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리팔 독살사건, 신냉전 그리고 정보기관의 역할

[이일환의 情(정보의 눈으로)•世(세상)•思(바라보기)]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이일환 교수입력 : 2018.05.11 08:56
“소비에트 신경가스(nerve agent)가 신냉전을 촉발시키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지의 세르게이 스크리팔(Sergei Skripal) 독살사건에 대한 기사의 첫머리다. 러시아어로 ‘신참자(newcomer)’라는 뜻을 지닌 노비촉(Novichok)을 이용한 독살 시도는 2차 대전 이래 서구 유럽에서 처음으로 저질러진 일이다. 이 독가스는 지금까지 인류가 제조한 물질 중에서 가장 맹독성이 강하다. 잠시 손에 묻기만 해도 곧 치사에 이를 정도다. 노비촉은 신경세포와 근육 사이의 소통을 차단하여 호흡 마비를 유발한다. 해독제도 무용지물이다. 이 맹독성 물질을 개발한 사람은 현재 미국 프린스턴 지역에 살고 있는 러시아 출신 화학자로 올해 83세인 빌 미르자야노프(Vil Mirzayanov)이다.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GosNIIOKhT(the State Research Institute of Organic Chemistry and Technology)에서 화학자로 근무했으며, 나중에 화학무기를 생산하는 군 실험실 책임자로 일했다. 코드네임 폴리안트(Foliant)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잔혹성은 이 독성물질을 인간에게 처음 실행했다는 점이다. 이 공격은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서방권과의 심각한 외교적 위기를 촉발하고,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이래 진행돼온 양측 간의 관계를 더 악화시켰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이 공격은 한 개인에 대한 독살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러시아의 불법적인 힘의 공격”이라고 못 박으며, 영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는 형식으로 응징했다. 물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당연히 자신들의 소행이 아님을 강조하고, 같은 숫자의 자국 주재 미국, 영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방식으로 맞대응했다. 

스크리팔 독살사건은 스파이 영화의 전형적인 장면을 연상케 한다. 비밀공작 요원, 부유한 특권계층, 배신과 복수 그리고 신경가스. 사건이 발생한 솔즈베리는 범죄무대가 됐고, 수백 명의 대테러 요원들이 이 신경가스의 출처와 운송 방법 등 경위를 파헤치고자 분주히 움직였다. 전문가들은 외교행낭을 통해 이 물질을 나눠서 운반하여 특별한 용기(pistol) 속에 섞었을 것으로 추론한다. 가장 큰 의문점은 ‘왜 스크리팔이 독살 대상으로 꼽혔는가’이다. 첩보 세계에서 보면 그는 주변부 인물에 불과하다. 러시아 군 정보기관인 GRU 소속 대령으로서 구소련 붕괴 후 잠시 스페인에서 근무했으며, 1995년 영국의 대외정보부 MI6에 포섭돼 ‘포스위드(Forthwith)’라는 코드네임으로 활동했다. GRU 요원 수백 명의 전화번호와 신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할 정도로 MI6에는 비중 있는 협조자로 꼽혔다. 정보 제공 대가로 만날 때마다 5000~6000달러를 보수로 받았다. 2006년 체포되어 13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스파이 맞교환으로 영국으로 돌아온 스크리팔은 러시아가 자신을 처형 대상으로 삼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듯하다. 솔즈베리에 거주하는 동안 신분도 감추지 않고 여러 사교클럽에 가입해서 활동했다. 

스크리팔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할 정도로 중요인물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스크리팔이 러시아에 잠재적 위협이 될 정도의 요원이었다면 스파이 맞교환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스크리팔이 GRU 소속 요원들의 명단을 제공함으로써 당사자들의 분노를 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동기는 러시아의 해외 변절자 등에 대한 경고 사인이다. 변절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나, 이미 해외로 도피한 부유층 등에게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 사인을 보낸 것이다. 2010년에 푸틴이 이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변절자를 처리하는 특별한 부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의 입에다 30여 발의 총알을 처넣는 방법으로 질식시킬 필요는 있다”고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강조한 바 있다. 푸틴과 그 측근들은 온유함을 허약함으로 간주한다. “언제 어디서든 이런 악독한 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태세가 돼 있다”고 2006년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요원에 의해 독살당한 리트비넨코의 부인은 말한다. 한때 푸틴의 친구이기도 했던 보리스 베레좁스키(Boris Berezovsky)는 암살에 대비하여 변장하고 이동할 때는 똑같은 차 4대를 함께 움직일 정도로 위장술을 쓰곤 했지만, 2013년 자신의 안방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됐다. 

