을 내어 단둥에 가서 류 총경리를 다시 만나 술잔도 기울이고 같이 목욕도 하고 싶다. 남자인 그의 해맑은 웃음이 그리운 것은 어느 소녀를 짝사랑했던 어릴 적 소년 차홍규 하고는 또 다른 사나이들만의 우정이리라. 마음은 벌써 단둥의 바이주(白酒)에 취하려 한다.


류성백 총경리
1969년 7월 11일 중국 길림성 장춘 출생
황해남도 연안군 인민학교 입학
숙천 중학교졸업
평양 경공업대학 졸업
단동진성 경무유한공사 국제무역 회사 창립

■차홍규 교수
서울과기대 학사, 홍익대 석사, 동신대 박사 / 장애인 기능올림픽 운영위원 역임. 기능올림픽, 장애인 기능올림픽 심사위원 / 제2회 국제디자인(KJDA) 공모전 심사위원 / 88올림픽 기념 공모 작품전 등 서울시장상 및 장관상 등 다수 수상 / 한-중 수교 20주년 초대전 작가(주중한국대사관, 주한중국대사관) / 한국 전업미술가협회 자문위원, 한-중 조각가협회 고문, 한국조각가협회 회원 / 개인(초대)전 32회, 단체전, 국제아트페어 등 300여회 / 전 정수폴리텍대학, 우송대학교 교수, 북경 칭화대학교 미술대학 정년퇴임 / 현 한중미술협회 회장, 현재 중국 광저우 화남이공대학 고문 교수, 폴리텍 대학 화성캠퍼스 명예교수 / 북경 SUN ART 갤러리 전속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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