서방권의 어려움은 러시아에 대한 추가적인 제재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안보이슈에 대해서는 EU가 공동보조를 취하지만, 여행 제한 같은 제재도 일부 국가들은 반대한다. 여하튼 영국은 스크리팔 사건은 무력공격이며, 유엔 헌장 제51조를 적용하여 자위조치를 택했다. 23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하고 고위급 접촉을 연기했으며, 왕실 인사 등은 월드컵에 가지 않기로 했다. 이런 조치들이 러시아에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지만, 러시아 지배층을 강하게 압박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러시아가 갖는 런던의 특별한 점이다. 런던은 많은 러시아인들의 놀이터이자 안전지대이다. 영국은 러시아의 부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 완화 등 각종 금융규제를 완화했다. 그 결과 3만여 명의 러시아 신흥부호(oligarch)들이 런던에 뿌리를 내리면서 고급 아파트 등에도 투자했다. 이 때문에 “런던은 사실상 포스트 소비에트 마피아 국가”라는 별칭도 낳았다. 도이치뱅크가 런던을 자금세탁 장소이자 도피 자본의 인기 장소로서 ‘Dark Matter(암흑물질)’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다. 

러시아와 서구 유럽은 한때 파트너인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적으로 돌아서고 있다. 독일 연방정보기관 BND도 러시아 정보기관 GRU와 대외정보기관(SVR)의 암살 공작 등에 대비하여 대방첩 부서를 신설했다. 수십 명의 이 기관 소속 요원들이 지속적으로 협조자를 물색하는 것과 동시에 암호통신위성을 통해 지시를 전달받고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스크리팔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에 대한 사이버 공격을 불사할 수도 있음을 시사했다. 러시아의 산업시설, 운송 및 군사시설 그리고 발전소를 마비시키고, 푸틴이 휴대하는 스마트폰도 탐지할 수 있는 사이버 역량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스크리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영국 군부와 정보기관은 공개적으로 러시아의 심리전 형태를 띤 사이버 공격을 비난하며 자신들도 러시아를 공격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공언한 바 있다. 

바야흐로 신냉전이 가시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연이은 정상회담으로 신냉전 기류에 비켜나 있는 듯한 양상이다. 여기서 정보기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스크리팔 사건은 몇 가지 점에서 시사점을 준다. 첫째, 한 번 목표를 정하면 확실히 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과업 실현 능력이다. 둘째, 공작 실행 과정의 철저성이다. 흔적을 최소화했다. 셋째, 정보기관은 다양한 가면을 가져야 함을 보여준다. 정보와 정책에 일정 거리를 두어야 한다. 모두가 흰색이라고 외쳐도 붉은색도 있을 수 있음을 냉정하게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막후에서 비수를 갈아야 한다. 인간과 국가는 악행을 하기 위해 예비된 존재다. 상대를 선의로만 바라보고 해석해선 안 되는 것이다. 여러 개의 가면을 갖고 수집과 공작을 실행하며, 정확하고 예측력 있는 정보판단이 더욱 요구된다. 해빙기류일수록 정보기관은 냉정해져야 한다. 1%의 위험성에 대비하고, 적의 동태와 의도, 진의를 캐고 분석해야 한다. “전문가란 전문적으로 틀리는 집단”이라는 오명이 다시는 정보기관을 수식하는 문장으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으로 정보기관 책임자들은 자신의 판단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겸허한 사고가 필요하다. 나만이 옳다는 독선이 자리 잡을 때 정보의 다양성은 봉쇄되고 획일화된 정보만이 살아남는다. 이는 신냉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재앙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일환 교수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정치학 박사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carriepyu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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